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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순 Mar 03. 2021

아마도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었을

                                                                           

누군가가 나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난 백 번 중에 이백 번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로 돌아갈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때 내 옆엔 항상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고 기억이 시작되던 시절부터 난 쭉 할머니와 함께 했다.


그때 엄마는  항상 일을 해서 집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아빠는 김해에서 일을 해 한 달에 한두 번 볼 수 있을까 말까였다. 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언니들은 한창 사춘기였다. 그래서 친구가 가장 필요했던 시절에 엄마도 아빠도 언니들도 아닌 할머니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줬다. 그때의 나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묻던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할머니가 제일 좋다고 대답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내 인생 최고의 사랑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던 골목의 입구에는 경로당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유치원에 가고 나면 경로당으로 출근을 했다.


유치원이 끝나면 난 경로당으로 가서 화투를 치던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화투치는 것을 구경하고 구경하는 것이 지루해질 때 즈음 일어나 쪼그려 앉아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따온 십원짜리들로 탑을 쌓고 놀았다.


가끔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경로당에 가면 할머니들 사이에서 조용히 끼어 있다가 아까 너무 신나게  뛰어놀았던 탓에 지쳐서 잠에 들곤 했다. 분명히 잠들기 전 바깥은 환했는데 일어나고 보니 창밖이 어둑어둑 해져있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들은 다 어딜 가신 건지 아직 따듯한 방바닥에 나 혼자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이는 그 어두운 풍경 안에서 잠시 멍을 때리다가 씩씩하게 집으로 뛰어갔다.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에게 앳된 말투로 왜 나 두고 가버려써? 하고 물어보면 할머니는 항상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긴 아무리 내가 어렸어도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날 업고 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지금도 가끔 그 적당히 어둡던 풍경이 생각나면 마음이 쓸쓸해진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용돈을 드리는 날이면 할머니는 작은 내 손을 잡고 장독대가 엄청 많이 있던 고깃집으로 날 데려가 고기를 먹였고 금성 한약방에서 한약재를 사와 마당에서 직접 한약을 달여주기도 했다.


여름날, 할머니는 모시옷을 꺼내 입고 나는 엄마가 시장에서 사준 귀여운 나시티를 입고 할머니의 두꺼운 손을 꼭 잡은 채로 동네를 크게 걷기도 했고, 계절이 변해 마당에 있던 감나무에 감이 열리면 감이 맛있게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옥상으로  장대를 가지고 올라가 홍시를 따서 냉동실에 얼려두고는 방 안에서 둘이 마주 앉아 아이스크림 가게에 온 것처럼 역할극을 하며 얼린 홍시를 먹기도 했다.


 또 할머니와 내가 쓰는 방 한편엔 크게 붙박이장이 있었다. 여닫이문이던 그 붙박이장을 열면 할머니가 성당 갈 때마다 꺼내 입던 치마들과 아주 오래된 계절이 지난 옷들, 바닥 한편에 넣어둔 내가 좋아하던 내 남색 한복과 심심할 때마다 꺼내서 둘러보던 할머니의 여우 모양 털목도리가 있었다. 걸려진 옷들 밑에는 우리의 주전부리들이 보물처럼 숨겨져 있었는데 붙박이장 앞에 마주 앉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시종일관 웃으면서 주전부리를 함께 먹던 할머니와 내 모습이 뚜렷하게 그려진다. 지금도 그 붙박이장을 생각하면 붙박이장 속 쾌쾌하고 따듯한 먼지 냄새가 맡아지는 듯하다. 이따금씩 할머니가 아플 때면 고사리 손으로 김치죽을 해서 보리차를 따듯하게 끓여 할머니에게 가져가곤 했다. 그때 김치죽 되게 좋아했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선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성당에 다녔다. 그래서 매일같이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서 촛불 두 개를 켜고 성모마리아상 앞에 앉아 묵주기도를 했고 자기 전에도 새벽과 똑같이 묵주기도를 했다. 나는 항상 할머니에게 그만하고 빨랑 누워서 나랑 놀자고 칭얼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울 할머니 절대 흔들리지 않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했다. 지독한 아니 독실한 카톨릭 신자.. 그때 투정 부리며 할머니 무릎에 막 앉고 눕고 별 쑈를 다 했는데 왜그랬냐 진짜... 아 가끔씩은 내 친구 수진이네 엄마랑 우리 할머니랑 전일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기도 했다. 할머니랑 수진이네 엄마가 운동장을 돌고 있으면 나랑 수진이는 그네도 타고 정글짐에서 놀더 기억이 있다.


