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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네 Mar 27. 2024

비가 오지 않는 런던이라면

에필로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

 얼마 전, 아들의 방학 기간 중에 이스탄불의 인근의 이즈니크를 1박 2일로 여행했다. 그곳에서도 아들과 남편 그리고 나는 이즈니크 시내에서 실랑이를 벌인다. 90년대 초반으로 돌아온 듯한 튀르키예 이즈니크 시장, 시장 식당에서 밥을 먹자니 아들은 너무 낡고 시끄럽고 낯설단다. 자신은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눈물이 뚝뚝이다. 방금 다녀온 자미(모스크)의 화장실 분위기 때문인가. 아들은 연신 가게 앞에서 못 간다를 외친다.

 

  "야, 이놈의 자식! "


 배는 고프고 다른 대안도 모두 비슷해 보이는 이즈니크 시내, 사실 아들의 알레르기로 우리는 식당을 골라가며 먹을 곳도 없다. 결국 남편의 불꽃이 그의 머리끝으로 쏟아 오르고, 이런 우리를 알 사람은 절대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멀리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잘못 들었는가 했는데 아들의 이름을 다시 들린다. 앗!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으며 나누는 우리의 반가운 인사, 그리고 남편의 머리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냅다 얻어맞은 듯, 쑥 꺼져버렸다.


 나 그리고 남편, 우리는 이렇게 가끔 아들 덕분에 마른 장작처럼 활활 불타오른다. 파이어!




2022년 5월 4일 오후 4시 9분

 우리는 숙소에서 리버풀 스트리트역을 지나 다시 스탠스탠리 공항에 도착했다. 각자 런던 여행 기념품으로 산 인형과 책을 살핀다. 유모차와 한 몸인 듯, 이제 체중이 제법 나가는 녀석이 유모차를 안전하게 타고 있기 위해선 남편의 무거운 백팩이 꼭 필요하다.

 혹시나 급한 일이 생길까 늘 챙겨 오는 흡사 바위돌 같은, 그의 노트북이 실린 가방은 아들의 유모차 뒤에 매달려있다. 가장의 무게 덕분에 유모차의 허용 무게를 이미 넘은 아들은 뒤로 넘어가지 않고, 즐겁게 책을 본다.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한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일을 각자 하며 비행기를 기다린다.

 남편은 비행기 시각보다 3시간 일찍 공항에 도착할 수 있게 출발을 나섰고 체크인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일등으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정말 아무도 없다. 너무 한적한 영국 공항에서 마스크도 훌러덩 벗고 비싼 커피도 사 마신다. 남편은 내 것만 사라고 한다. 본인은 커피 맛도 모르는데, 가 먹어서 함께 있으려고 먹는 것이니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괜히 혼자 마시니 미안하기도 한 나는, 남편에게 투덜거린다.   


 "뭐가 그렇게 바빠? 천천히 좀 가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지난 2022년의 메모와 휴대폰의 사진첩을 유심히 바라본다. 사진첩 속에는 나의 모습보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많다.

 사진만 보면, 나 빼고 둘이 여행한 거 같다.  한 사람은 공룡을 보고 웃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고 다음은 어딜 가야 하는지 다시 살핀다. 느긋한 나와 달리, 두 사람은 나보다 빠르고 급하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배경만 바뀐 채, 남편과 아들의 표정은 오늘의 그들과 너무나 닮았다. 우습다.


 어제 저녁, 아들과 함께 놀다가 게임에서 질 것 같으니 눈물을 흘리는 아들 녀석을 보며 눈에서 불꽃을 날리던 남편의 모습, 혼을 내는 아빠를 보며 뚱한 표정을 짓는 아들까지. 사진첩 속에서 그들은 다른 배경 속에서 같은 표정으로 있다. 여행 중, 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뚱한 표정의 아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화가 나서 아들에게 찡그린 미간으로 이야기하는 남편. 사진 속의 두 사람은 그대로 내 앞에 있다. 유모차를 타던 아들이 킥보드를 밀고, 여행지마다 그림을 그리던 녀석의 괴발개발하던 그림이 이제는 제법 그럴듯해졌다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 그대로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며 화내고 울고, 웃고 사랑한다.


 휴대용 밥솥, 상비약, 알레르기로 비닐에 꽁꽁 싸여있는 옷들, 반찬, 식기, 양념통이 여행가방에 담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짐 싸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고, 영양제를 먹어도 여행을 가고 다녀오면 좀 아프다는 것 빼곤 다른 것이 없다.

 아이가 자라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유모차를 밀며 손목에 아대를 차고, 아들의 무게로 앞으로 안 나가는 유모차에, 어서 내리라는 말을 하는 우리 그리고 아들은 자연스레 유모차에서 내리곤 언덕이 지나자마자 다시 유모차에 올라타던 웃기는 상황. 그 시절, 유모차를 타고 있던 아들의 사진을 보며 우리는 말한다.


 "아들, 네가 얼마나 안 걸으려고 했는지 기억나?"

 "진짜? 난 기억 안 나는데, 런던 또 가고 싶어요."

 "그러게 별 거 없었는데. 런던, 참 좋았어."

 

 그렇게 우리는 거리에서 네가 타고 있던 유모차를 밀다가 화를 내던 기억을 잊고, 계획대로 안된다고 서로를 향해 투덜거리던 나와 너를 잊고, 런던 거리 속에서 누구보다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우리, 세 사람을 기억한다.

 

 2022년 5월의 봄, 우리는 비가 오지 않아 행복한 런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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