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쿠분 고이치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를 읽으면서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다 보면 강한 느낌이 와닿는 단어나 문장이 있기 마련이다.
학교도서관에 새로운 도서가 들어왔다기에 들렀다가 책제목과 내용 속의 한 문장에 마음이 넘어갔다.
토끼를 사냥하러 가는 사람은 토끼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고쿠분 고이치로의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은 철학책이다. 저자는 철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의문을 마주하고 스스로 생각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끝까지 제대로 읽을 수 있도록 썼다고 밝히고 있지만, 480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내용이 꽤나 부담스럽다.
2주째 붙들고 있지만 연말이라는 핑계로 자꾸 미루다 보니 완독은커녕 절반도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함과 지루함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고 또한 은퇴를 앞둔 사람이나 은퇴자, 또는 노년의 삶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껴 미흡하지만 정리해 보았다. 향후 완독 후 다시 정리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한가한가, 지루한가, 아님 한가하기 때문에 지루한가?
한가함과 지루함,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개념이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한가함을 ‘아무것도 할 게 없고, 할 필요도 없는’ 물리적인 시간의 공백으로 정의한다. 이는 긍정적으로는 자유와 자기 결정권의 확대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늘 하는 일상적으로 해야 할 일들로부터 벗어난 ‘잉여의 시간’을 뜻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한가함', 한가한 시간 속에서 ‘지루함’이 싹튼다는 점이다. 저자는 지루함을 ‘무엇인가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상태’로 규정한다. 즉, 한가함이 있고 이에 따른 지루함이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대다수는 생존의 문제로 인해 한가할 겨를이 없었고, 따라서 지루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은퇴 후 길어진 노년기는 우리 모두에게 거대한 한가함을 선물했고, 과거 소수만이 누리던 특권이었던 지루함은 이제 누구나 마주해야 할 노년의 일상이 되었다.
준비 없이 맞이한 이 거대한 지루함은 자칫 우리 삶의 생기를 조용히 갉아먹을 수 있다.
오랫동안 나를 설명하던 사회적 역할(예: 직장인, 부모 역할)이 사라진 자리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불안감이 들어선다. 이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무의미하거나 과도한 활동, 혹은 '관념의 소비' (취미나 레저 활동을 통한 만족감 자체가 아닌, '활동하고 있다'는 이미지의 소비)에 몰두한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이러한 소비는 근본적인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끝없는 불만족의 순환을 낳을 뿐이며, 지속적인 지루함은 결국 우울과 무기력으로 이어져 삶의 활력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가함으로 인한 지루함'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고쿠분 고이치로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인용하며, 지루함을 단순히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노년의 삶, 또는 은퇴 이후의 삶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첫째, 지루함을 '자유의 증거'받아들이자. 즉, 지루함을 무조건 회피하려 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완전한 자유가 자신에게 주어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떨까? 이는 정해진 목표 없이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한다.
둘째, '사치와 낭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자. 여기서 사치란 허영심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진정으로 좋아하는 행위와 취미에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효율이나 성과,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활동 그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몰입을 뜻한다. 깊이 있는 독서, 고난도의 수공예, 또는 오랫동안 공들인 정원을 가꾸는 일처럼 효율이나 생산성 따위는 잊고 몰입하는, 남들이 보기엔 무용해 보일지라도 나에게 만은 유용한 시간이야말로 지루함의 공허함을 잠재우는 진정한 해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셋째, '잉여의 시간'을 주체적인 서사로 채워보자.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성에서 벗어난 이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윤리적 선택에 달려 있다. 지나온 삶의 시간을 돌아보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고, 순수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위해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고, 진정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좋겠다.
의학의 발달로 ‘100세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은퇴자는 더 이상 뒷방의 노인이 아니며, 은퇴 이후의 삶은 남은 생이 아니라 비로소 나를 위해 사는 본래의 생이다. 남은 긴 세월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이 시점, 한가함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지루함을 자유의 증거로 긍정하라는 이 책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는 한가한가, 지루한가, 아님 한가하기 때문에 지루한가?
나는 앞으로 다가올 한가한 시간을 기다리며 영원한 자유의 증거로 지루함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리고 효율과 관념의 소비를 넘어, 나만의 ‘우아한 낭비’를 즐기기 위한 준비를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