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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Aug 20. 2019

가족 간에도 거리가 필요해요.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20



인간은 게으름에 적응하는 동물인가 봐요.


어제 하루 집에서 뒹굴었더니 오늘도 나가기가 귀찮아요. 게다가 PT까지 받아야 하다니 너무 최악이지 않나요? 개학 전까지 남은 시간을 운동으로 불사르겠다고 결심한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운동이 싫어요. 괜스레 잠도 오는 것 같고요. 하지만, 노쇼(NO SHOW)로 비싼 돈을 날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운동은 돈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 나오나 봐요. 막상 나가면 잘할 거예요. 아이도 방해받지 않고 핸드폰을 볼 수 있는 기회라 얼마나 기다린다고요.


어제 하루 먹고 자기만 했더니 그새 몸이 무거워진 느낌이에요. 레깅스를 입어도 태도 안나고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랫배가 두둑해 보일까요. 아마 그날이 다가와서 일거라고 자신을 토닥여 봅니다.


언제나처럼 운동화를 먼저 갈아 신고, 라커에 옷과 핸드백을 넣어두는 것으로 채비를 시작해요. 링거가 필요할 때 마시면 효과 있다며 남편이 크라우드펀딩에서 산 쓸데없는 가루도 물에 타고요. 헤드셋을 키운 핸드폰을 아이에게 건네요. 급한 일이 있으면 내려와서 엄마를 찾으라고 당부도 하고요. 시작시간 5분 전이에요. 오늘은 이 정도에서 센터에 내려가 볼까 해요.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이 없어요. 바다 뷰도 여전히 멋지고요. 자연스럽게 거울 앞에 가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으면 될 텐데 어쩐지 쑥스러워요. 이상한 포즈로 운동하고 있다고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거든요. 두리번두리번거리면 센터의 여기저기를 배회해요. 아마 이 모습이 더 눈에 띄고 이상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에요. 드디어 강사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내셨어요.


어제 하루 운동을 쉰 것 때문에 컨디션부터 물어보세요. 하루 종일 잠만 자다 와서 아직도 졸리다는 농담으로 운동을 시작해요. 쇠 막대기를 드는 건데요. 허리를 45도 각도로 숙이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무릎은 살짝 굽힌 상태로 쇠 막대기를 드는 거예요. 팔꿈치는 고정하고 막대기는 배꼽 쪽으로 당기래요. 20번씩 3세트를 하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하루 쉰 효과가 있나 봐요. 이번엔 스쿼트인데도 올라올 때 점프를 하래요. 어? 며칠 전 만해도 스쿼트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할 만한 걸요? 선생님도 놀라세요. 잘 따라오고 있다면서요.


이번엔 거대한 기구에 무릎 꿇듯 올라가요. 그리고 상단바를 두 팔로 끌어내리며 가슴을 위로 내미는 거예요. 가까스로 스무 번을 해냈어요. 잘 해냈다며 선생님은 무게를 줄여보시겠대요. 잘했는데 왜 무게를 줄이냐고요? 중량이 무거울수록 상단바를 내리는데 도움이 주는 거라네요. 참! 이 운동은 등과 안쪽 팔에 자극을 준대요. 그런데, 체중을 들어 올리며 힘을 주다 보니 왼쪽 관자놀이가 조금 아파요. 선생님은 그러면 무게를 유지하고 다시 한번 해보라셔요. 5개를 하자 이번엔 오른쪽 관자놀이까지 아파와요. 겨우 열다섯 개를 채웠는데 양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요.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며 다른 것을 종목을 바꿔요.


캐틀벨 10kg를 드는 거예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요. 앞서 이틀 동안 상하체 운동을 하며 힘들었던 게 확실히 체력단련이 되었나 봐요. 그런데 머리가 아픈 것이 가시지가 않아요. 선생님이 '운동 중단'을 선언해요. 운동 시작 20분 만에요. 이번 건은 다음으로 넘기고 병원부터 가보라고 하세요. 동료 중에도 비슷한 증상이 있어서 병원을 다닌다고요. 힘을 내서 왔는데 20분 만에 중단이라니요. 아쉬운 마음에 유산소 운동이라도 하고 갈까 여쭈어요. 아무래도 지금은 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세요. 아, 제 몸덩어리는 도대체 왜 이런 걸까요.


