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얀 Oct 28. 2020

내가 정말로 지쳤을 때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IT 이젠 모르겠고 그냥 절에 들어가고 싶다.

번아웃을 겪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나는 한동안 IT 분야의 글들을 따라잡는데 지친 감정을 느꼈다. 마이 데이터니, 쿠버네티스니, OKR이니, Snowflake니. IT를 둘러싼, IT에 대한 소식을 볼 때마다 놓치면 안 된다는 감정 한편으로 진짜 보기 싫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글을 보면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나는 그리고 우리 팀은 무엇을 잘하고 있고 못하고 있는지 계속 생각해야 하는 데 지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속으로 연신 되뇌었다. 물론 진짜로 출가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IT 분야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에 가서 이런저런 생각을 차단하고 싶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는 언젠가 여행을 갔을 때, 시골이라 카카오 택시가 잡히지 않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한참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그걸 본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꼭 당연한 일은 아닐 수도 있겠다 느꼈다고 했다. 내가 생각한 "절"이 동료에게는 여행을 갔던 곳이 아니었을까.


나를 회사에 데려왔던 선배에게 몇 번 이런 말을 했을 때 선배는 대답해주었다. 일이었다면 조금 지쳐도 무던하게 지나갈 수 있을 텐데 어쩌면 그냥 일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네가 정말로 좋아했고 가치를 크게 뒀던 만큼 마음이 크게 돌아선 것일 수도 있다고 했었다.


두 번째로, 자꾸 과거에 대한 일을 곱씹게 되었다. 돈을 벌다 공부를 하고 다시 돈을 벌다 보니, 나는 이제 서른 초반이었다. 사회에 나온 건 스물넷이었는데 말이다. 나이 자체가 문제라기보단, 내가 사회에 나온 지 어느덧 7년이 되어가는데 그동안 나는 어떤 성장을 한 건가 싶어 움츠러들었다. 손에 잡히는 또렷한 성취가 없어 보였다. 회사에는 정말 똑똑한 20대 초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무엇을 이룬 건지 혼란스러웠다. 나의 생각은 자꾸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12년 전 대학교 첫 학기 때 파이썬 수업까지 생각하게 했다. 어쩌면 이래서 사람들이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소설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과거의 일을 자꾸 생각하는 건 우울증에 아주 좋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힘든 삶인데, 스스로를 가중해서 괴롭히는 일이니 말이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았다.

1. IT 분야에 지친 마음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마음을 돌려보기

2. 과거를 곱씹는 버릇 극복을 위해 일단 오늘을 잘 살기

3. 일하면서 깨달았던 것,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IT 분야에 지친 마음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온갖 시도 끝에 지금에서야 겨우 마음이 돌아오고 있다. 한동안 나는 이 현상 때문에 고민이 컸었다. 성실하게 읽고 쓴다는 것이 내 몇 가지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라 생각했었는데, 스타트업과 기획자로서, 업무에 대한 "기민함"을 놓아버리려 하는 것에 대해 크게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꽤나 심각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꾸 과거를 곱씹는 버릇은, 이제 좀 덜 하게 되었다. 여전히 기민한 친구들을 볼 때 위기의식이 들지만.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고, 내가 했던 일에 대한 스토리라인은 나만이 알고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커리어의 기획을, 자기 일의 스토리라인 전체를 알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만을 볼뿐, 미래를 읽어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제현주,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단 하나의 경로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는, 내가 의식적으로 내리는 선택보다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행운과 불운, 그 행운과 불운을 대하는 나의 태도로 결정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고, 그 덕에 선택은 가볍게 하고 오늘은 단단하게 살려고 한다. 역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일상뿐이다.
-제현주, 일하는 마음


이 두 문단을 연결해 볼까. 내 스토리는 내가 아는 것이고 그 이외의 행운과 불운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오늘의 일상을 잘 살겠다. 

나는 그래서 내 일상을 열심히 챙겨보되,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일하면서 경험했던 것, 느꼈던 것을 정리해야겠다 결심했다.


+

배경 사진 출처: Abbie bernet from Unsplash

이전 05화 아직은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