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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8. 2019

이 길의 끝에 함께 서 있는 사람이 네가 아닐지라도.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5




- 여보오, 나 오늘 남자 친구 생겼어.


우리가 한 남자와 한 여자였을 때, 나는 이현을 '여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장난을 담아 내 남자가 될 이현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나름의 세뇌 요법이다. 하지만, 막상 이현의 고백의 말에는 뭐라 답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 바로 대답해야 해?"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고민을 해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이현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응."이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한 남자의 인생이 내게 오려고 하고 있으므로. 마음속으로는 수천번 '예스'를 외쳤지만,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놀라 발그레해졌고, 어쩐지 수줍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은 구름 속 같기도 하고, 물속 같기도 했다. 그저 몽연한 풍경 한가운데 내가 둥둥 떠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버스 안에서 피식, 하고 웃었다. 그에게 답할 단어를 찾고 또 찾았다. 고르고 또 골랐다. 멋진 말로 답하고 싶었는데, 여의치가 않다. 그는 예전의 나처럼 침을 꼴깍 삼키고, 호흡이 가빠지고, 정수리가 따가운 느낌을 견디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다리게 하려는 게 아닌데 어쩐지 미안한 마음도 든다. 장난스런 호칭으로 이현을 길들인 책임을 질 차례이다. 아무래도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하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나의 문자메시지에 이현은 매우 기다린 내색을 했다. 아마 전화를 쥐고 몇 번씩 들여다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환희를 잊을 수 없다고, 그 후에도 그는 여러 번 이야기했다.


  



계기판을 아무리 돌려도 나침반의 바늘이 향하는 곳은 항상 일정하다. 계절이 바뀌고 또다시 우리가 만났던 계절이 오는 동안 우리의 나침반은 같은 곳을 향해있었나 보다. 접어두었던 이현의 한 페이지에 내가 등장할 차례가 온 것 같다.


이현의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내가 알아온 이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역사를 알기 위해 건너온 시간의 다리가 무색할 정도로 애인으로서의 이현은 생판 남자였다. 마치 격식을 갖춰 입고 만나온 '업무상 상대'와 벌거벗고 마주한 기분이었다.


느려 터진 우리의 사랑은 군불에 데워진 시골 방과 같았다.  놓은 번개탄처럼 화라락 타오르는 않았지만, 서서히 그리고 오랫동안 온기를 머금는 힘이 있었다. 누군가를 밀어낸 곳에 다른 이를 채워 넣은 사람과 오랜 시간 혼자만의 방을 꾸리던 사람의 만남이었으니까.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이지 않았고, '열기'는 없었지만 '온기'가 있었다.


이미 여름을 보내고 다시 맞은 여름의 사람들이었으므로, 첫여름을 맞이하는 연인들보다 조금 더 떨었다. 둘만의 공간에서도 괜찮았던 우리는 대낮의 대로에서 손을 잡고는 어쩔 줄 몰라 앞만 응시했다. 이제는 그와 '함께' 역사를 쓴다. 나중에 이 길의 끝에 함께 서 있는 사람이 이현이 아닐지라도, 역사의 일부는 그와 함께 만들어낸 것일 테니.





우리의 아지트는 우리가 보통의 남자와 보통의 여자였을 때와 같이 그의 집이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여행으로 집을 자주 비우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둘만 있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만 달라졌을 뿐인데, 우리를 둘러싼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가 '애인 사이'라는 간판을 달고 난 후 처음으로 이현의 집으로 향하던 날. 도착도 전에 나는 매우 떨었다. 딸기향이 나는 립밤을 발랐고, 그것이 그에게 기분 좋은 향기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거실은 볕이 길게 늘어서 밝고 따뜻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몇 번이나 침을 삼켰는지 모른다. 숨이 원래 이렇게 가빴던가, 내 숨소리가 혹시 이현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얕은 숨을 쉬느라 숨은 더욱 가빠졌다. 소파에 나란히 앉았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내 시선은 앞쪽 벽만 응시했다. 이현은 내게 기댔고, 내 머리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귀는 쫑긋거렸고, 온몸의 뜨거운 피가 귓바퀴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저린 것 같기도 한 묘한 느낌이었다. 옆통수에 갖다 대었던 그의 입이 뺨을 타고 얼굴 앞으로 왔다. 나의 볼을 스쳐간 그의 볼도 나만큼 상기되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눈 앞의 벽은 그의 얼굴로 바뀌어 있다.


"흐음. 딸기향이 나."


그리고 그는 그 끓는 입술로 나를 포근하게 덮었다.


우리의 첫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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