이런 증상이 시작된 건 작년쯤이었어요. 작은, 아니 조금 센 교통사고가 났고, 그날 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어요. 특별한 타박상도 없었는데 말이죠.  차는 역대급 수리에 들어갔지만 다행히 우리 가족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지요. 그런데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며 힘을 주는데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거예요. 혈압이 오른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생각하니 무서워졌어요. 얼른 거실로 나와 바닥에 누웠어요. 남편도 꽤 놀랐지요. 체력은 약해도 건강검진 상 특별한 이상이 없던 사람이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하며 나왔으니까요. 응급실에 전화를 하고 잠시 기다렸어요. 당장 차에 오르기도 힘들었거든요. 그리고 10분 정도 지나자 괜찮아졌어요. 교통사고의 충격인지, 무리하게 항문에 힘을 주다가 뇌압이 올라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 가끔 어떤 일로건 힘을 줘야 할 때면 머리가 아파왔어요.

 

막상 신경외과를 찾으려니 겁이 나요. 그래서 다른 병원을 가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요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라는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요, 운동을 시작했잖아요. 확실히 몸에서 놀라기는 했나 봐요. PT를 받다가 머리가 아픈 일도 오늘 검진에서도 분명 이상반응이 나온 거예요. 오늘 운동을 제대로 못해서 찜찜했는데, 저는 공식적으로 쉬어줘야 하는 몸이 되었요. 어쩔 수 없요. 건강이 우선이잖아요.



약을 먹으려면 우선 식사를 해야 해요. 아침을 너무 간단히 먹었더니 배 무척 고파요. 일전에 남편이 준 커피 쿠폰이 있는데 그 집이 마침 피자도 한대요. 고민 없이 그곳으로 향해요.


자몽에이드와 흑돼지 피자를 주문해요. 제주산 자연치즈를 쓴다고 하니 그 맛이 기대가 돼요.


드디어 음식이 나왔는데 비주얼이 훌륭하지는 않아요. 집에서 만든 듯한 비전문가의 솜씨라고나 할까요? 아주 평범한 그런 모양이네요. 그런데! 치즈가 장난이 아니에요. 두께가 1센티는 되어 보여요. 배가 고파 그런지 더 꿀맛이에요. 토마토소스도 수제로 만드셨다는데 맛이 강하지 않고 토핑 하나하나의 맛을 해치지 않아요. 이거 꽤 괜찮은데요?


아이도 잘 먹어요. 이 아이는 입이 기가 막히게 정직해서 정성 들여 만든 음식에 '따봉'을 날려줘요. 오늘의 피자는 따봉이었대요. 빙수를 먹고 싶다고 하는데 전에 갔던 카페가 말차 빙수로 유명한 곳이라 그곳으로 가기로 해요. 본래는 우유빙수를 했는데, 거기에서는 오래 머물며 글쓰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 살짝 회유했어요. 아이가 녹차라떼를 좋아하거든요. 커피는 카페인이 들어 못 마시게 하면서 녹차에는 관대하다니 아이러니죠?

 


차로 20분을 달려 카페에 도착합니다. 도민들도 자주 찾는 곳이라 이미 차가 많아요. 콘센트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말차 빙수를 주문해요. 오늘은 구름이 많아 전처럼 사진이 예쁘지 않네요.


커다란 접시에 산처럼 쌓인 빙수는 달지 않아요. 빙수가 달지 않다니 이상하죠? 우유얼음과 녹차 얼음이 따로 또 같이 섞여있네요. 눈꽃빙수의 결은 아니고요. 대패 빙수에 가까워요.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있거든요. 떡도 보드랍게 찰지네요.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바닥에 팥이 드러나요. 기대도 안 했던 것이 떡하니 있으니 별미인데요? 남편에게 자랑을 해요.



