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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Aug 21. 2019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21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어렵다고 느끼나요?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고백을 하는 일? 아니면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잘못되었을 때 이를 따지고 드는 일? 아니면 등산?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 일? 사람이 가진 역량이 다르고, 경험의 크기도 다르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일은 모두 다를 것이라고 생각이 돼요.

  

저는 이제부터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해요.


저에 가장 어려운 것은 '용서를 하는 일'이에요. 특히, 명백하게 상대의 잘못이라 여겨졌을 때 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요. 애매한 상황에서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그보다 쉬워요. 나도 '조금은'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는 거니까 배포 있게 '나도 미안해'라고 사과를 건넬 수는 있요. 그때 느껴지는 희열감과 뿌듯함이 나라는 사람을 '꽤 괜찮은 사람인 듯' 착각하게 만들거든요. 상대 승리감마저 든다니까요.


그런데, 용서는 그와는 완전히 맥을 달리해요. 상대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나는 그로 인해 정신적 또는 물리적 피해를 받은 상태에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거든요. 합리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그를 용서해야 할 때 말이에요.



벌써 2년도 더 넘게 지난 일이네요. 그녀를 앞에 앉혀두고 절교를 선언했어요. 배신''에 대한 형벌이었죠. 그녀는 내 앞에서 울었고, 또 한 명의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정신적인 피해를 당했는지' 나는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고 사과를 했지요. 그리고 잘 지내라는 인사를 끝으로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요. 우리는 직장 선후배 사이예요.


그렇게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어요. 가끔씩 그녀가 학교를 찾을 때면 누구보다 어색한 인사를 건네거나 모른 척하기도 했어요. 제 쪽이 선배이니 그녀는 더욱 어려웠겠지요.


그때는 제가 학교에 복직을 하고 그녀 휴직을 하던 시기였어요. 일방적인 절교를 고하고, 더는 사적인 연락이 없었지요. 만약에 시기적으로 둘 모두 재직 중이었다면 조금 더 빠르게 감정의 응어리를 해소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눈 앞에 보이지 않으니 평소에는 특별히 떠올리지 않고 지낼 수 있었.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굳이 떠올리며 부대낄 필요는 없니까요. 그러다 보니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요. 그 사이 그녀는 둘째까지 출산을 했으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거예요.


우리가 가까워진 건 사적인 사유였기에 서로의 아픈 청춘을 보듬으며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어요. 일신상의 비밀까지 털어놓는 그야말로 '절친'이 된 거지요.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터울의 그녀와 나는 가끔씩 함께 잠도 잤어요. 그녀의 부모님은 제 이름만 대도 믿고 외박을 허락하는 그런 사이였지요.  


저에게는 그녀 말고도 2명의 친구가 있어요. 우리 넷은 이른바 비밀을 공유하는 사적인 모임이었어요. 일명 시크릿4, 줄임말로 S4라고 부르며 깔깔거리던 기억이 나네요. 서로가 결혼하기 전에는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사이였어요.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했지요. 저는 자취를 했으니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족보다 더 많았거든요. 정서적 유대감이 두툼한 사이라고 자부했죠. 말하지 않아도 나는 너의 기분을 알 수 있다고 장담하는 그런 사이요. 그중 하나가 그녀였어요. 특히 그녀는 저와 '절친'이었죠. 나머지 둘이 '절친'이었고요. 미묘하게 레벨이 다른 친분도를 가지고 합체를 한 모임이에요. 아주 자연스럽게요.


"그럼 S4는 어떻게 돼요?"

"나 빼고 만나면 돼. 나도 너 없이 만나고."


참 냉정한 말을 쉽게도 퍼부었죠. 자신 때문에 S4가 와해되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 감정까지 돌볼 마음의 여유 대신에 그녀에 대한 배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죠. 사실 본질은 그녀가 아니라 상황을 매도시킨 다른 이들에게 있었지만요. 내가 그녀에게 원한 것은 그게 아닌데 그녀는 잘못된 방식으로 나를 도우려고 했고, 거기서 많은 것이 어긋나 버린 거예요. 그저 내 말을 듣고 위로만 해주었으면 쉽게 끝났을 것을 괜한 말을 전해서 상황을 악화시켰죠.


