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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Aug 17. 2019

제주의 밤이 빛나는 곳에서 키스를.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17



저는 긴장도가 참 높은 사람이에요.


특히 시험 치를 때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고요. 종료 시간이 임박해지면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요. 다한증이 아닌데도 그 상황이 되면 손에 땀이 차서 몇 번씩 옷에 문질러가며 시험에 임해야 해요. 조급함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서만 아니에요. 옛날 노래방이 유행이던 시절. 제공 시간이 끝나가도 안절부절 못했어요. '어떡하지, 내가 노래를 부르다 시간이 끝나버리면 미안한데'하는 생각으로 노래에 집중을 못하거나 중간에 끊은 적도 많았어요.


그 뿐 아니에요. 운전을 할 때도 네비가 10km 뒤에 우회전이라고 알려주면 7km부터 긴장을 하고요, 5km남았을 때 미리 우회전 할 수 있는 차선에 들어가 있야 마음이 놓요.


저의 이 조급함이 싫어서 아이에게 가급적 채근을 하지 않는데, 그랬더니 유치원에서 제일 서두르지 않는 아이로 정평이 났지 뭐예요. 뭐든 (中道)를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석가모니도 깨달음은 '치우치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저는 성인이 되었겠죠. 또 어려서부터 제 조급증도 진작 고쳐졌을 거고요.


요즘 저의 조급증은요. 제주를 떠나는 것에 맞춰져 있어요. 동시에 방학이 끝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보니 마음은 조급하고 무기력하기도 해요. 처음에 제주에 올 때만 해도 25일을 머물 생각에 든든했었는데 벌써  3분의 2가 지났다는 걸 떠올려 버렸거든요.


남은 기간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 보내는 게 알찬건지 모호해요. 푹 쉬어야 잘 보낸건지, 제주니까 여기저기 다니며 보아야 잘 지낸건지 확신이 안서요. 직장인들에겐 배부른 고민으로 들리실지도 모르지만요.


출근할 때를 떠올려요. 점심시간마다 '여기가 제주라면 바다가 보일텐데, 건물 뿐이네'라고 생각하며 산책을 했던 기억이 나요. 아무래도 푹 쉬기만 해서는 안될 것 같아요. PT도 받으러가고 미뤘던 병원검진도 가요.



그리고 저녁시간도 버리지 않기 위해 남편 퇴근 후에 불빛축제를 보러가기로 해. 집에 와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출발을 해요. 8시 정도에 출발하면 도착할 즈음 어둠이 내려앉아 있을 거거든요.


어둠 속을 달려요. 정말 칠흑같이 어둡고 따라오는 차들도 없어요. 네비가 안내해주는대로 따라 가지만 정말 이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적이 없는 곳이에요. 드문드문 인가가 나타나면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 구나, 안심이 될 정도요. 슬쩍 무서운 생각이 들 즈음 도착했어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네요. 진즉에 와볼 걸 그랬어요.


소셜에서 입장권을 사서 갔는데 3천원을 추가하면 족욕을 할 수 있대요. 남편이 솔깃해해요. 허브차도 준다니 그렇게 할까봐요.



차로 꽤 깊은 산 속을 달려왔다고 했잖아요. 그런 이유가 있었네요. 암흑천지에 불빛이 금은보화처럼 빛나요. 산이라 덥지도 않고요. 제주 밤이 심심하다는 분들 여기 와보시면 좋으실 듯 해요. 도둑 키스하기 정말 좋아요. 곳곳에 으슥한 스팟이 있거든요. 냐하~!^^


"데이트 하기 진짜 좋겠다"는 말을 연발하는 남편이 슬쩍 제 손을 잡아요. 아이가 되게 싫어하는 행동이거든요. 몰래 잡는 손이 스릴있고 좋네요.


숲길에 근사한 유리병 전구가 놓여 길을 안내해주고 어요. 유리병 안에 꼬마전구를 넣어주는 것으로도 이렇게 근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니 마치 이 숲길 전체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듯 해요. 유리병은 트리를 밝히는 오너먼트 전구가 되고요. 사그락 사그락 마른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길을 달려온 긴장을 풀어줍니다.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 나뭇잎 밟는 소리말고도 귀뚜라미 소리가 그곳을 가득 메워요.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으니 다른 팀과 조금만 거리를 두고 걸어도 잘 들릴거에요.


요즘 귀뚜라미 소리 듣기 쉽지 않잖아요. 어린 날 할머니댁 근처 길을 걸으면 이런 소리가 났어요. 찌르르찌르르. 어둠이 무섭기는 해도 이 소리가 무척 정겹고 좋았어요. 고개를 들면 달빛이 빛나고 별이 하늘을 수놓은 그 밤 말이에요.



