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
누구나 한 번쯤 일기를 써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지금도 가끔 펜을 들지만, 온전히 한 권을 다 채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랍 속에는 몇 장 쓰다 만 노트가 여러 권이다. 앞부분만 빼곡하고 나머지는 하얀 여백으로 남겨진 것들이다. 지난 날짜 뒤에 이어서 쓰자니 내키지 않아 늘 새 노트를 사지만, 그 역시 앞부분만 열심히 채워진 채 서랍이나 책꽂이로 향하곤 한다.
가끔 서랍이나 책장 정리할 때 나오는 일기장을 들여다보면, 당시의 감정에 충실해 나열해 놓은 문장들에 낯이 뜨겁다. 아주 가끔은 '내가 이런 생각을 했나' 싶어 대견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감정, 심리, 욕망, 자기 연민, 신세 한탄, 비난, 막연한 계획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버릴까 하다가도 왠지 모를 아쉬움에 다시 서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 둔다.
일기와 관련해서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가 생각난다. 그는 일기를 단순히 감정을 드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도구로 보았다. 즉, 글쓰기는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확장하는 행위로 보았다.
나는 나의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는다. 현실은 나의 상상력의 밑천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내게 경이와 찬미를 자아낸다. -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 중에서
그는 '거울'과 '창문'의 비유로 이를 명확히 구분한다. '거울'을 보는 글쓰기인 내면일기(Journal intime)는 내밀한 감정과 고백, 심리적 갈등 등을 쏟아내다 자칫 자기애나 자기 비하에 빠져 세계와 단절되기 쉽다. 이에 반해, 외면일기(Journal extime)은 '바깥(외부 세계)을 향한 창문'을 여는 글쓰기이다. 날씨, 계절의 변화, 이웃, 사회적 사건, 풍경, 사물 등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경이로움을 기록한다. 즉, '나'라는 필터를 제거하고 존재하는 것(사물, 인간, 동물 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날씨를 기록하며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타인을 관찰하며 인간 존재에 대해 더욱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나의 삶을 보편적인 우주의 질서와 연결하는 것이 외면일기의 본질이다.
내가 투르니에를 만난 건 문학평론가인 김화영 교수 덕분이다. 알베르 카뮈 작품뿐만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를 비롯한 장 그르니에, 파트릭 모디아노 등 유수의 프랑스 작가들을 한국에 소개한 그는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마왕>,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뒷모습> 등을 번역했다. 이 책들을 통해 투르니에의 시각과 문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투르니에가 바라보는 현실과 우리가 뉴스로 접하는 '실제 현실'의 간극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대상은 같지만 이를 수용하는 태도나 해석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실제 현실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혼돈 그 자체다. 평화로운 일상 곁에 전쟁이 공존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세상임에도 소외와 굶주림은 여전하다. 또한, 현재의 세계 질서를 보면 정의가 무엇인지, 적과 아군의 경계도 모호하다.
이런 혼돈 속에서 투르니에가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현실도피일까? 짧은 소견으로는 뉴스의 사건사고, 질병의 고통과 늙음, 죽음에 대해 기록하면서 이에 대해 분노하기보다는 한 걸음 떨어져서 관조하려 했던 것 같다. 현실에 대해 감정을 섞기보다는 고통까지도 삶의 일부로 껴안으려는 태도를 견지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문득 지난번 에세이에서 정리했던 '인류학적 글쓰기'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글을 쓸 때, "나의 시선은 공정한가?", "내가 이해한 것이 전부인가?", "나의 글(말)이 타인을 대상화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자문하곤 했다. 투르니에의 글을 읽으면서 여기에 한 가지 바람을 더하고자 한다. 투르니에처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도,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글을 쓰고 싶다.
외면일기는 소설처럼 줄거리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작가의 사유와 관찰이 짧은 글로 제시되어 있어 어느 페이지든 펼쳐 읽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책이다.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서 내 시선을 붙잡은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Si vis vitam, para mortem(삶을 견디려거든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삶의 필요불가결한 요소인 죽음, 충만하고 온전한 삶은 그 스스로의 죽음을 내포한다. - 미셸 투르니에, 같은 책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말)
모순처럼 들릴지 모른다. 삶을 잘 살고 싶은데 죽음을 생각해야 하다니.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즉,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죽음을 외면하고 공포심을 가지면 모든 삶의 활력까지 함께 차단된다. 죽음이 있기에 현재의 시간이 소중하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의 사랑, 성취, 즐거움은 그 절박감도 사라지고 가치도 없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하루하루가 유일한 기회가 된다. 즉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번에 읽기보다는 늘 가까이 두고 읽고 생각하기에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쓸 당시 투르니에는 70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그는 늙음을 슬퍼하거나 감추지 않고 때론 건조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허리통증, 치아문제, 줄어드는 키 등 늙어감에 따라 모두가 경험하게 되는 현실이다. 이를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인다.
앞으로 나 역시 비켜가지 않을 그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창문을 열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 그 경이로움을 바라보고 싶다. 미셸 투르니에는 2016년 1월 18일 91세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