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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Jun 14. 2021

4남 2녀를 키웠더니, 손주들은 21명으로 늘어났다.

故김대환을 기리며 2

2. 모든 가족사는 한 편의 대하소설 같고, 어찌나 눈물 나는 사연들이 많은지....



광찬은 1935년 서산에서의 사업을 늘려가다가 하나의 사업에서 자금이 막히면서 채무에 시달리고, 빚잔치를 한 뒤 남은 땅인 안면도로 1952년에 들어오게 된다.


1951년까지만 해도 중공군이 내려와 나라 전체가 어지러웠었으나

1952년부턴 후방인 충청도는 딱히 전쟁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피난민도 드물었단다.


1930년생인 첫째 향자는 23살에 그 당시 노처녀 취급을 받으며 고추 농사를 짓는 집 절름발이 아들에게 시집간다.

어렸을 때 나무를 타다 절름발이가 된 향자의 신랑은 다리 덕분에 국군으로 차출되지 않았다.


일본 놈들은 매운 맛은 덜 하고 단 맛이 나는 고추를 좋아해서 일제강점기 때 안면도 정당리에 대규모 고추 농장을 만들었었고, 해방이 되면서 그 농장에서 일하던 사둔 어른들이 헐값으로 매입했단다.


광찬은 첫 딸이 농사꾼에게 시집 가 평생을 뙤약볕에서 일하며 땅에 코 박고 살아갈 것이 염려되어 시집보내기 싫었지만,

광찬의 아내는 지금도 노처녀인데 더 나이 들면 진짜 시집 못 간다며 부실한 도 허겁지겁 받고

향자는 그렇게 시집 가서 아들 둘 딸 둘을 낳았다.


향자가 1953년 첫아들을 낳고, 1955년에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향자의 어머니는 1956년에 막내아들을 낳았더랬다.


그래서 나의 신랑은 본인의 아버지(56년생 대환)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 형(53년생 병남, 55년생 병익)이 있게 된 것이다.


향자는 아버지의 예상대로 평생 농사일 때문에 두더지처럼 땅만 파며 살았다.

고추 대부분을 일본의 농업협동조합이 밭떼기로 수입해갔는데,

일본 놈들은 몰래 와서 본인들의 기준으로 농사를 잘 관리하는지 시찰했으므로

평생 뙤약볕에서 고추만 신경 쓰며 살게 되었다.


'정당리 고모'라고 불리던 고모님을 난 명절 때 한 대여섯 번 뵈었는데 그때도 말을 점점 잃어가시며 병색이 완연하셨다.

내가 시집왔을 때 이미 그녀의 아들들이 환갑을 앞두고 있었을 때이니 노환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고된 노동이 이어진 삶 때문이 아닐까.


고추밭 부지값만 해도 몇 십억이고, 매년 수출액이 현금으로 몇 억씩 통장에 꽂혀 부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농사해서 돈 버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몇 십억 부자들의 이미지와는 꽤 멀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부자라도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밭에 갈 수는 없으며 프라다 가방에 고추를 담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고모님을 마지막에 뵀을 때도 수십억 자산가인 그녀는

일복을 입고 고추를 하나하나 닦으며, 눈이 매워 눈가에 눈물이 개진 개진 배어 나오고 있었다.


1933년 생인 장남 "준환" 또한 안면도에서 짝을 맺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정해준 여자에 정을 못 붙인 준환은 온다 간다 말도 안 하고 어느 날 집을 나갔더란다.

준환의 첫 아내는 뱃속에 딸을 임신 중이었는데, 딸을 사산했고, 애기 엄마 또한 열병 앓다 일주일 만에 딸을 따라 하늘로 갔다.

3년 후 준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여자와 함께 왔는데


그녀가 지금의 86세의 큰어머님이시다.

지금 생존해 계신 집안 어른 중 가장 나이가 많으신데

내가 결혼한 10년 전보다 더 이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었다.


