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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7. 2019

여전히 난 너를, 아직도 난 너를.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4





누군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리고 시기상 순서상 말도 안 되지만, 그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언제나 늘, 매일같이. 지금도.



졸업반의 삶을 살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나를 지켜보던 후배 한 명이 문득 소개팅을 제의했다. 고민 없이 수락했고, 부담 없이 만나보기로 했다.


나의 역사 가운데 가장 진한 화장을 하던 때였다. 속눈썹을 붙이고, 파스텔의 옷을 입고 만났던 홍과는 짧지만 강렬한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영화처럼 아주 아름답게 헤어졌다. 함께 찍은 사진을 나누어갖고, 서로의 앞날을 축복하며 멋있게 서로를 보냈다.


강렬했던 짧은 만남을 위로받고 싶었던 어느 날, 공교롭게도 이현에게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같이 수목원 갈래?



화창했다.


날씨는 왜 필요한 순간에 준비를 하지 못하는 걸까. 나의 마음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날씨도 그랬다. 내가 그토록 그를 원했던 날에는 그가 없었고, 나에게 그가 무엇도 아닌 순간에는 그가 내 곁에 있다.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에 들러 같이 저녁을 먹었지만, 지난날의 고백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긴장했을 뿐이었다. 홍과의 시절을 지난 덕분이었다.


내가 담담해지자 오히려 그가 갈급해했다. 신세가 역전된 것이다. 그가 갈급해하니 흥미진진하다.


가뭄 끝엔 언젠가 단비가 내리기 마련이다. 홍이 나를 스쳐간 후였다. 이현이 일궈놓은 낙토(樂土)는 아니었지만, 그를 위해 준비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적당한 때에 그가 다시 나의 무대에 등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운명이란 사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다. 적당한 타이밍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운명'인 것이다. 홍은 이 운명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 장치였던가 보다.


비록 아름답게 헤어졌지만, 여전히 홍과의 시절에 미련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종로의 J 바였다. 중저음의 점잖은 바텐더 겸 사장님은 우리에게 어울리는 칵테일을 권해주었다. 좋아하는 맛과 색깔, 향취, 그날의 기분까지도 물어보고 그에 걸맞는 칵테일을 추천해주는데 이름도 맛도 비주얼도 기가 막히다.


복숭아와 파일애플의 상큼한 맛이 나는 섹스온더비치(해변의 정사), 코코넛 향에 오렌지와 딸기의 콤달콤한  느껴지러브인더애프터눈(오후의 정사),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버진스키스(첫키스) 등 다소 자극적인 네이밍에 우리는 부끄러웠지만 이끌렸다. 어두운 조명이 그랬고, 근사한 음악이 그랬다.


우리의 관계는 모호하지만 담백했고, 만날 이유가 없이도 만날 수 있었다. 더 이상 거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관계였다.


책갈피를 끼워 접어두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다시 봐도 그의 속눈썹은 참 길다. 소 같기도 하고, 기린 같기도 했다. 나는 기린을 참 좋아한다.


"오빠의 속눈썹을 말아보고 싶어. 뷰러로."


나의 맥락 없는 말에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럼 와. 가져와 봐. 우리 집으로."


어쩌면 도발이었을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한 시간 넘게 전철을 타고 버스까지 갈아타고서야 도착할 수 있는 그의 집에 갔다. 그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볼록한 눈두덩이에 가지런하고 까맣게 누워있는 그의 속눈썹. 그 아래로 두꺼운 코가, 그리고 약간 비뚤어져 보이는 입이 있다. 입술의 양 옆에 보조개가 패였을 자국도 보이는 것 같았다. 진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눈썹이 움찔, 하고 움직였지만,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얼굴께로 바짝 얼굴을 들이민다. 씩씩거리며 가빠진 호흡의 속사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숨을 참는다.


그의 속눈썹을 말아 올렸다. 혹시라도 눈꺼풀이 찝힐까 봐 손이 떨렸다.


"괜찮아?"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 떠봐."


그가 눈을 떴다.


"괜찮아?"


이번에는 그가 물었다.


"응. 예쁘네. 고마워. 정말 궁금했거든."


나의 다소 엉뚱한 부탁에진지하게 응해준 그가 무척 고다. 기린 눈썹을 가진 그는 두 개의 보조개를 드러내 웃는다.


그렇게 둘 밖에 없는 곳에서 눈썹을 집었고, 함께 밥을 먹었다. 곳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새 옷과 같았다. 문득문득 느껴지는 석유냄새와 아직 빳빳한 기운이 나의 온기로 품에 맞기까지 느껴지는 어색함이 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고 심지어 나에게 잘 어울리는 그런 새 옷 말이다. 나는 여자였고, 그는 남자였음에 그곳의 공기는 비록 긴장되어 있었지만, 그리고 그 긴장감을 의식하는 것이 편치 않은 둘이었지만, 태연한 듯 가장하며 둘만의 시간을 썼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여름은 지구 반대편을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우리에게로 와 있었다.


"너의 남자 친구가... 나여도... 괜찮겠어?"


둘만의 공간에서도 덤덤해 보였던 이현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신촌의 민들레 영토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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