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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Aug 19. 2019

애증의 소고기뭇국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19



안녕히 주무셨나요? 저는 별로예요.


제가 눈을 뜬 건 새벽 5시 반 무렵이었어요. 무언가에 얼굴을 강타당했고 번쩍 눈이 뜨였죠. 다름 아닌 제 아들의 뒤꿈치였어요. 360도 돌며 잠을 자는 아이이어서 가끔 아이의 다리에 맞는 일은 있었지만, 뒤꿈치에 정통으로 맞아보기는 처음이네요.


다행히 어제 너무 피곤했던 탓에 다시 잠이 들 수는 있었, 던 게 아니고 이제야 온몸이 쑤시단 걸 알게 되었네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엉밑살 부분이 아프더라고요. 어제 스테퍼를 15분 했더니 대단한 통증이네요. 아마 남성분들은 소싯적 엉덩이 빠따(?)를 맞아보셨을 텐데요, 그 비슷한 통증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뿐만 아니라 그제 했던 상체 운동으로 팔도 뻐근해요. 스쿼트로 허벅지 아픈 건 이젠 익숙해요.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가 봐요. 강도를 높인다는 PT강사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당시에는 첫날의 운동에 비해 힘든지 몰랐거든요. 물론 저녁에 유산소 운동까지 했으니 더하겠지만요.


아무튼 아파서 잠이 안 들어요. 그런데 눈은 또 안 떠져요. 그런 느낌 혹시 아시나요? 잠은 안 드는데 잠이 오는. 출근을 안 하기에 망정이지 출근까지 해야 하는데 이런 상태라면 정말 돌아버릴지도 몰라요. 그때라도 벌떡 일어나야 하는데 몸은 천근만근이라 어떻게든 편한 자세를 찾아 잠들어 보려고 기를 썼더니 밤을 새운 것보다 더 피곤한 걸요.


남편이 출근을 하고 PT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내요.

 

-어제 인사를 못 드리고 와서 죄송해요. 오늘은 온몸이 쑤셔서 PT는 힘들 것 같고요, 컨디션 봐서 유산소만 하러 가겠습니다.

-네!! 너무 무리해서 하진 마시고 적당한 속도로 걷기 운동해주세요ㅎㅎ 몸 많이 아프시면 오늘 쉬시고 내일 운동해주시고요!


문자를 괜히 보낸 것 같아요. '오늘 쉬시고'란 부분이 볼드체로 보여요. 오예! 선생님께 허락도 받았겠다, 저는 충분히 쉴 사유가 생겨버린 거예요. 사실 첫날에 비해 앉았다 일어났다 하기 더 쉽거든요. 기분 탓이에요. 어제 2번 했다는. 오늘치도 모두 했다는. 저란 인간이 그렇거든요. 자기 합리화가 끝내줘요.


그럼 오늘은 우선 쉬어볼까요. 마음이 바뀌면 남편 퇴근 후에  가도 되니까요.

 


며칠 전부터 아이가 소고기뭇국 노래를 부르기에 어제 재료를 사 왔어요. 아침에 끓여줄까 물어봤더니 아빠 오면 같이 먹자고 하네요. 그리고 간단하게 어제 사온 무지개떡을 먹자고 해요. 저야 완전 땡큐죠. 우유만 데워주면 되니까요. 이런 효자 아들이 또 있을까요. 기분도 째지는데 유튜브도 틀어줘요. 저는 곁에서 졸고요.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점심이라니 믿기지가 않아요. 만둣국을 끓여요. 이것도 엄청 간단한 게 어제 맛선생을 사 왔거든요. 마법의 가루잖아요. 본래는 멸치와 다시마, 말린 표고로 육수를 내는데 저는 지금 무척 피곤하니까요. 냉동식품 잔뜩 사는 남편이 못마땅했는데 지금은 감사하네요.


금세 한 그릇 뚝딱하고 아이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아요. 아이 눈 밑에 까만 다크써클이 어려있네요.


"졸리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여요. 보통은 부정하는데 말이죠. 뒤꿈치 가격에 대한 미안함이 있는 걸지도 몰라요.


"그럼... 우리 잘까?"


아이가 승낙을 해요. 이렇게 기쁠 때가 있나요. 얼른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해봅니다. 밥 먹고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어요. 그래도 저는 잘 수 있어요. 어제 운동을 두 차례나 했잖아요.


뒤척임 없이 잠이 들어요. 선풍기 바람도 솔솔. 이렇게 좋을 수가 없네요. 잠시 깨어났더니 아이도 잠들어 있네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일어나서 글을 써볼까 해요. 그런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요. 다시 자야 하나 봐요. 그렇게 자고 깨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4시 반이 되었어요.