할머니집 뒷동산에는 묘지가 하나 있었어요. 그 곁에 소나무 한그루가 웅장하게 서 있었는데 밤만 되면 달빛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는 거예요. 당시 '전설의 고향'이라는TV 프로그램에서 "내 다리 내놔!" 귀신이 그런 풍경에서 나타났거든요. 그 곁을 지날 때면 숨을 꼭 참고 꼿꼿하게 걸었어요. 뛰지도 못했죠. 뛰어 달아나다 다리라도 훅! 잡히면 더 무섭잖아요. 그래서 더 타박타박 걸었더랬죠. 그 공포 가운데에도 듣기 좋았던 것이 이 귀뚜라미 소리였어요. 잠시 눈을 감고 할머니집 앞에 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또 몇 걸음 걸으니 보석처럼 빛나는 기둥이 있어요. 반지 위 네모진 보석 같기도 하고, 팔찌의 참(charm) 같기도해요. 이 아름다운 정경을 보고 묘사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보석이라니 저도 참 속물이네요. 가까이 다가가보니 페트병으로 만든 전구 기둥이었어요.



조금 더 걸으니 꽤 넓은 대지에 용암이 분출하는 듯한 곳이 나타나요. 전망대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땅거미 가운데 불꽃이 터진 것 같기도 해요. 하늘의 불꽃축제가 아니라 땅 위에 불꽃이 피었네요.



채 돌지 못했는데 족욕예약 시간이 되었어요. 강사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들으며 따라해봐요. 의외로 아이가 매우 흥미로워하네요.


우선 수조에 따뜻한 물을 조금 받아서 두 발을 담가요. 발이 조금 따뜻해지면, 한 쪽 발을 꺼내 수건위에 놓고 녹차소금을 덜어 물에 녹인 후 마사지를 해줘요. 까슬까슬한 촉감에 아이가 간지럽다고 까르르 웃네요. 물 씻어내니 오일을 바른듯 다리와 발이 보드라워졌어요. 반대쪽 발도 똑같이 해주고요. 마지막으로 물기를 제거한 후 카테킨 오일을 발라줘요.


그러는 사이, 강사 선생님은 우리의 목 뒤에 허브 오일을 발라주시요. 상쾌한 향과 함께 시원함이 전해져 옵니다. 오늘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에요. 우리 가족의 발을 보시고는 "누가 봐도 한가족이네요"라고 하세요. 남편이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습니다.



보들보들 따뜻해진 발을 모아 인증샷도 찍어봐요. 개념 가족사 완성요.



발도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구경을 떠나볼까요?


동굴 안을 몽환적인 카페로 꾸며 놓았네요. 낮에 가도 시원할 것 같은 동굴이에요. 천정에 거대한 조형물이 기괴하게 움직여요. 선에 바람을 넣었던 뺐다 하는 것처럼 꽃이 피어났다 오그라들기를 반복해요.



잔디 위에는 밟으면 색이 변하는 조형물도 있어요. 눌리면 조명이 켜지는 피아노 건반과 비슷한 건데 어둠 속에서 빛이 나니 훨씬 예뻐요. 이가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요. 엄마 아빠보다 앞서 뛰어가서 신나게 달려요. 남편도 덩달아 신나게 뛰어보고요. 오늘따라 두 사람의 케미가 폭발하네요.



그 뒤로 이 축제의 상징 '오두막'이라는 물위 집도 있어요. 듣자하니 함소원이 프로포즈를 받았던 곳이라네요. 물 위에 떠 있는 집의 그림자 수면 위에 아롱아롱 비쳐요. 마치 성당 안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들어오는 햇빛같아요.어쩐지 경건해지는 느낌이네요.



아직 더 돌아볼 곳이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발이 아프대요.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이제 가야하나봐요. 벌써 11시 반이에요.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몰랐네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는 잠이 들었고요. 다행히 집에서 밥을 먹고 출발한터라 아이는 양치를 하고 왔어요. 몸이 끈적이니 집에 도착해서 물수건으로 닦아줘야겠어요. 옛날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 처럼요. 피곤해서 그냥 잔다고 하면 더운 물에 수건을 적셔서 온몸을 닦아주시곤 했죠. 엄마의 사랑은 대를 이어 갑니다.  


어둔 밤길. 차안에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어요.


혹시 제 목소리도 그런가요? 후후.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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