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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금능 예찬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16

by teaterrace



아침 햇살이 참 좋습니다. 내 잠을 깨울 때만 빼고요. 출근해야 할 때도 빼고요. 어제는 흐리더니 오늘은 반짝거려요. 하늘도 바다도 짙푸릅니다.


저는 바닥에서 자느라 깊은 잠을 못 이뤘어요. 요가 너무 얇아서 어깨도 결려요. 그래도 여행을 왔으니 움직여야죠. 끙차.


위층 침대에서 편히 잤을 아빠를 깨우러 올라가요. 침대가 좋긴 한데 아이가 떨어질까 봐 남편 혼자 독차지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빠가 없대요. 어라? 우리가 잠둔 사이 산책을 나간 걸까요? 신발은 그대로인데요. 아이가 다시 올라가요. 깔깔 소리가 들려오는데요. 숨바꼭질하다 들켰나 봐요.


커튼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봅니다. 어제 챙겨 왔던 소라껍데기와 물감을 꺼내 칠을 시작해요. 남편도 사뭇 진지해요. 저는 무지개색으로 층층 칠하고요. 남편은 그리스를 떠올리며 칠한대요. 아이는 이색 저색 알록달록 섞어 바르네요. 볕이 좋아서 아침을 먹는 동안 말리면 되거든요. 아침은 간단히 먹으려고 주먹밥과 미역국 라면을 사 왔어요.


우리가족 소라색칠. 레터링도 그려넣었다.

오늘은 금능으로 가보기로 해요.


금능 바다는 제가 개인적으로 아이와 놀기 좋은 으뜸의 바다로 꼽는 곳이랍니다. 협재해수욕장 바로 옆에 있는데, 관광객은 주로 협재로 금능은 주로 도민들이 찾아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이제는 관광객들도 많이 오는 것 같아요. 제일 좋을 때는 물 빠지는 시간과 저녁노을이 지는 시간이 맞물릴 때에요. 제가 예전에 '내 생애 최고의 낙조를 보았다'라는 글에서 금능 예찬을 한 적이 있어요. 사막의 연흔을 떠올리게 하는 모래 물결과 금빛 석양이 기가 막히거든요.


내 생애 최고의 낙조를 선사한 금능


오늘은 낙조는 아니지만 날씨가 좋아서 또 기대가 되는걸요. 건너편 비양도와 어우러져 한 편의 그림 같은 바다예요. 어제부터 커피 갈증이 몰려오니 우선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에 가기로 해요.


물빛이 예술이네요. 기가 막혀요. 늘엔 누가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놨나요.



홀린 듯 사진을 찍어요. 이 풍경을 실제로 보신다면 아마 여러분도 그러실걸요. 어제부터 그리던 커피의 맛도 깜빡할 정도로요.



실컷 쉬었으니 점심을 먹어볼까 해요. 원래 여행 오면 먹고 쉬고, 쉬다 먹는 거잖아요. 처에 튀김과 파스타가 맛있는 곳이 있대요. 찾아가는 길 돌담에 유화물감으로 그리고 쓴 시화가 걸려 심심한 돌담에 재미를 더해 주었요.


골목길에 자리한 작은 식당이요. 양에 비하면 조금 비싼 듯 하지만 해산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튀김옷도 바삭거려요. 파스타 소스는 첫술엔 밍밍한 듯한데 먹을수록 감칠맛이 감돌요.




먹고 나온 아이가 졸려합니다. 두 손으로 눈꺼풀을 지긋이 덮어주니 금방 잠이 들었어요. 아이가 잠든 사이를 빌어 어디에 갈까 고민을 해요. 날이 덥긴 한데 곶자왈 코스로 들어가면 숲이라 괜찮지 않을까 해서 유리의 성으로 갑니다.


그런데. 힝. 더워요. 바람이 안 불어서요. 바람길을 따라 유리 풍경 소리가 꽤 근사거든요. 바람이 안 부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없으니 한적하네요. 흙길을 타박타박 걷는 기분도 꽤 괜찮고요. 아이가 어릴 때 유모차를 끌고 왔던 곳인데 이제 엄마 아빠보다 앞서 달려갑니다. 간은 지금 불지 않는 바람만큼이나 소리 없이 사라지네요. 재잘거릴 때, 곁에 있어줄 때 더 눈여겨서 보고 귀 기울여 들어줘야겠어요.




조금 서둘러 집에 돌아왔어요. 숨만 돌리고 남편은 장례식장에 갑니다.


실은 오늘 아침에 남편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어제 같은 부서 직원의 아버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제주는 장례식에 갈 때 부서별로 모여서 이동을 하고 같은 부서의 애사에는 직원들이 직접 나서서 돕더라고요. 육지 사업소에서는 없었던 장례문화에 남편도 처음엔 꽤 낯설어했어요.


여러분. 혹시 '일포(日哺)'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부고 메시지에 일포 날짜와 발인 날짜라는 게 쓰여 있어요. 남편이 어리둥절하며 제주 토박이 동료에게 전화로 물어본 결과 첫날은 가족들 위주로 지내고 이튿날부터 손님들을 맞이 하는 제주의 장례문화래요. 육지에서야 시간이 되면 고인의 사망 당일에도 가지만, 제주도에선 일반 조문객은 이틀째에 방문을 한다네요. 이런 것을 모르고 당장 달려간다면 그것도 실례가 될 거예요. 이렇게 하나하나 배워가는 제주 문화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은 부서원들끼리 시간을 나누어서 돕기로 했대요. 남편도 휴가이지만 그래도 알리기는 해야 할 듯하다며 연락이 온 모양이에요. 이에 남편은 저녁에 들르겠다고 했는데 커뮤니케이션에 오해가 생겼는지 부서장으로부터 '그럼 저녁때 부탁해요. 고마워요.'라는 회신이 온 거 있죠.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이상 가서 돕기로 한 거예요.


출발을 하는데 남편이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가네요. 정작 자기가 더 힘들 것 같은데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는데. 늦을 거니 기다리지 말래요. 안쓰러운 뒤통수를 바라봅니다.


이후 돌아온 남편 제 손에 상품권을 쥐어줘요. 이건 또 뭘까요. 고생했다는 포상인가요? 의아해하는 제게 남편이 설명을 해줍니다. 제주살이 선배라고 제 앞에서 제주 사람 흉내를 내네요.


제주사람들은 장례식에 온 손님들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상품권을 준대요. 그리고 회사에 복귀해서는 또다시 떡과 과일 등으로 답례를 하고요. 조의금을 준 사람들에게 또 상품권으로 감사 표시를 한다네요. 상품권을 주는 문화도 이색적이지만 도대체 몇 차례나 답례를 하는지 그러다 기둥뿌리 뽑히겠어요.


장례문화는 지역마다 가정마다 다르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하지만 제주는 유독 다르게 느껴져요. 물론 남편회사만의 사내 문화일 수도 있지만요. 분명한 것은 제주가 상부상조의 개념이 어느 지역보다 강한 곳이라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우리도 익숙해져야지요. 나눔은 결국 돌고 도니까요.


남편도 피곤했지만 다녀오니 마음은 더 편안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오 하루 더' 제주 사람이 되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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