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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Aug 25. 2019

남편을 떠나며.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25



오늘은 떠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짐도 정리해야 하고 마음도 정리해야 하죠.


저는 해야 할 큰 일을 놓아두고 다른 것을 못하는 편이에요. 이를테면, 소개팅을 해야 하는데 동사무소에 가야 한다거나, 시험문제를 내야 하는데 아이를 재워야 하는 것 등이요. 우선순위를 정해서 차근차근하면 될 텐데 알면서도 그리 못해요. 늘 1순위를 위해 다른 것은 제쳐놓. 어떻게 보면 하나라도 제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요. 시간적으로 둘 다 못할 것도 아니거든요. 그저 손에 잡히지 않을 뿐이에요.


오늘 아침도 마음이 분주해져서 결국 PT를 취소했어요. 그 시간에 맞추려다 보면 다른 일들을 못할까 봐요. 날 밝을 때 바다 한 번 더 보면 좋을 텐데 짐 쌀 일을 각하면 바다고 뭣이고 눈에 안 들어 것을 알거든요. 밀린 숙제처럼, 목에 걸린 가시처럼 하루 종일 불편한 기분이 따라다닐 것을요. 그래서 차라리 우선 짐을 싸기로 했어요. 그래 봤자 캐리어 2개이고 싸는데 30분밖에 안 걸렸어요. 하지만 그것을 해야 다른 일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해요. 미련하죠?


짐을 싼다고 후련해지는 것도 아니에요. 두 사람이 쑥 빠져나간 자리를 편평하게 메꾸어 놓아야죠. 그래야 남편 혼자 지내도 넘어지지 않잖아요. 혼자 있을 때 걸려 넘어져 아프면 더 속상하잖아요. 그래서 아이와 제가 떠나고 나면 혼자 남아 궁상떨 남편을 위해 집 정리도 좀 해줘야겠네요. 


어제부터 이불빨래를 시작했어요. 오늘도 이불을 빨아요. 우리가 쓰던 이불은 이제 장에 넣고 겨울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죠. 안 쓸 그릇과 수저도 정리하고요. 냉장고도 들여다봐요. 제주로 떠나올 때 하던 일들을 주를 떠날 때 또 하게 되네요. 그러면서 제주생활의 갈무리도 하고 그러는 거죠, 뭘.


이따 퇴근해서 남편이 정리된 짐과 빈 옷장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스물 다섯 밤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고 하겠지요. 저도 그런 걸요.


아이에게 며칠 전부터 당부를 해요.


"겸아, 앞으로 돌아가면 유치원도 태권도장도 잘 다닐 수 있겠지? 오랜만에 가니까 기대되지? 엄마는 겸이랑 매일 붙어 지내다가 겸이를 두고 학교에 갈 생각 하니까 조금 슬퍼."


어쩌면 제 마음을 향한 스스로의 물음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너 잘할 수 있지?

다시 출근을 하는 일도, 남편과 헤어져 주말부부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도.

오랜만에 엄마 아빠 얼굴도 보고 기대되지?


이렇게 말이에요.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유예 신청도 해야 요. 항공권이 있으면 정해진 홀딩 기간 이외로 인정해 주신대요.


"그래서 언제 돌아오세요?"라는 말에 "겨울이요. 12월 말."이라고 대답했더니 직원 눈이 동그래지네요. 아쉬운 사람이 구구절절 설명을 해야죠.


"저희가 주말부부인데요. 여름 겨울에만 제가 제주로 와요."


"아. 그러시구나.  다녀오시고 겨울에 봬요."


PT선생님은 못 뵈었어요. 외부에 나가 계시다고 해서요. 문자로 이별을 고해요.


-외부에 나와있어서 인사를 못 드렸어요ㅠㅠ 조심히 올라가시고 가서도 운동 꾸준히 해주세요!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으니 건강 유의하시고요ㅎㅎ 계절 지나고 겨울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절 지나고 겨울에 보자는 기약을 들으니 먹먹하네요. 고작 네 번 만났는데요. 2학기는 1학기에 비해 훌쩍 지나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랜 기다림이 될 것만 같아요. 아직은 너무 더운 여름인데 눈이 내리는 차가운 겨울이 곧 온다는 상상은 쉬이 되지 않잖아요.


잠깐 머물다 갈 뿐인데 하고 가야 할 것들이 쏠쏠 있네요. 원래는 헤어클리닉도 받고 가려고 했는데 1시간을 거기에 쏟기엔 어쩐지 아까울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본가 근처에는 드는 미용실이 없어서 분명 후회할 거예요.



아이가 낮잠을 자는 사이. 저도 잠시 마음을 쉬어요. 떠난다는 마음에 아침부터 울컥해져서 제대로 돌보지 못했거든요. 브런치 글도 읽고, 잠시 눈도 붙이고요. 제주에서 마지막 식사를 무얼로 정하면 좋을지도 생각을 해요.


이제 조금 담담해진 것 같아요. 평온하게 오늘의 저녁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이 왔어요. 함께 제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합니다. 태풍 '크로사'의 영향으로 바람이 불어 시원해요. 식사를 마칠 즈음엔 잠시지만 비도 와락 쏟아지고요. 차도 한 잔 마셔요. 잠을 못 이룰지 몰라 커피는 피했어요.


"참 좋다. 저녁시간에 잠시 나와 이렇게 차라도 마실 수 있다는 게. 당은 안 믿겠지만 겸이랑 당신이 오기 전에는 잠을 깊이 못 잤어. 새벽에 뒤척이다 깨고. 근데 두 사람이 온 후로는 아주 잘 잤어. 함께 제주에 있으면서 최대의 수혜자는 나야."


반주 2잔에 술주정인 것 같지는 않고 남편도 꽤 먹먹한가 봐요.


떠나는 마음은 늘 슬프죠. 하지만 남겨진 사람이 가장 슬퍼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도 그랬고, 한달살이에서 깜짝 방문한 남편이 돌아갈 때도 그랬어요. 모든 것은 다 그대로인데 두 사람만 쏙 빠져나간 자리가 그 공허함이 한참을 힘들게 할 거예요.


정리[整理].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한다는 뜻이래요.


남편도 저도 그리고 어린 아들 녀석도 우리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질서 있게 만들어야 해요. 본래 있던 그 자리로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죠. 저는 이 순간 이 말을 떠올려요. 만남엔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 아쉽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별도 있는걸요. 그런 상황에 비하면 한결 낫잖아요 우리는.


정리(定離)를 할 때에는 반드시 정리(整理)가 필요해요. 곧, 정한 이별에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지요. 그래야 떠난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살아갑니다.


'회자정리'라는 말 뒤에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도 있습니다. 희망적이죠? 저희는 추운 날을 기약하고 헤어짐을 맞이해요.



또한 '제주 체류기'도 여기에서 이별을 고하려고 해요.


스물다섯 날을 함께 해주신 애청자(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려요. 변변찮은 매일의 기록에 격려와 응원 보태어 주셔서요.


제주에 오며 결심한 것이 두 가지 있어요. 일기를 쓸 것, 운동을 할 것. 대단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이 결심을 미약하게나마 지킬 수 있어서 행복한 날들이었어요.


그리고 문체를 바꾸어 글을 써보는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고요.


방학이 있는 배부른 직장인은 이제 다시 일터로 돌아갑니다. 행복하세요. 여러분.


지금까지 제주 체류기의 DJ, teaterrace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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