이뿐이 아니고 할머니의 낡은 동전지갑이라던지, 깜깜한 밤 나를 데릴러 와주던 할머니의 걸음걸이라던지, 상추에 쌈장만 올려서 줬을 뿐인데 세상 제일 달달했던 점심밥이라던지, 직접 만들어주던 육개장까지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들이 있지만 내 기억력의 한계가 원망스러울 만큼 할머니와 함께 했던 모든 하루하루를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다.


그렇게 평생 함께일 것만 같던 할머니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돌아가셨다. 사람이 살면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이 몇 있다면 난 꼭 그날 일 것이다.


그 시절 아빠는 대학가 근처에서 가게를 하고 있을 때라 새벽에도 나  혼자 잠드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갑자기 새벽에 눈이 떠졌다. 혼자 자는 거라 불을 켜두고 잠을 자서 일어났을 때에 사방이 밝았다. 주변은 너무 조용했고 불 켜진 방안에 혼자 앉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기분이 아주 이상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집 전화기로 전화가 왔고 아빠는 할머니 영정사진을 챙겨 놓으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빠가 너무 담담한 탓에 나도 별생각 없이 할머니 영정사진을 챙겨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고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와 할머니가 있던 병원에 갈 때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내 11년 인생 살면서 그렇게 많이 울었던 적이 없을 것이다. 나와 할머니의 각별함을 다 알고 있던 친척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고 더 마음 아파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혼자 남을 내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할머니 병원에 갔었는데 예전 같으면 조잘조잘 떠드는 내 모든 말에 대꾸를 해줬을 할머니가 어쩐지 무정한 표정을 하고선 내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에 할머니 왜 대답을 안 해?!? 했는데 그 말에도 대답이 없었던 것 같다. 크면서 알게 된 건 할머니는 먼저 정을 떼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면 안 되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를 시절이라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만약 지금의 나에게 그런 시련이 닥친다면 나는 못 견뎠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전부를 잃는 건데 어떻게 괜찮아질 수가 있을까. 그래도 꽤 할머니 꿈을 꿨었는데 어느샌가 꿈조차 꾸지 않았다.


만약 이 세상에 무조건 적인 사랑이 있다고 한다면 할머니가 나에게 줬던 사랑을 맨 처음으로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 사랑 덕분에 지금 이렇게 자랄 수 있었다. 매일 밤 할머니의 따듯한 품에 안겨서 내가 잠들 때까지 내 등을 긁어주던 할머니 손길이 말할 수 없이 그립지만 할머니가 바라는 나의 미래는 그리움 보다 사랑이 더 많은 사람일 테니 그리움은 가끔씩만 꺼내보고 할머니가 줬던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먼저 생각하기로 했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우리지만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할머니, 엄마, 아빠 이 모든 역할을 하느라 바빴을 나의 남원할매에게 나를 이렇게 키워줘서 고맙다고, 할머니 덕분에 그 쪼그만 똥강아지가 언제 이렇게 컸다고, 종종 심각하게 할머니를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 하루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나 꽤 잘 큰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드라마나 영화 보면 꼭 다음 생에는 할머니가 내 손주로 태어나라고 하던데 철없는 소리지만 난 다시 태어나도 할머니가 내 할머니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 난 그냥 또 할머니 손주로 태어나서 할머니랑 손잡고 목욕탕 가고 일요일에 할머니 따라 성당도 가고 우성 상가 지하에서 할머니랑 같이 돈까스 먹을래. 나 원래 다시 태어나라고 하면 안 태어나려고 했는데 할머니 만날 수 있다고 하면 무조건 다시 태어날게. 우리 그때 꼭! 다시 만나자.


                                              

이 그리움 평생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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