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쉬는 날 아침. 내일 하루 더 쉴 수 있는 아침. 시간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이에요.
제주도민들도 맑은 날이 이토록 오래기는 드물다고 하는데 주말이 되니 어쩜 이렇게 흐리죠? 남편은 참 날씨 복도 없네요. 높은 하늘만 보아도 쪽빛 바다만 보아도 얼른 나가고 싶은 날씨였는데 말이에요. 퇴근 무렵의 바다 빛깔도 예쁘긴 하지만요, 한창 일할 시간에 진짜 근사해요. 그래서 더욱 남편과 함께 할 주말을 기다렸는데 너무한 거 아닌가요.
어젯밤 괜찮았냐고요? 어제 생애 첫 PT를 받았잖아요. 다리가 뻐근하긴 했지만 피곤해서 그런지 정신없이 잤어요. 생각보다 운동이 잘 맞는가 봐요. 몸을 일으켜야죠. 어? 그런데 제 허벅지가 왜 이러죠. 제 다리가 왜 제 맘대로 안 되는 건가요. 누워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섰다 조금이라도 구부릴라치면 주르륵 주저앉게 돼요. 그럼 그렇죠. 멀쩡할 리가 없죠. 곡소리가 절로 나요.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해요. 얼른운동 다녀오려고요. 어제 죽음의 PT를 받았으니 필 받았을 때 유산소로 이어 가줘야죠. 센터 근처에서 식사를 해요. 이제 운동 가야죠. 그런데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밥 먹고 바로 운동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럼 배도 꺼뜨릴 겸 차라도 마실까 봐요. 버블티를 마시기로 해요. 펄을 추가하면 배가 더 부를 텐데 생략하자니 아쉬워요. 이왕 먹는 거 제대로 먹어볼까요.
잠시 해가 나는 것 같아요. 나가자니 더울 것 같은걸요. 아무래도 낮에 놀고 저녁에 운동하러 오는 게 좋겠어요.
바닷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기로 해요. 화북포구에서 시작해서 닭머르 길까지는 자주 가봤던 곳인데 그 이후에 늘 차를 돌렸어요. 그래서 오늘은 골목골목 누비며 다녀보려고요. 가급적 해안가를 따라서요.
해안도로는 중간중간 끊기는 구간이 있어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돌담이 쌓인 외길. 걷기엔 운치 있지만 운전할 때는 진땀이에요. 둘이 키스라도 하면 차가 깊은 상처를 입거나 돌담이 무너지거나 둘 중 하나. 돌담은 아무나 못 쌓거든요. 전문가의 손을 빌어야 해요. 기본 20만 원부터 시작하는 돌담 수리. 너무 눈물 날 것 같아요. 교행이 안되는데 그렇다고 일방통행도 아니에요. 다른 차를 만나면 이런 길을 후진하게 될 수도 있어요. 짜릿하죠?
커피가 마시고 싶지만 참아봐요. 버블티를 마셨으니까요.
신촌포구쯤 되는 거 같아요. 배가 드나들 법한 다리가 있고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에요. 흐리긴 해도 걸어보고 싶은 동네네요.
마을 어장 같아 보여요. 돌이 있는 어디든 다슬기가 주근깨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어요. 저 너머에는 마을 사람들이 뭔가를 열심히 줍고 있고요. 보말이 아닐까 해요. 궁금증이 많은 우리 가족은 가까이 걸어가 봐요. 한참 동안 물이 빠진 상태인가 봐요. 냄새가 그다지 좋지 않은걸요. 수북하게 쌓인 뿔소라 껍데기도 보이네요.
"겸아, 소라 껍데기 주워다가 예쁘게 칠해볼까?"
아이 입이 함박만 해져요. 아이가 두 돌쯤 둘이서 제주 한달살이를 할 때는 TV가 없이도 많은 것을 하고 놀았는데 지금은 아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많으니 혼자 놀게 둘 때가 많네요.
흐리긴 해도 여전히 습해서 땀이 뻘뻘 나요. 얼른 자동차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무래도 시원한 커피를 마셔야 할 것 같아요. 아이가 놀 만한 학습지도 아까 사왔거든요.
요즘 자꾸 엄마 아빠에게 덧셈 뺄셈 문제를 내라고 해서요. 아이가 욕구가 있을 때 배움의 기회를 주려고 아무것도 시켜보지 않았는데 이제 때가 온 것 같아요. 한글도 숫자도 가르쳐 본 적이 없는데 어린이집에서 한 두자씩 보다가 익혔나 봐요. 셈도 척척 하는 모습이 기특하네요. 그래서 부모들이 자꾸 이것저것 가르치고 싶어 하나 봐요.
