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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5. 2019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2




그해 여름방학은 계절학기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복수전공이 흔하던 시기는 아니었는데, 나는 하물며 교직 복수전공을 해내야 했다. 그러고도 남들 졸업하는 시기에 같이 졸업을 하려면 매 학기마다 꾹꾹 눌러 담은 도시락 속 쌀밥처럼 들을 수 있는 모든 학점을 다 채워 들어야 했다. 그러고도 일정 기준 이상 학점을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보너스 학점까지 더해 목구멍까지 차오른 밥알을 도로 삼키 꾸역꾸역 학점을 먹었다. 그럼에도 학기의 방학 동안 계절학기 수업을 들어야 한 학기 학비를 더 내지 않고 졸업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지하철을 타는 것이 좋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표정과 옷차림을 관찰하는 일은 마치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듯해서 재미가 난다. 진지한 표정으로 책에 몰두하고 있는 노신사도, 데이트 전 화장을 고치는 여학생도 모두 그들만의 삶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심심할 틈이 없다. 11시가 되어야 겨우 눈을 뜰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지하철에 몸이 실어야 했다는 것만 빼면 아주 괜찮은 출발이었다. 김밥의 속재료들처럼 숨 쉴 틈 조차 없는 아침 지하철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 학교는 금남의 구역인 여자대학교였다.


축제 시기를 제외하고는 남학생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자매학교의 남학생들, 더 놀랍게는 공대 남학생들이 대거 우리 학교의 계절학기 수업을 들으러 왔다. 상대적으로 계절학기 수업료가 저렴했던 것과 여대생들만 모여 있는 여자대학교에 대한 환상 등이 그 이유로 작용했을 터였다. 그리하여 나의 계절학기 전공 수업에 시커먼, 그리고 일본어라고는 '기모찌', '다메' 같은 류의 단어밖에 모르는 남학생들이 우리 뒤에 진을 치고 앉았다.




일본 원서를 교재로 쓰는 '일본 역사와 문화'라는 이름의 전공 강의이다. 담당한 강사도 남학생들의 대거 등장에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ㄱㄴㄷ'도 모르는 학생들을 앉혀놓고, 역사가 어땠니 문화가 어떠니 강의를 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했을 터였다. 강사는 조별 발표의 방식으로 수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즉, 일본어 전공자들과 '일본어 고자'들을 한조로 묶어 전공자들이 교재를 번역해서 알려주고, '고자들'과 학습 후 그 주제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 방식이 훗날 불행일지 다행일지는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한 학기 학비를 아끼기 위해 여름방학을 투자해 학교까지 나와 있는데 번역 봉사까지 해줘야 한다니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강사는 조원의 이름을 발표했다.


"일문과 유지현, 신소재공학과 이현, 김웅"


보기 싫다. 하지만, 누구인지 확인을 하기 위해 돌아봐야 한다. 고개를 돌렸다. 탈색한 장발의 이현과 어수룩한 표정의 김웅이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남자가 머리가 왜 저렇게 길어? 그리고 쟤는 왜 저렇게 촌스러워? 하필 조원도 참...'   


이왕이면 설레고 싶었지만, 고개를 돌린 순간 한숨이 먼저 세어 나왔다.


강사의 호명이 끝나고 조별로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어색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공일일, 구칠육......"


S통신사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전화번호 앞자리로 통신사를 구분할 수 있었다. 두 살 많은 이현은 공일일, 한 살 어린 김태웅과 나는 공일구였다. 우리 조의 주제는 '금각사와 은각사'였고 발표일자에 맞춰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번역한 내용을  2주 안으로 각자의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했다.


덥다. 학교까지 전철을 무려 두 번이나 갈아타고 한 시간을 넘겨 학교까지 왔건만, 내게 주어진 건 시답지 않은 번역 봉사였다. 이 여름은 꽤나 지루할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버스를 택했다.


갑갑한 마음을 해소시키려면 아무래도 지하로 가는 것보다는 지상이 낫다. 조금 오래 걸리고, 약간의 멀미는 있을 테지만, 북악과 세검정 사이에는 꽤 괜찮은 풍경이 있다. 눈을 감는다.

 

가까이 앉아서 살펴보니 이현은 속눈썹이 꽤 긴 남학생이었다. 게다가 웃을 때마다 입 끝에 보조개가 깊게 패였던 모습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피식 따라 웃고 만다.


우유를 끓이다가 레몬즙을 넣으면 유청 안의 단백질들이 몽글몽글 뭉치면서 근사한 리코타 치즈가 만들어진다. 우유처럼 뜨겁지도 그렇다고 미지근하지도 않게 적당한 온도로 데워지고 있었던 나에게, 이현의 보조개는 산뜻한 레몬즙처럼 조로록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현의 웃음 입가를 떠올리는데 가슴 어딘가에서 몽글몽글한 리코타치즈만들어지고 있는 기분이다.


이 여름. 어쩌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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