결혼 전 내가 인사하러 큰 집에 갔을 때, 담배를 맛있게 피우시며 내게 곱다고 칭찬 많이 해주셔서 난 기분 좋게  감사하다 했는데

어째 묘하게 다들 큰어머니의 말씀을 다 무시하는 듯하는 분위기에,

큰어머니가 같은 말을 반복하시기에 이상하다 했더니

나중에 신랑이 하는 말이 치매라 알려주었다.


그때만 해도 멀쩡해 보였는데,

이젠 걷지도 못하시고, 담배 태우는 법도 잊어버리시고 요양병원에 계신다 한다.

큰어머님도 힘드시겠지만,

자손들도 오랜 투병생활에 서로 힘들어해서 참 딱하다.


여하튼 '광찬'은 아들이 데려온 여자를 너무나 미워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건지도 모르는 걸 들여왔다며 아들과 며느리를 지독히도 구박했단다.


게다가 준환의 아내는 줄줄이 딸만 셋을 낳아 10년을 그렇게 시아버지의 미움을 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도 큰며느리로서 집안의 대소사와 제사를 지극히 모셨는데

준환의 전 부인 제사까지 챙겨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자부라고 소문이 자자했단다.


그리고 넷째로 첫아들이 태어나고, 곧이어 둘째 아들도 연년생으로 낳으면서 시아버지의 미움도 수그러들었다.


광찬은 친손자 둘 중에서도 첫째 "기석"보단 둘째 "기준"을 너무나 예뻐했다.


하지만 기준은 스무 살 때, 대학 입학식 날 선배들과 술을 먹다가 그 다음날 도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같이 술을 먹던 선배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는데,

분명 대학교 잔디밭에서 같이 먹었다던 선배들은 다음날 차를 타고 40분 거리인 근교의 여관방에서 지들끼리만 자고 있어 모른다는 대답 뿐이었다.


1981년 신문에도 났던 대학생 의문사는 그저 술 먹고 실족사한 것으로 결말이 났고


아들을 잃은 '준환'도, 예뻐하던 손자를 잃은 '광찬'도 매일같이 술을 마셔서 그때 건강이 두 분 다 악화되어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셨다.






故 김광찬 (1906년생) - 황해도 광산에서 돈을 벌고 고향인 서산으로 내려와 간척 사업과 배 사업을 하시다가 안면도로 들어와 바지락 농사를 지으셨다. 1983년에 소천.


故 향자(30년생) 첫째 딸 - 안면도에서 고추 농사하며 2남 2녀를 기르셨고,  2013년에 돌아가셨다.


故 준환(33년생) 첫째 아들 - 안면도에서 아버지를 도와 바지락 농사를 열심히 지었으나, 막내아들을 사고로 잃고 술만 마시다 1982년에 돌아가셨다. 1남 3녀.


진환(38년생) 둘째 아들 - 16살 때부터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서 일하며 가정을 꾸렸는데, 형님이 돌아가시자 안면도로 돌아와 바지락 농사를 지으시고 현재도 안면도에서 사신다. 슬하에 1남 4녀.


故 상환(43년생) 셋째 아들 - 배 사업을 해보겠다고 하다가 온 집안 식구들 돈 다 끌어다 쓰고 명의까지 빌려 다들 빚쟁이 만들어놓고는 1986년에 바다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한다. 슬하에 1남 1녀.


미자(48년생) 둘째 딸 - 포항 부잣집으로 시집가 아들만 셋을 낳았다. 시장에서 이불과 의류업을 크게 해서 엄청 부유하게 사셨다가 IMF 때 사업이 기울어져, 우리 시아버지 근무하시던 천안으로 와서 식당을 하시며 다시 재기하시곤, 지금은 서울에서 미혼인 둘째 아들과 함께 사신다.


故 대환(56년생) 막내아들 - 우리 시아버지. 안면도에서 수재 났다고 해서 충남 공주 사대부고라는 명문고로 유학을 보냈는데, 이미 시아버지께서 고등학교 다닐 땐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운 참이라 학비를 형들과 누나가 겨우 대주고 있는 터라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체신국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가 20년 근속 후 공인중개업을 운영하시다 2021년 영면하시다. 슬하에 2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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