시간은 우리를 더욱 멀어지게 했어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근 10년인데 2년의 시간은 남보다 더 불편할 만큼의 거리를 만들었네요. 학교에서 자꾸 부딪혔다면 오며 가며 더 빨리 용서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물리적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화해를 돕지 않았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요.

 

그녀는 제 생일이면 누구보다도 정성스러운 선물을 줬어요. 제가 몰랐던 브랜드의 아기자기한 화장품을 선물하기도 했고, 여행을 가면 항상 제 몫의 기념품을 챙겨요. 그녀를 통해서 새로운 액세서리 브랜드도 알게 되고, 양질의 화장품 브랜드도 알게 되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굉장한 인연이냐면요, 그녀의 생일과 제 아이의 생일이 똑같아요. 이거 정말 기가 막힌 인연이죠. 제왕절개가 아닌 자연 분만한 날짜가 말이죠. 알고 보면 그녀는 저와 천생연분이에요.


우리는 흔히 부부의 인연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된다고요. 우리도 그랬어요. 서로에게 남친이 없어도 죽고 못 사는 '님'과 같은 사이었는데 순식간에 '남'이 되었. 그것도 신경 쓰이고 불편한 '남'이요.


가끔씩 S4의 멤버였던 나머지 둘이 그녀를 보러 간다고 할 때괜한 배신감까지 느꼈어요. 내가 그녀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며칠 몇 밤을 눈물로 지새운 줄 알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그들에게 말이죠. 유치하기 짝이 없지요. 제 영혼은 덜 성숙되었나 봐요. 아마 제 학생들이 그랬다고 하면 단박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가르칠 텐데, '내로남불'한 저라니까요. 아무튼 그들이 그녀를 보러 간다며 '혹시 같이 갈래?'라고 조심스레 물을 때, 나 모르게 잡은 약속이 괘씸했고 그래서 더욱 굳은 표정으로 거절을 어요. 그러고는 혹여나 그들이 옹졸하다며 저를 흉볼까 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어쩌면 진짜 내가 옹졸한 걸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내가 옳았노라' 굳게 믿었던 신념을 흔들서이겠죠. 이러니 '남'보다 못한 '과거의 절친'이라고 할 수밖에요.


가끔씩 학교에서 나에게 그녀의 소식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말을 골라야 했어요. 내 앞에서 그녀 이야기를 하는 나머지 두 친구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곤란해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배신감에 그녀와의 절교를 선언했던 제가 오늘 아침에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에요. 용서를 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기도 하죠.



우연히 사과집 작가님의 <절친과 회사 동료 사이>는 글을 읽었어요. 마치 우리 사이와도 같았죠.



-이 글을 읽는데 니 생각이 나서...

-그러게, 읽으니 생각나네요. 우리도 예전에 저렇게 많이 만나고 돌아다녔었는데... 그땐 회사 동료보단 절친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어요. 우린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생각을 한 거지요. 말 줄임표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땐'이라는 단어에서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그녀도 저도 인지하고 있음도 확인을 했죠. 무슨 대답을 보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어요. '언니로서 옹졸하게 굴어서 미안해'라는 말을 하자니 이 모든 잘못이 저로 인한 것이 될까 두려웠고, '그러게 말야'라고 대답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던 거죠.


어떤 특별한 시나리오 없이 충동적으로 보낸 메시지였기에 그녀의 답문에 저는 빨리 대답하지 못했어요. 아마 어떤 계시였을지도 몰라요. 그 글이 하필 제 눈에 띄였던 것도, 그리고 2년이 훌쩍 지난 시간을 뛰어넘을 만큼의 공백이 무색하리만큼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게 된 것도요. 마치 옛사랑과 다시 연락이 닿은 듯, 우리의 메시지는 글자 하나하나에 신중함 담있었어요.

 


남편과 아이와 외출을 해요. 제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 주말이거든요. 아침부터 나가자고 말하면서 아무도 서두르지 않아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넘었어요.


오늘은 세화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바람이 꽤 많이 불고 날도 흐려요. 예쁜 바다를 기대하지 말아야겠어요.


가는 길에 전부터 벼르던 갈치조림 집에 들러요. 제주의 갈치조림은 주로 '대,중,소' 사이즈로 구분해서 판매를 하는데 이곳은 1인분 14,000원이고, 2인 이상 주문 가능하대요. 공깃밥을 추가로 해도 3만 원 안팎이에요. 굉장히 저렴하죠.


