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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6. 2019

잠시 마음의 책갈피를 끼우고 너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3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은 때때로 설레는 일이다.


그 여름의 내가 그랬고, 군에 있는 석이도 그랬을 것이다. 석이는 늘 나를 그리워했고, 나는 석이가 입대하던 날 주저앉아 울던 여자가 내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담담해졌다.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고, 그가 두툼한 편지를 보낼 때면 으레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읽어 내려갔으며, 나의 하품 나는 일상을 적어서 보냈다.


내 마음에 리코타 치즈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 이후로는 석이를 향한 편지에 솔직한 내 마음을 담지 못했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일'은 나라는 사람에게는 도덕성의 잣대까지 들이밀어야 하는 어려운 문제였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의 리코타 치즈는 아주 고소하고 산뜻한 풍미를 지니었다. 그 맛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고 결국 석이에게 알리기로 했다.


"더 이상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아무래도..."


휴가 후 열일 제치고 제일 먼저 나를 찾은 석이에게 나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내가 싫어진 것은 아니잖아."

"싫지 않다고 해서!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입대를 앞두고 자기가 아끼는 것들을 모두 담은 상자를 나에게 맡긴 석이였다.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과 자신의 어릴 적 사진, 그리고 소소한 추억 보물들이 들어있었다. 그만큼 나를 잡아두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는 그 상자를 돌려주었다. 석이가 홱, 하니 돌아섰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태운 버스가 떠났고, 나는 그 버스가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의식을 치른 기분이었다. 지루한 대학생활에 활기를 넣어준 석이였지만, 그와 나의 틈에 더는 빼낼 수 없는 그저 숙명과 같은 사람이 이미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나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무거웠지만, 동시에 가벼웠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누군가를 향해 마음껏 설레어도 좋은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를 의식하면서 입꼬리를 올려보고, 거울 속 내 모습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와 마주한 상상을 해도 괜찮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걷는 것이 설레었고, 손길이 섬세해졌고, 단어를 골랐다. 누군가를 의식하고 지내는 것이 다시 설레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강사로부터 극찬을 받았고, 성적도 극적이었다. 흠잡을 때 없이 완벽한 계절학기였다. 이는 곧 그와 나의 필요충분조건 시기가 만료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동시에 우리의 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찍을 차례가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석이가 아닌 이현을 향한 마음을 써야 했다.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예상이 갔다. 정말로 뜬금없는 전개라고 여길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사유도 없이 남과 여가 계속 연락을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 그 필요를 당연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는 프리챌 이메일을 쓰고 있었다. 주소란에 nyeplh@freechal.com이라고 쓰고는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유치했을 고백의 말들이 다른 사람에게 도달할 거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으니까.


그는 나의 메일을 읽었다.


한참 후, 아니 어느 정도 오래지 않은 시간 후. 그의 답장이 와 있었다. '지현아'로 시작하는 제목의 편지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지고, 침이 꼴깍 넘어가고, 호흡도 가빠졌다. 배도 살살 아파오는 것 같았다. 제목을 클릭하고 빠른 눈으로 메일의 가장 아랫부분을 보았다. 그곳에 결론이 있다.


-미안해.


기대했지만, 설레었지만, 나의 마음에 대한 그의 답은 '미안해'였다.


부끄럽고도, 울고도 싶다.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렇지만, 너도 웅이도 모두 좋은 동생이라고 생각해...


이런 말들만 어울리지 않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석이에게 했던 매몰찬 단어들이 그대로 나에게 반사되는 것만 같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을 것이고, 심지어 사랑도 아니었 이현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갑자기 머리에 뜨거운 물이 닿았을 때처럼 따끔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신이 인간을 빚고 감정을 불어넣었을 때는 균형을 생각했어야 한다. 어떤 감정에든 금방 빠져드는 사람이라면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것 역시 금방 되는 사람이어야 균형 있고 공정한 것 아닌가. 이현을 향한 내 감정 역시 '금사빠'였는데, 금세 훌훌 털어내야 균형 잡힌 감성의 인간이지 않나.


나는 지금 슬픈가?


계속 화끈거린다. 그리고 이 감정의 수렁 안에 오래 매몰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슬픔의 감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가끔 지독하게 책이 읽히지 않을 때가 있다. 눈은 문장을 따라 가는데 내용이 스캔되지 않거나 진도가 미적거릴 때는 책을 접어둬야 한다. 그래야 다시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접어두자고 다짐했다. 잠시 책갈피를 끼워두자고. 다시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이현의 역사를 알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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