커피로 더위도 식히고 졸음도 쫓아냈는데 이번엔 아이가 졸려해요.집 쪽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어김없이 아이는 잠이 들었군요. 배가 고프지만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아쉬워요. 이제 겨우 6시 인걸요. 우리의 주말이 6시에 끝나는 건 정말 아쉽잖아요. 저녁을 먹고 바다를 보기로 해요. 아이가 잠이 들었으니 해안도로에 차를 세워두고요.
남편이 전부터 말했던 동네 백반집이 있어요. 할머니가 운영하시는데 2인분을 주문하면 남자 둘도 남길 정도로 푸짐하다네요. 제가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대요.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 영업을 하시는지 확인을 해요. 영업 요일도 일정치 않고 시간도 일정치 않거든요. 아이를 뉘일 자리가 있기만 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이를 안고 가게에 들어가는데 주인 할머니께서 제주 사투리로 말씀을 하세요. 알아들은 건 '마씸' 한 마디. 어리둥절하고 있으니 약속이 있으셔서 밥만 먹고 가야 한다고 하셔요. 저희 밥만 먹으러 간 거잖아요. 술은 어렵다는 말씀이신 듯한데 약속이 있으시다 하시니 망설여져요.
"약속이 언제세요? 다음에 다시 올까요?"
지금 오기로 했는데 먼저 가라고 하면 된다고, 먹고 가라 하세요. 냉큼 자리를 잡고 앉아요. 밑반찬을 들고 오시는데 허리도 제대로 못 펴시네요. 남편이 얼른 팔을 뻗어 쟁반을 받아요. 이윽고 기다리던 김치찌개가 나와요. 냄새가 기가 막혀요. 찬을 먼저 맛보니 찌개 맛도 기대가 되는 거 있죠? 보통 밑반찬 맛있는 집이 메인 요리도 잘하니까요.
보글보글 찌개 끓은 소리에 침샘이 고여요. 돼지고기가 들어갔는데 잡내가 하나도 없어요. 떠도 떠도 김치와 고기가 남아있네요. 남자 둘이 다 못 먹는다는 말은 과연 정말이었어요. 이게 정말 6천 원짜리 맞나요, 할머니.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두 분이 들어오세요. 해석 불가한 대화를 하시는데 예의 그 할머니들인 듯해요. 6시였네, 6시 반이었네, 언니는 아직 안 오고 있네 등등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하니 말이죠.
절반은 남은 듯한데 너무 맛있어서 남겨두고 가기 아까워요. 냄비라도 가져오고 싶은걸요. 마침 벽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어요. '남은 반찬은 싸가시고 안 드실 반찬은 미리 물려주세요.' 냉큼 차에서 비닐팩을 챙겨 와요. 찌개와 콩조림, 멸치볶음, 어묵볶음 등 맵지 않은 찬들을 담아요. 궁상맞아보일 지 모르지만 할머니와 저희 모두 윈윈일 거잖아요. 담아보니 1인분은 충분히 되겠네요. 다음엔 냄비를 들고 와서 집에서 먹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맛있게 먹고 있는 저를 보더니 남편이 뿌듯한 얼굴로 바라봅니다.
"좋아할 줄 알았어."
귀여운 남편이죠?
둘이 푸짐하게 먹고 싸가기까지 하는데 12,000원이에요. 카드 내밀기가 괜스레 죄송해지는 마음이 들어요. 온 가방을 뒤져보니 천 원짜리 열두 장이 나와요. 다행이에요. 쟁반에 먹었던 그릇들을 다 챙겨요. 할머니께 가져다 드리면서 계산을 해요.
"아이코. 그냥 두셔도 되는데. 무슨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착해. 아이고, 고마워요."
저희 행동이 이렇게까지 칭찬받을 만한 일인 줄 몰랐어요. 할머니가 진심으로 고마워하셔서 저희도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저희 때문에 모두 기다리셨는데 저희가 죄송하죠."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드시며 한사코 아니라고 하셔요. 맛있고 기분 좋은 식사가 끝나고 아이를 안고 나왔어요. 여전히 곤히 자요.
삼양 바다는 검은 모래로 되어 해변이 엄청 스펙터클하게 예쁘지는 않아요. 그 대신 저녁노을이 기가 막힙니다. 이게 정말 내 눈으로 보고 있는 실제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요. 어두워질수록 붉어지는 하늘빛에 숨이 탁, 막혀와요.
바다 다이빙을 마치고 귀가하는 제주 아이들도 하나둘씩 보이고요. 이 아이들은 이런 정경이 마치 피부처럼, 벽지처럼 익숙하겠죠? 얼마나 부러운지요.
아이는 일어날 기색이 없어요. 이대로 재워야 하려나 봐요. 내일은 애월로 여행 가기로 했어요. 남편 회사에서 숙박권이 나왔거든요. 일찍 출발하려면 일찍 자두는 것도 괜찮죠, 뭘. 저녁을 못 먹인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