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의 목적, 그 순수함

- 김영하, <여행의 이유>

by eduist 이길재

최근 부산향토문화연구회가 주관한 대만 금문도(金門島) 답사를 다녀왔다. 지인들에게 대만 금문도로 답사(혹은 여행)를 간다고 했더니 열에 아홉은 되물었다. "뭐? 어디라고?" 그만큼 일반적인 대만 여행 코스와는 거리가 멀다. 이번 답사(혹은 여행) 중에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 중의 하나는, ‘여행’과 ‘답사’라는 두 단어 사이의 간격이었다.


보통의 여행이 일상에서의 탈출과 달콤한 휴식을 꿈꾸는 것이라면, 이번 여정은 분명한 주제를 가지고 현장을 확인하는 치열한 ‘답사(踏査)’였다. 철저한 사전 계획과 착오 없는 운영, 그리고 안전한 귀환이 답사의 1차적 목표다. 하지만, 사실 여행의 묘미는 조금 다른 곳에 있다. 시간이 흐른 뒤 술자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는 완벽하게 수행된 일정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에피소드와 낭패감이 동반되었던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영하가 정의한 여행기의 본질도 이와 닿아 있다. 그는 여행기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계획의 완수가 아니라, 뜻밖의 발견이 여행을 완성한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인류가 ‘여행(Travel)’이라는 이름으로 길을 나선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수만 년 전 수렵과 채집을 위한 이동은 생존의 수단이었지 여행은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목적 그 자체가 이동의 즐거움이나 호기심 충족인 여행의 기원을 고대 로마 제국 시기로 본다. 약 2,000년 전, ‘팍스 로마나’의 평화와 사통팔달 뚫린 도로망 덕분에 로마의 부유층은 여름이면 폼페이나 나폴리로 휴가(Vacatio)를 떠날 수 있었다. 이것이 생존과 무관한, 레저로서의 여행의 시초다.


이후 여행은 교육의 수단으로 진화했다. 17~18세기 영국 귀족 자제들은 배움과 교양의 완성을 위해 유럽 대륙을 순회하는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러, 토마스 쿡이 1841년 기차를 전세 내어 이동, 식사, 공연을 묶은 최초의 패키지 상품을 기획하면서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여행의 형태가 갖춰졌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여행은 막대한 비용은 물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영어 ‘Travel’의 어원이 고대 프랑스어 ‘Travail(고통, 고역)’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 영어에서도 ‘in travail’이 ‘산고로 몸부림치다’라는 뜻으로 쓰이듯, 여행의 본질에는 즐거움과 해방감 이면에 노동과 수고로움이 깔려 있다. 어쩌면 우리는 사서 고생을 하기 위해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고생스러운 길을 우리는 왜 자처하는가. 김영하 작가는 그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이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거머쥔 드문 작가인 그는, 감성보다는 탄탄한 논리로 우리의 막연한 답답함과 궁금증을 해소해 준다. 그에게 여행은 “기대와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은 것을 얻으며,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과정”이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집’이 주는 무게로부터 벗어난다. 집은 안식처이지만 동시에 기억의 저장고다. 가구의 흠집 하나, 작은 소품 하나에도 가족의 희로애락과 상처가 배어 있다. 반면 여행지의 호텔은 철저히 리셋(Reset)된 공간이다. 흐트러뜨려도 떠나면 그만이고, 돌아오면 언제나 새것처럼 정돈되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억의 굴레를 벗고 완전한 휴식을 얻는다.


하지만 이 ‘휴식’과 ‘의미’를 찾는 방식에서 세대 간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예전 스페인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을 때가 떠오른다. 성인이 된 자녀와의 여행이라 기대가 컸지만, 돌아올 때는 서로 마음이 불편해 “다신 같이 오나 봐라”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우리 5060세대 대부분이 겪어본 경험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여행’과 ‘답사’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5060세대에게 여행은 큰돈과 시간을 들인 특별한 이벤트, 즉 일종의 ‘답사’다. 본전 생각과 조급함에 이끌려 책에 나온 랜드마크를 찍어야 하고,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 자녀 세대에게 여행은 ‘이탈과 향유’다. 그들은 늦잠을 자고, 유적지 대신 예쁜 카페에서 멍을 때리며, 끊임없이 SNS와 구글링을 통해 맛집과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닌다. 부모 눈에는 모처럼의 가족여행에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아이가 섭섭하기도 하지만, 아이 입장에선 구글맵으로 길을 찾고 숙소를 예약하며 졸지에 ‘인솔 가이드’가 된 상황이 버겁다. 서로의 ‘여행의 이유’가 달랐던 셈이다.


앞서 그가 말했듯, 여행은 사회적 의무를 벗어던진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녀들이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낯선 곳에서 익명의 이방인이 되었을 때 느끼는 자유와 설렘을 사랑한다. 결국 그들의 방식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목적’이 달랐음을 인정한다. 그들에게 여행이 지우고 비워내는 과정이라면, 나에게 답사는 채우고 새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휴식과 이탈이 주는 여행의 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답사(踏査)’라는 이름의 치열한 여정을 고집한다. 답사는 글자 그대로 ‘현장을 밟아서 조사하는’ 행위다. 미리 문헌을 공부하고, 그 활자 속 지식을 현장에서 마주할 때 느끼는 전율. 나아가 파편적인 지식들이 연결되어 거대한 역사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경험은 단순한 관광이 줄 수 없는 지적 희열이다. 남들이 보기엔 사서 하는 고생일지라도, 그 고단함 속에서 내 세계가 한 뼘 더 넓어지는 것을 나는 분명히 느낀다.


호텔에 짐을 풀고 푹신한 침대에 눕는 안락함도 좋지만, 다음날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서둘러 역사의 현장 앞에 섰을 때의 설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기대와 다른 현실에 가끔은 실망을 하기도 하고, 계획이 틀어져 여기저기를 헤맬지라도, 그 과정에서 얻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은 미묘하게 또한 확실하게 삶의 행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단순한 구경’보다는 ‘앎을 향한 열정’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답사의 순수함이다. 다른 불순한 목적 없이 오직 알고자 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길을 나서는 마음. 그 마음이 살아있는 한, 나는 앞으로도 편안한 휴양지도 좋지만 이야기가 숨 쉬는 현장으로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나 자신을 업데이트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부산향토문화연구회 답사에 가면 나이가 많은 청춘들이 가득하다. 새벽부터 서둘러서 저녁 늦게까지 역사와 문화 현장을 직접 발로 걷고 자료를 읽고 확인하며 앎을 향한 열정을 불태운다.


복잡한 과거나 불안한 미래를 끊어내고, “지금 어디로 갈까?”, “무엇을 먹을까?”라는 오직 눈앞의 길과 현장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단순함, 그리고 사전 자료를 읽고 직접 현장에 가서 확인하고 새로움을 발견하는 즐거움, 그 힘으로 나의 삶을 조금 확장하려는 의지, 그 고단하지만 달콤한 몰입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계속해서 짐을 꾸리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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