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웃으며 떠올릴 수 있다
'서울'이란 지명은 나에겐 꿈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집에서-정확히 말하면 아빠의 간섭과 통제에서-벗어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대학 졸업 전 서울로 취직했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공무원 시험이 유행(?)이었기에 나역시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이 공부하던 선배가 '외국어 능통자 우대'라는 자격 요건을 갖춘 모 대기업 입사 원서를 던져주며 한번 응시해 보라고 했다. 학점과 면접으로 뽑으며 조건도 좋으니 해볼 만하다는 거였다. 사실, 그때만 해도 군가산점이 있던 시절이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해도 언제 합격할지는 미지수였다. 필기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도 군가산점을 따라잡기는 힘들었으니.
속는 셈치고 여권용 사진을 찍고, 입사원서를 쓰고, 우편으로 부쳤다. 서류 합격 통지가 날아오고, 면접을 보고, 나는 서울로 갔다. '여자가 어디 감히' 서울을 가냐며, 서울대 아니면 대학도 서울로는 못 보내준다고 했던-실은 서울대 갈 성적도 안됨-엄마는 도살장 가는 소를 보듯 울며불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엄마의 모습을 보며 울컥했던 것도 잠시, 서울에 도착한 나는 "야호~!"를 외치며 자유를 만끽했다.
어느 빌라의 문칸방(당시엔 그런 형태의 전월세가 유행)에 세들어 살던 나는 몇 개월 후 주택의 1층에 있는 원룸으로 이사했다. 때가 되면 월급은 따박따박 나왔고, 명절이면 상여금과 선물도 나왔다. 월차와 생리휴가도 있었고, 여름휴가도 있었다. 자본주의가 주는 안정감을 느끼며 나는 차차 서울 생활에 익숙해졌다.
봄이면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 구경을 하러 가곤 했다. KBS 뉴스로만 보던 여의도 벚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다니! 이게 바로 서울 '특별시'에 사는 혜택인가 싶어 뿌듯했다. 당시 대학 졸업 후에 하나, 둘 서울로 모여든 친구들. 나처럼 '프리덤(freedom)'을 찾아 서울로, 서울로 모여든 부산 가시나들이었다. 여의도 근처에 근무하는 친구랑 둘이서 벚꽃 구경을 하러 퇴근 후에 여의도 지하철 역에서 만나 윤중로 벚꽃길로 향했다.
잔뜩 멋을 부린다고 하이힐에 정장 차림으로 갔다가 연인들에 치이고, 리어카에서 파는 숯불꼬지의 연기에 치이고, 인파에 치이고... 꽃구경도 잠시, 신고 갔던 하이힐 때문에 발이 너무 아파서 잠시 쉬자며 노상 포장마차에 앉아 우동을 먹으며 서울살이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길을 따라 어둠 속에 빛나는 한강의 물결을 따라갔다. 길을 따라 간 건지, 인파에 휩쓸려 간 건지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벚꽃 구경하는 북새통을 벗어나 조금 숨통이 트였다. 어둑어둑 날이 어두워져 봄바람이 살짝 차가웠지만 한산하고 약간은 쓸쓸한 그 느낌이 좋았다. 한강 근처에서 캔맥주를 마셔보는 것-사실 서울에 올라갔을 때부터 한번쯤 꼭 해보고 싶었던 거였다. 그것도 남자친구랑. 결국 서울살이를 끝내고 부산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남자랑 한번도 해보진 못했지만, 친구와 함께했던 그날의 추억은 '서울'을 떠올릴 때면 함께 기억나는 한 장면이 되었다.
근처 슈퍼마켓에서 캔맥주와 새우깡-맥주 안주로는 새우깡이 최고지-을 사서 정장에 하이힐 차림의 부산 촌년 둘이서 강변 계단에 앉아 술을 마셨다. 서울을 관통하는 강은 '한강'뿐이니 당연히 한강이겠지만, 한강이 요즘처럼 핫플이 된 걸 보면, 30년 전에 한강에서 맥주를 마신 나는 선구자였던 걸까? 계단에 앉아 등 뒤로는 63빌딩을, 한강 건너 맞은편에는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친구랑 다짐했었다.
"우리, 10년 안에는 서울에 우리 집 꼭 사자."
나는 그 후로 5년쯤 지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왔고, 친구는 여전히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 비록 굵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의 생활은 나름 즐겁고 행복했다. 그래서였을까? 서울 생활을 끝내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한강을 바라볼 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하나, 둘...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서울에서 보낸 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나씩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전쟁에서 장렬하게 지고 돌아가는 패배자의 심정 같았다고나 할까? 뜻한 바 있어 낙향하면서도 마음 한편엔 세상의 중심에 자리잡지 못했다는 아웃사이더의 열패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후 서울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에 다시 갔다가 공항으로 돌아가며 차창 밖으로 한강을 바라볼 때는 마음이 무척 홀가분했다. 팍팍하게 살아도 늘 아둥바둥 하는 것 같은 친구들의 서울살이를 보며, 여행처럼 한번씩 서울에 오는 나자신이 오히려 여유롭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사실 서울 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돌아온 건, 내 인생 제2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였다. 뜻한 바 있어 다른 길로 접어들면서도 과연 잘하는 짓인가 싶어 망설이고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한때 '최선'이라 생각했던 결정이 잘못된 판단이 될 때도 있고, '최악'이라 여기며 죽을 만큼 힘든 순간도 지나고 보면 전화위복이 되기도 하더라. 인생이 재밌고, 너무 안달복달하면서 살 필요가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글도 한강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더워지기 전에 서울 사는 친구들 만나러 서울에 한번 가야겠다. 한강 라면도 끓여 먹고, 눈이 휘둥그레지게 더 많이 변했을 서울의 모습을 보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