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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Jun 11. 2021

안면 김 씨의 시작

故김대환을 기리며

1. 할아버지 때는 거부(巨富)였다는데 왜 그의 막내아들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나?


1906년 김광찬은 충남 서산에 경주 김 씨 집안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부유한 양반 집이었고,

농사짓는 땅이며 안면도에 이르기까지 산지마저 넉넉히 소유하고 있었고,

일본 놈들 세상이 되었어도 수완 좋은 아버지 덕분에 재산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때는 장남에게 거의 전재산을 물려주던 시절,

광찬의 3살 위 형님,"광현"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집안의 땅의 경계를 익히고

어떻게 재산을 지켜야 하는지 배웠지만

둘째 아들인 광찬은 그런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단다.


4대 독자였던 광찬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 모르셨다.

학교를 보내달라는 광찬에게

둘째 아들은 장남인 형의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존재인 것을

왜 학교에 가서 배우려 하는지 이해하질 못하셨단다.

학교 다녀봤자 일본 놈들 꼬붕만 되니 농사나 배우라는 말로 일축했다.


김광찬은 17살 되던 해, 먼 친척 어르신이 광산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황해도로 무작정 갔다.


처음엔 황해도에 있는 금광에서 일했는데, 일이 너무 고되어

조금 아랫 지방으로 내려와 석탄 광산으로 가서 착실히 돈을 모으며

그곳에서 아내도 만나 첫 딸을 낳고, 둘째로 아들까지 얻었다.


몇년 후, 광산 소유주였던 일본인 사장이 일본으로 돌아가며 조선인에게 인수했는데,

일본 놈보다 같은 동포인 조선인 사장이 얼마나 악독하던지

광찬은 그 당시 광산에서 십장으로 나름 일꾼들을 이끌던 위치였는데

임금을 줄이려는 사장과 대판 싸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실로 금의환향이었다.

궤짝 한 가득을  돈과 금괴와 온갖 패물들로 채워 가져왔단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서산은 여기저기 간척사업을 해서 농토를 늘렸고,

일제 강점기 때 간척 사업은 더더욱 활성화되어 지주들의 땅은 점점 넓어지던 터였는데


광찬의 형은 사업수완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저 가지고 있던 땅을 지키기 급급해하며 어째 가세가 기울고 있었는데

광찬은 배포 좋게 배를 한 척 사서 어민들에게 빌려주는 형식의 사업도 하고,

간척 사업까지 뛰어들어

돈으로 가득 찬 궤짝을 두 개나 더 만들었단다.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마을이 쑥대밭이 되고,  

광찬의 집 또한 북한군이 식량창고인 '광'을 다 비우고

얼마 후엔 또 국군이 와서 베이스캠프로 삼으며 엉망이 되었지만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배 사업이 잘 되어  배를 3척으로 늘리고,

간척 사업으로 농토는 더 넓어졌다.


하지만 안면도까지 간척을 하여 염전을 만들도록 사업을 확장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염전 사업에서 자금 흐름이 막혀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더니

배도 한 척 태풍으로 뒤집혀 배에 실린 물품들이 사라지며 피해액이 커진 데다,

그 배에 타서 실종된 선원들의 가족에게 줄 보상금 문제까지 걸리며

그 많던 재산이 소금 녹듯이 사라졌단다.


그래서 서산의 땅은 거의 다 팔리거나 채권자와 은행으로 넘어갔고

남은 건 안면도 산지와 거친 농지, 그리고 염전으로 만들려다 실패한 '구역 밭'이라 불리는 소금기 있는 땅 뿐이었다.


김광현, 광찬 형제는 이렇듯 안면도로 쫓기듯 와서

집을 짓고 아이들 학교를 보내며 안면도에 자리를 잡으면서

'안면 김씨'로서 다시 시작했다.


광찬의 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농사를 지을만한 땅들은 이 장남의 자손 둘에게 나뉘었고,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만이

광찬이 황해도에서 낳아 온 딸 "향자" , 아들 "준환"에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 낳은 아들 둘 "진환" "상환", 딸 하나 "미자",

1956년 51세의 나이에  늦둥이 막내아들, "대환"에게 조금씩 나누어졌다.


그 막내아들 "대환"이 내 시아버지시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금세 일상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내가 알던 사람의 사망은 날 생각보다 크게 흔들어놓았다.

'김대환'이란 사람의 존재가 완전히 잊히는 것이 왠지 두려웠다.

내가 듣고 아는 바대로라도 정리하고자 글을 남긴다.



故 김광찬 (1906년생) - 황해도 광산에서 돈을 벌고 고향인 서산으로 내려와 간척 사업과 배 사업을 하시다가 안면도로 들어와 바지락 농사를 지으셨다. 1983년에 소천.


故 향자(30년생) 첫째 딸 - 안면도에서 고추 농사하며 2남 2녀를 기르셨고,  2013년에 돌아가셨다.


故 준환(33년생) 첫째 아들 - 안면도에서 아버지를 도와 바지락 농사를 열심히 지었으나, 막내아들을 사고로 잃고 술만 마시다 1982년에 돌아가셨다. 1남 3녀.


진환(38년생) 둘째 아들 - 16살 때부터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서 일하며 가정을 꾸렸는데, 형님이 돌아가시자 안면도로 돌아와 바지락 농사를 지으시고 현재도 안면도에서 사신다. 슬하에 1남 4녀.


故 상환(43년생) 셋째 아들 - 배 사업을 해보겠다고 하다가 온 집안 식구들 돈 다 끌어다 쓰고 명의까지 빌려 다들 빚쟁이 만들어놓고는 1986년에 바다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한다. 슬하에 1남 1녀.


미자(48년생) 둘째 딸 - 포항 부잣집으로 시집가 아들만 셋을 낳았다. 시장에서 이불과 의류업을 크게 해서 엄청 부유하게 사셨다가 IMF 때 사업이 기울어져, 우리 시아버지 근무하시던 천안으로 와서 식당을 하시며 다시 재기하시곤, 지금은 서울에서 미혼인 둘째 아들과 함께 사신다.


故 대환(56년생) 막내아들 - 우리 시아버지. 안면도에서 수재 났다고 해서 충남 공주 사대부고라는 명문고로 유학을 보냈는데, 이미 시아버지께서 고등학교 다닐 땐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운 참이라 학비를 형들과 누나가 겨우 대주고 있는 터라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체신국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20년 근속 후 공인중개업을 운영하시다 2021년 영면하시다. 슬하에 2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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