살짝 한심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거실에 잠시 있으니 아이도 금세 일어나 따라 나와요. 엄마가 없는 걸 귀신같이 알아요. 남편에게 자랑 문자를 보내요.


-나, 겸이랑 3시간 잤다!


남편은 배가 고프대요. 집에 오래 늘어져 있었으니 식구들 밥이라도 제대로 먹여볼까 해요.



남편이랑 연어덮밥을 먹기로 해서 아이 몫의 소고기뭇국만 요리하면 돼요. 우선 밥을 안치고, 양파를 썰어 물에 담가요. 여기까지 해놓으면 연어덮밥이 훨씬 빨리 될 거예요.


참고로 소고기뭇국은 처음 끓여봐요. 저는 한식을 잘 못해요. 제가 끓일 수 있는 국이나 찌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 감잣국, 계란국 이렇게 4종류예요. 감자국과 계란국은 맛이 똑같아요. 미역국도 끓일 줄 알지만 맛이 밍밍해요. 그런 제가 소고기뭇국을 도전하는 이유는 단 하나! 레시피가 엄청 쉽더라고요.


소고기 핏물 빼기, 무 자르기, 소고기 양념해서 볶기, 무 넣기,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하기, 파 넣기. 끝. 외울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지요? 우선 소고기 핏물을 빼기 위해 물에 몇 번 담가놓은 뒤 키친타월에 올려놓고요. 무를 썰어요. 그런데 무가 엄청 굵어서 한 번에 자르기가 어려워요. 이렇게 힘든 걸 우리 엄마는 쓱쓱 해내셨던 걸까요. 팔꿈치 통증도 있으신 분이. 아마 참고 하셨던 거겠죠. 무를 자르다 불효자가 된 것 같은 기분 느껴본 적 있으가요.

 

"겸아, 엄만 왜 무 하나도 제대로 못 자를까?"


엄마 힘내라, 엄마 힘내라! 아이가 갑자기 엄마 응원을 시작합니다. 자르는 일이 별일도 아닌데 저한테는 참으로 별일이네요. 참고로 제주에는 남편이 혼자 사는 집이라 부엌살림이 다 갖춰지지 않았어요. 채칼이 있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 왜 미련을 떠냐고 하실까 봐 알려드려요. 무를 잘랐으니 양파도 슬라이스 해요. 좀 굵은 듯 하지만 최선을 다했어요.


소고기를 그냥 볶는다는 레시피가 일반적이지만, 양념을 해서 볶으면 더 맛있다고 하기에 조금 더 애를 써보려고요. 참기름, 까나리액젓, 마늘, 맛술. 그런데 참기름이 바닥을 보이네요. 들기름을 넣어요. 까나리액젓이 없네요. 멸치액젓을 넣어요. 대충 비슷한 것들이니까요.


자, 이제 볶을 차례예요.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를 볶으라는데 아까 참기름병을 거꾸로 세워놨더니 바닥에 참기름 홍수가 났어요.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를 볶다가 색이 변하면 무를 넣으래요. 무가 투명해지면 육수를 넣으면 된대요. 오늘을 위해 육수는 어제 미리 내놓은 게 있어요. 대단한 정성이지요? 흰 대파를 넣으라는데 분리해놓은 것은 없고 섞어 얼려놓은 것만 있어요. 한 줌 넣어봐요.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하고요. 그런데 국물이 뿌연 하네요. 제가 알고 있는 소고기뭇국은 맑은 국물인데요. 맛을 볼까요?


읎! 이게 무슨 맛이죠? 간장의 쩐내일까요, 아니면 액젓의 비린내일까요. 깔끔하고 시원한 맛을 기대했는데, 텁텁하고 큼큼한 냄새마저 나는 것 같아요. 망했어요. 저의 첫 도전이요.




남편이 왔어요.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킁킁거리네요. 밥은 맛있게 되었으니, 덮밥 소스만 만들면 돼요. 이건 남편 몫이에요. 남편에게 소고기뭇국의 맛을 보여요. 어지간해서는 맛있다고 하는 남편이 반응을 망설여요. 이럴 때는 재빨리 선수 치는 게 나아요.


"좀 텁텁하지?"


남편도 고개를 끄덕여요. 그래도 양파 매운 기를 빼놓았다고, 덮밥의 절반은 해놓았다며 칭찬을 해줍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얇게 썰었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최선을 다한 거라고 하니 웃어버려요. 슬라이서를 사야겠어요. 체면이 말이 아니에요.