"2인분은 딱 2명 먹을 만큼만 나와요."


주인 할머니께서 말씀하세요. 아마 아이와 함께 와서 셋 먹기에는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뜻인 듯해요. 남편과 저는 갈치 양이 적은가 보다, 라며 먹어보고 부족하면 다른 것을 더 주문하기로 해요. 이윽고 음식이 나왔어요.



낡은 냄비가 세월을 말해줍니다. 낮게 깔린 조림이 정말 양이 많지는 않아 보여요. 밥 한술 뜨고 갈치살을 뜨는데 살이 꽤 두툼합니다. 거기에 무와 감자까지 같이 조리셨어요. 편마늘마저도 기가 막히게 맛있네요. 갈치도 맛있지만 양념이 기가 막혀요. 그런데 먹어도 줄지가 않아요. 도대체 갈치가 몇 토막이 들어간 거죠? 양념에 밥을 비벼 먹어도 과하게 맵거나 짜지 않요. 함께 주신 배추에 양념에 비빈 밥을 얹어 먹으니 그 또한 꿀맛이네요. 공깃밥을 추가해서 배불리 먹어요.


분명 점심식사인데 밥을 먹고 나니 5시가 다 되어 가네요. 바람이 정말 많이 불어요. 태풍 '레끼마' 때문인 듯해요. 이렇게 시원한 날씨 오랜만이요. 쾌적해요. 구름 때문에 산뜻한 나들이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예정대로 세화를 향해 달려요. 너무 많이 먹었더니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해요. 우선 커피를 마셔야겠어요.


세화 바다는 참 작아요. 해변도 좁고 길이도 그리 길지 않죠. 그런데도 세화 바다는 마니아가 요. 나름의 매력이 있으니까요. 정말 유명한데 우리는 굳이 안 가봤던 카페로 들어가요. 본래는 굿즈를 보러 간 건데 남편과 아이가 따라 들어오는 바람에 그냥 거기에 머물기로 해요. 사진 스팟이 정말 많긴 하네요.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어요.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밖에 있어도 전혀 덥지 않아요. 남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저는 카페라떼를 주문했어요. 바람에 어쩐지 추울 것 같아서요. 한여름에 자연 추위라니 얼마나 호사스럽나요. 평상에서 남편과 아이가 장난을 치는 동안 카페라떼를 들이켜봅니다. 우유맛이 얕은 듯한데 마실수록 편안해져요.

 


다시 메시지를 봅니다. 이제 제가 답할 차례잖아요.


-그럼! 나도 그래서 생각이 난거지... 자연스러워질 거야. 잘 지내고...

-네~ 그럴 거예요~ 날 더운데 건강 챙기시고, 즐거운 방학 보내세요~~


'우리도 예전에 저렇게 많이 만나고 돌아다녔었는데, 그땐 회사 동료보단 절친이었다고 저는 생각이 들어요'라는 말에 나는 '자연스러워질 거야'라고 답을 했어요. 모든 것이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풀어질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요.


저는 이모티콘에 꽤 의미를 두는 편이에요. 그래서 이전 것과는 달리 물결표를 보낸 그녀의 메시지에서 그녀가 물결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을 거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제 마음의 응어리도 풀리는 듯했고요.

 


누군가를 용서하는데 저는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요. 분노란 스스로 마시는 독배다, 라는 말이 있지요. 분노의 시간 동안 괴로운 건 저 자신이었어요. 물론 그녀도 힘들었겠지요. 하지만, 옹졸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제 자신이 누구보다 제일 괴로웠어요.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납덩어리를 이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요. 그래서 용서 '내가 편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말이 생겨난 듯해요.


저는 지금 굉장히 마음이 편해졌어요. 용서받은 그녀도 그럴 거예요. 용서는 더 나은 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내밀 수 있는 손이잖아요. 잘못한 사람이 감히 먼저 용서를 구하기는 어려운 일이에요.  차라리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라는 사과가 오히려 도리에 맞는 일이지요. 용서는 '베푸는 사람의 몫'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저처럼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서 괴로운 분들이 있다면, 어려워도 용서를 해보기를 바요. 물론, 지금 당장 말고요. 마법처럼 그럴 수 있는 시기가 와요. 오늘의 저처럼요.

    

오늘은 어느 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잠들 수 있겠어요. 아마 그녀도 그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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