이제 아이와 저 각자의 시간을 가질 때가 왔어요. 아이는 헤드셋으로 유튜브를 보고요, 저는 글을 써요. 아까 운동이 짧게 끝나서 핸드폰 타임도 짧게 끝났다고 아이가 억울해했거든요.


바람이 부네요. 바다는 날씨에 따라 얼굴색을 바꾸죠. 오늘의 바다는 검은색이에요. 타자를 치다가 아이와 눈이 마주치면 서로 찡끗, 하고는 또다시 각자의 일에 몰두해요.


날씨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바다빛깔


그러다 보니 벌써 6시 20분이에요. 남편 전화가 안 와서 몰랐는데 벌써 퇴근시간이잖아요. 게다가 불금인데 남편을 다리게 해서 어쩌죠. 부랴부랴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요. 남편도 이제 막 퇴근하는 길이라는데, 제가 아직 카페라니까 남편이 잠시 망설이더니 혹시 배가 고프냐고 묻네요. 단 것을 먹었더니 그리 고프지는 않아요. 남편은 옳타쿠나, 하고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럼, 혹시 팀원들 식사하고 간다는데 나도 다녀와도 될까?'하고 묻네요. 그러면서 많이 늦지는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여요. 불금이니 동료들끼리 얼마나 오래 있어요. 식사만 하면 8시 전후면 오겠죠. 오케이를 해요.


옆에서 여자 동료의 웃음소리가 설핏 들려요. 그 웃음소리를 저는 두 가지로 해석했어요. 하나는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어 팀의 비공식 식사에 못 가겠다던 남편이 이때가 기회다 싶어 아내의 허락을 구하는 동료의 모습이 웃겼을 거고요, 다른 하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는 동료가 설득에 성공한 것을 보고 함께 기뻤을 거예요.  


슬슬 해가 지네요. 옥상에서 바다를 내다보는 것을 끝으로 카페 놀이를 정리해요. 또다시 20분을 달려 집에 도착해요. 그리고 저녁을 먹이고 아이를 씻겨요. 거실에서 장난도 치고, 책도 읽어줘요. 8시가 되었으니 남편이 곧 오겠죠?


"불금인데, 아빠 왜 아직 안 올까?"

"불금? 불금이 뭐예요?"

"응, 불타는 금요일이라고, 다음 날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되는 어른들이 불이 나도록 신이 나게 즐기는 날이라는 뜻이야."


아이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요. 맞아요. 오늘은 불금이잖아요. 그것도 제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 불금. 오늘에 의미를 부여하니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해요. 마지막 불금에 일찍 온다던 남편은 연락도 없고 말이죠. 시계만 봐요. 울그락 불그락.


"아빠한테 전화해 볼까?"

"네! 아빠 밉다고 말할래요."

"불금에 왜 아직도 안 오냐고 그래."


철없는 엄마는 아이를 대동해 아빠를 타박할 대사를 일러줍니다. 어지간해서는 재촉 전화가 없는데 남편은 당황한 모양이에요. 그럴 때일수록 아무 일도 없는 듯 당당하게 말하거든요. 그 반응이 얄미워서 이번에는 제가 한마디 거들어요.


"제주 떠나기 전 마지막 불금인데 뭐야, 도대체. 일찍 온다는 말이라도 안 했으면 아예 회식이라고 생각하고 기대도 안 하잖아."


부러 목소리에 짜증 섞었어요.


"아! 그런가? 이제 곧 끝날 거. 금방 갈게."


미안하다는 사과는 빼먹네요. 곁에 동료가 있는 상태 전화를 받아서 그래요. 알면서도 더 얄미워져요.


10시가 다 되어 남편이 왔어요. 퉁명스럽게 말해야 제가 화난 걸 알겠죠? 동료가 본사로 가게 될 거 같아서 친한 사람 몇몇이 닭발을 먹으러 갔대요. 그렇다면 송별회를 겸한 식사인데 처자식 때문에 거절을 했던 거니 그걸로 이해를 해주자,  싶으면서도 왜 부아가 가라앉지 않는 걸까요. 저는 옹졸한 사람인 게 분명해요.


