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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Nov 09. 2019

어떤 날도 어떤 밤도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6



남자란 과거를 질질 끌며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스위치를 전환하는 데는 여자보다 훨씬 서툰 것 같다.

<냉정과 열정사이, BLU>


그래서 난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내가 아닌 타인을 마음 깊숙이 품고 사는 사람을 나는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모든 남자들이 준세이처럼 사랑한다면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비록 나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겠지만.


나에게도... 자신의 전 존재로 서로에게 부딪치며, 과거도 미래도 미련 없이 내던지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우리는 졸업을 했고, 둘 모두 취업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일주일에 두세 번 중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이현은 시에서 마련한 직업훈련원에서 무언가를 배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취업이 보장되는 것은 아었다. 그저 요즘처럼 '문송하다(문과여서 죄송합니다)'라든지 '죄상하다(상경계라서 죄송합니다)'라는 구분 없이 모두가 어려운 IMF 세대였다.


이현은 역사를 매우 좋아했고 도서관을 개관하는 것이 먼 미래의 꿈인 사람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남자는 주로 이과와 독일어, 여자는 주로 문과와 불어를 선택하던 세대의 사람이어서, 그 역시 별생각 없이 이과를 선택하여 공대를 진학했을 터였다. 그와 대화를 해보면 공대생들에게는 쉬이 엿볼 수 없는 섬세한 감정이 존재했고, 나에게 없거나 혹은 부족한 부분에 탁월한 모습을 보일 때면 그가 더욱 특별하게 여겨졌다.


한 가지 그가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귀차니즘'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라는 유행어는 어쩌면 그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를 만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는 것이 대견할 정도였다. 약속시간을 못 지키는 고질을 가지고 있던 나에 비해 이현은 늘 약속시간보다 미리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주로 신촌에서 데이트를 했다. 이현의 집은 남양주였는데  무엇 때문인지 계속 신촌에서 만났다. 거리를 걸었고, 차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그와 대화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영화 보는 시간이 그와 대화할 시간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이현의 미소가 좋았고, 웃을 때면 드러나는 보조개가 좋았다. 나는 그의 보조개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이것을 만질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이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첫 경험은 역시 우리의 아지트에서였다. 이현의 집으로 향하면서 오늘이 그날이 될 이라는 것을 예상했다. 어떤 싸인도 없었지만,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서툴렀지만 충실했고, 부끄럽지만 대담했다.


"이렇게? 괜찮아?"


우리는 마치 실습을 하듯 하나의 과정마다 확인을 했다. 둘 모두 익숙지 않았으므로,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체험해보는 과정이었다. 오르가슴, 이런 건 뭔지도 몰랐다. 그저 그의 더워진 몸이 나의 몸과 하나 된다는 일치감이 좋았을 뿐.


나의 몸 위에서 헉헉 가뿐 숨을 몰아쉬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했다.


"돌아오게 해서 미안해."


나를 안고 그가 속삭인다. 나를 탐색하고 경험하게 허락해준 것, 나와의 일치감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을 전하는 말이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경험이라는 것을, 몸의 대화라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옷을 챙겨 입고 보니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는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깔깔거리며 이불을 비볐다.


"진짜구나. 이렇게 혈흔처럼 나온다는 게."

"그러게. 으윽. 나 환자 된 거 같아."

"왜왜? 아파? 많이 아팠어?"


울상을 짓는 이현을 보니 큭큭 웃음이 난다. 


"이렇게 피를 흘렸잖아."


이불을 들이밀며 배시시 웃어본다. 그제야 안심하는 그였다.


"그나저나 이거 자국 남으면 어쩌지. 어머님이 보시면 딱 눈치채시는 거 아냐?"


걱정을 하면서도 우리는 즐거웠다. 모든 것이 신비로웠고, 그와 하는 '모든 처음'이 행복했다.




그와 만날 때는 그에게 충실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내 생활에 충실했다. 연락이 뜸한 연인에 대해 그는 항상 아쉬워했다.


"있잖아. 오늘 경태랑 성준이를 만났는데 내가 내기에 졌어. 셋이 만나는 동안 누가 가장 먼저 여친의 전화를 받을까 내기했었거든. 연락 한 번 할 줄 알았는데, 제일 늦더라도 상관없었는데. 아예 연락이 없더라. 좀 많이 서운했어."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 하니 그 만남에 충실하도록, 나의 전화가 그들의 만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던 나의 배려에 그는 서운함을 표했다. 눈 앞의 상황에 충실한 나에 비해, 이현은 늘 나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


"경태가 나를 신기하게 봐. 집 앞으로 찾아오는 여친을 겨우 만나러 가던 내가 이렇게 부지런히 여보를 만나러 가는 것을."


자신의 노력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치는 그를 보며, 내가 이현을 변화시켰구나 생각했다. 전에 없던 변화에 그 자신이 놀라운 모양이다. 혼자만의 방에서 겨우 나온 그였지만 이토록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일 줄은 그도 나도 몰랐다.


매일 밤마다 전화로 사랑을 이야기했다. 사랑한다 했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가, 만지고 싶고 안고 싶다고 했다가,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했다가. 그렇지만, 어쩌다 내가 잠이 들어 통화를 못한 날이면 그는 나의 무심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난 말야. 외롭기 싫어서 오빠를 사랑하는 게 아냐. 함께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이지. 지금은 모르지만, 사랑을 해도 외로운 순간이 있을 거야.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니까. 그럼 그땐 어떻게 해? 사랑하지 않는 게 되어 버리잖아."


위기 모면을 위한 말이었지만,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우리 언젠가 함께 금각사에 가보자."


아이처럼 그가 기뻐했다. 우리를 이어준 금각사에 그와 다녀와야지 생각했었다. 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금각사 앞에서 부둥켜안고 기념촬영을 하는 습이 머릿속에 잠시 스쳐 지나갔다.



 



이전 05화 이 길의 끝에 함께 서 있는 사람이 네가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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