남편이 만든 연어덮밥과 제가 만든 소고기뭇국으로 저녁을 시작해요. 입맛이 기가 막히게 정직한 아이가 맛이 좀 그렇대요. 알고 있던 맛이 아니라면서요. 먹을수록 제사상에 올리는 탕국 맛이에요.


"탕국이랑 소고기뭇국이랑 뭐가 다른 거지? 어차피 메인 재료는 똑같은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저는 두 가지 국을 모두 좋아하는데 끓일 줄은 몰라요. 한숨이 나옵니다.


"괜찮아. 레시피가 이상하네. 다른 레시피하고 너무 달라. 괜찮아. 괜찮아. 도대체 소고기를 왜 양념하라는 거야."


남편이 위로를 합니다. 음식을 하고 위로를 건네받기는 처음이네요.


"근데, 참기름이 없어서 들기름을 넣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

"아.... 그... 그랬어?"

"그리고, 까나리액젓을 넣으랬는데 없어서 멸치액젓을 넣었어."

"아......"

"흰 대파를 넣어야 시원한 맛이 난댔는데, 어차피 마지막에 파란 파도 넣길래 그냥 같이 넣었어. 그게 문젠가?"


남편이 허허 웃네요. 레시피의 문제일까요, 저의 문제일까요? 우여곡절 많은 저녁이 끝납니다. 아이는 배가 부르다고 몇 숟갈 안 먹고 밥상을 물리더니 무지개떡을 먹고 있네요. 우리 집 착한 남자들은 늘 이런 식이예요.


<좌> 망한 소고기뭇국, <우> 남편의 연어덮밥. 그 아래 굵은 양파 슬라이스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자 낮에 보았던 광고를 하나 같이 봐요. 아이랑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너무 웃기더라고요. 남편도 껄껄거리며 보네요. 이런 걸 병맛이라고 한다며 너무 좋아해요. 이쯤이면 됐어요. 기분이 괜찮아진 것 같아요. 이제 그만 정리하자고 말하고 우선 정리를 시작해요.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계속 그런 류의 광고를 찾아서 봐요. 정도가 있어야죠. 끝내는 신경질이 나요.


"이제 그만 보고, 같이 치우자니까!"


남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봐요. 한 사람이 정리를 시작했으면 눈치껏 따라 치워야 하는 것 아닌까요? 남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딴짓을 해요. 항변을 하기에는 뭣하고 사과하기에는 납득이 부족했던 모양이에요. 다 치우고 나니 자연스레 남편이 설거지를 시작해요.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이것저것 끼적거려요. 설거지를 마친 남편은 아이와 레슬링을 시작했고요. 아이의 피부가 땀으로 젖어 스티커 같아요. 그 몸으로 자꾸 저를 안으려고 하네요.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끔찍해요. 목욕을 하라고 욕조에 물을 받아요. 아빠와 목욕놀이를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남편이 들은 척도 안 해요. 오늘 왜 이렇게 저를 신경질 나게 하는 걸까요. 결국 제가 아이를 씻겨요.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조금 뒤에 아이가 따라 들어와요. 뒤이어 남편도요. 잠시 쉴 틈을 안주네요.

 

"엄마, 아까 그 소고기뭇국..."


소고기뭇국 이야기를 들으니 또다시 저녁의 악몽이 떠오릅니다. 첫 도전작이자 실패작인 애증의 소고기뭇국.


"하아... 소고기뭇국 이야기하니까 엄마 다시 스트레스 쌓이는 거 같아."


그제서야 남편이 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어쩐지. 왜 그런가 했어. 소고기뭇국 때문이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갔는데. 원래 그런 걸로 짜증 내는 엄마가 아닌데. 왜 그런가 했는데, 바로 소고기뭇국 때문이었어."


어이가 없는데 웃음이 납니다.


"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한 사람이 치우면 눈치껏 거들어야지! 치우자고 몇 번을 이야기했어!"


"아니야. 이 모든 건 소고기뭇국 때문이야. 겸아, 그렇지?"


남편은 '맞을' 소리만 골라해요.


"곤란할 땐 잘래!"


아들까지 빠져버리네요. 늘 내편이던 녀석이었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정말 소고기뭇국 때문에 내 기분이 이렇게 엉망이 된 건가요? 그렇다면 애증의 소고기뭇국이 맞잖아요.


당분간은 새로운 국에는 도전을 안 할랍니다. 저는 실패를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거든요. 다시 도전을 안 해서 발전이 없지만요.


여러분은 음식으로 인한 좌절이 없으신가요?


문 밖 한걸음도 나가지 않은 게으른 하루를 이렇게 마감하려고 해요.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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