점심에 피자가 너무 맛있어서 세 조각을 먹었더니 소화가 안 되어서 저녁을 굶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약을 먹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에 밥을 먹어요. 남편이 왜 아직까지 식사를 안했냐고 묻는데, 화가 나서 그랬다고 대답을 해요. 좀 너무한가요? 저도 그런 듯싶어, 낮에 피자가 꽤 괜찮았다고 말을 돌려요. 남편도 닭발을 먹어 배는 안 다며 한 조각 데워 먹겠대요.


"우와, 내 입에는 꽤 괜찮은데? 이 집 피자."


자연치즈가 두툼하니 맛있을 수밖에요. 한 조각 더 먹어야겠대요. 저도 늦게 식사를 했지만 10시가 넘어서 피자 두 조각이라니 좀 거하지 않나요? 다시 또 미워져요. 이런 마음은 도대체 뭐죠. 괜찮았다 미웠다, 를 반복하는 제 마음을 저도 알 길이 없네요.


아이가 아빠한테 레슬링을 하재요. 잠깐 놀아주더니 픽 쓰러져서는 핸드폰만 봐요. 진짜 꼴 보기 싫잖아요. 처음 제주에 왔을 때는 귀한 손님 두 명이 행차하신 것에 대해 매우 고마워했더랬죠. 혼자 지내는 외로운 유부남의 집에 무려 아들과 아내가 방문했으니까요. 일주일에 한 번 본가에 와서 아이를 만날 때처럼 최선을 다해 놀아줬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성이 줄어들어요. 아빠와의 목욕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요. 잠들 때까지 밉게 구네요.


양치를 시키고 먼저 침실로 들어가요. 눈치를 보는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남편은 그대로 거실 매트리스에 누워있고요. 잠이나 잘래요.


자다 더워서 깨어났는데 여전히 남편이 없네요. 선풍기를 가지러 거실로 나와요. 묻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곧 들어갈게'라고 하네요. 대답하지 않아요. 저는 기분이 별로니까요.



기분이 별로여서 였을까요? 몸의 이곳저곳이 아파요. 잠시나마 운동을 한 등도 뻐근하고요, 옆으로 누워 자다 보니 어깨도 아파요. 자세를 고쳐 누워도 금세 불편하고 에어컨을 틀어도 끈적이는 것 같아요. 결국 잠을 설쳤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편이 곁에 누워있요. 그래도 잠이 들기는 했었나 봐요. 남편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아이가 먼저 일어나서 저를 깨워요. 제 아빠가 대답도 못하니까요. 이것도 그래요. 일주일에 한 번 만날 때는 아무리 일찍 아이가 깨워도 조금이라도 더 놀아주기 위해 벌떡 일어났는데, 마음가짐부터 해이해졌잖아요.


아이와 함께 거실로 나와요. 책을 읽어주다 보니 배가 고프대요. 아빠를 깨우니 그제서야 거실로 나와요. 배탈이 나서 밤새 화장실에 들락거렸대요. 매운 닭발에 기름진 피자를 두 조각이나 먹고 잤으니 그럴 만도 하죠. 설사약을 챙겨줬어요. 아프다는데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까요. 는 기분이 별로인데, 남편은 컨디션이 별로인 듯해요.


주말 부부가 좋은 것은 평소와는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는 이에요. 


평소와 다르게 아이와 질적으로 깊이 있게 놀아주고, 평소와 다르게 게으르지 않고요. 저 역시 가끔 보는 남편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게 굴어도 참는 편이고요.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평소와 같아서 보통의 부부, 보통의 아빠로 되돌아와요. 주말부부 생활을 할 때는 함께 사는 것이 그리웠는데, 함께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니 차라리 가끔 보는 게 나을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가족 간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가 봐요. 늘 함께 지낼 땐 모르던 '소중함을 되새길 시간적 거리'요. 적당히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더 잘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 오늘은 본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슬며시 드네요. 이제 떨어져 지낼 시간이 왔나 봐요.


우리의 감정에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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