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베트남 학교에 다닌다고요? 학교 이름이 뭐예요?”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한국 국적만 가진 학생은 아이 한 명뿐인 학교거든요.”
“한국에서 인정이 되는 학교예요?”
“생긴 지 5년 정도밖에 안 되어서 아마 재외국민이 다니는 학교로 한국 교육부에 아직 등록이 안 됐을 거예요. 그래도 베트남 교육부에서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죠.”
“그럼 대학은 어떻게 하려고요?”
“대학이요? 이제 초등학교 들어갔는데요 뭘.”
“나중에 12년 특례 입학은 할 수 있어요?”
“대학이야 한국이든 어디든 본인이 가고 싶으면 나중에 어떻게든 가면 되죠.”
“등록 안된 베트남 학교에서 한국 대학 특례 전형 서류 떼려면 어려울 텐데……“
“복잡하지만 어쨌든 베트남에서 정식 인가받은 학교니까요. 고생스러워도 다 되긴 될 거예요.
“하긴 이제 2학년이니 얼른 알아보면 되겠네요.”
“아…… 저흰 아이가 대학 안 가고 싶다고 해도 괜찮아요. 본인 인생이니까요.”
“그래 뭐 그렇긴 한데, 하긴 요즘은 한국에서는 검정고시도 있고 뭐 그러니……”
아이의 대학과 진로에 대해 투철한 계획이 있는 이곳 한국 엄마들과의 대화는 늘 접점이 없는 수평선 같다. 그들의 계획에 자주 등장하는 ‘특례’는 1978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 주재원이나 국제기구 공무원, 연구원 등의 자녀를 위해 처음 만들었다는 대학 입시 전형인 ‘재외국민 특별 전형(재외국민 특례 전형)’의 준말이다. 여러 과정을 거쳐 현재는 ‘3년 특례(중고고 과정 해외이수자) 전형’과 ‘12년 특례(전 교육 과정 해외이수자) 전형’ 두 가지만 남았다. ‘12년 특례’는 말 그대로 초, 중, 고 모든 과정을 해외에 거주해야 지원 대상이 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 수가 많지 않고, 많은 재외국민 자녀들이 각 대학 총 입학 정원의 2%가 되는 ‘3년 특례’에 몰리고 있다. 그런데 이 ‘특례’가 주목받으면서 과거에는 아이만 혼자 3년간 해외 유학을 시키거나, 부모 중 한 명만 아이와 함께 유학을 가서 3년을 머물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현재는 ‘3년 특례 전형’을 위해서는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을 반드시 해외에서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과 함께 부모 둘 다 매년 2/3 이상 되는 기간을 해당 국가에서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었다. 그러고 나니 아빠의 베트남 파견 임기가 끝났지만 아이의 특례를 위해 부모가 다시 현지 채용 일자리를 구해서 남는 경우도 종종 보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특례전형에 필요한 기간을 채우기 위해 베트남으로 다시 들어오는 경우도 생겼다. 한마디로 ‘특례를 위한 거주’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하노이에는 학원이 드물었다. 그러나 요즘은 축구, 야구, 태권도, 발레, 수영, 테니스, 골프, 피아노, 기타, 댄스, 입시 미술 등 온갖 예체능 수업부터 모든 학과목과 입시 관련 학원, 과외가 넘쳐난다. 한국의 입시 과열과 사교육을 피해 베트남에 온 부모들은 이곳 한국 부모들의 학구열에 놀란다. 그리고 한국의 무상교육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한국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부터 들어가는 학비와 사교육비에 한번 더 놀란다. 부모의 회사에서 학비 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들도 많고 학비 외에 부담되는 사교육비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가성비 좋은 베트남의 사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베트남어를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과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영어나 한국어로 된 비싼 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으로의 대학 입시를 앞둔 아이들은 하노이의 특례 준비 학원을 다니다가 방학이 되면 부모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넘어가 서울 대치동의 특례 학원가를 찾기도 한다.
하노이에는 여전히 현지화가 되지 않는, 아니 현지화를 원치 않는 한인들이 많다. 다른 국가의 한인 사회와 비교하여 진출해 있는 한국 회사가 많다 보니 일정 기간 베트남에 주재하는 회사원 부모가 많다. 물론 경제적 취약 계층은 존재하지만 그 수가 비교적 적다. 그렇기에 자녀 양육을 위해 부모가 지원하는 경제적 수준도 평균적으로 다른 곳보다 높다. 다른 말로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하노이에서 해외 파견 혹은 해외 취업을 한 비슷한 수준의 30~40대 부모들이 가지는 교육에 대한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가서,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는 것!’ 이곳에 사는 한국 아이들에게 다양한 진로 교육이 부족한 것처럼 이곳의 한국 부모들이 경험한 삶과 행복의 기준도 그리 다양하진 않은 것 같다.
많은 부모들의 바람대로 한국의 특례 전형에 붙어서 한국의 대학에 가더라도 아이들의 한국 적응은 쉽지 않다. 한국에서 입시를 준비한 보통의 아이들보다 입시를 쉽게 치렀다는 인식 때문에 일명 ‘검머외(검은 머리 외국인) 전형’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상대적으로 가볍게 한국식 교육을 접해온 아이들은 대학에 와서 처음 만난 스파르타식 한국 교육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례’는 이곳에서 가장 큰 교육의 방향이 되어버렸다.
오늘 하루 각자의 마음 바구니에 어떤 마음을 담았는지 묻는 그림이 학교 곳곳에 붙여있다
아이의 인생을 일찍부터 설계한 엄마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난 참 게으르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였다. 같은 학년에 함께 재학 중인 한국 학생이 없거나 외국 국적의 아이를 별도로 관리해 주는 시스템이 없는 베트남 학교에 보낸다고 하면 한국 부모들 대부분이 놀랬다. 대체로 반응은 두 가지였다. 정말 무모하다고 보거나 용감무쌍하다고 보거나.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관심 속에서 고맙게도 만두는 학교에 잘 적응해 갔다. 8개월간의 온라인 수업 끝에 봉쇄령이 풀렸다. 다행히 1학년이 끝나기 전에 학교에 등교할 수 있게 된 만두는 1학년을 마칠 즈음, 친구들과 베트남어로 자유롭게 대화하고 베트남어 수업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잘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1학년이 끝나자 학교를 그만두는 반 친구들이 생겼다. 22명이었던 반 정원은 4명이 빠져 18명이 되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집들도 있었겠지만, 다른 학교와 비교해 여유로운 영어 학습 커리큘럼이 성에 차지 않았던 부모들이 아이를 더 공부를 더 많이 시키는 학교로 전학시킨 경우도 있는 듯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18명이 다시 2학년으로 올라갔고,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배정되었다. 많은 국가들처럼 베트남도 학년이 올라가면 담임 선생님만 바뀔 뿐 처음 만나게 된 학급의 친구들과 계속 같은 반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만두는 학교를 너무 좋아했다. 만두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과 하루 두 번이나 나오는 간식 시간이었다.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만두는 음식도 좋아했지만, 후다닥 먹고 남은 시간 친구들과 뛰노는 것도 좋아했다. 집에서 먹고 오느라 아침 급식 시간까지 함께 하지 못하는 걸 아쉬워했다. 축구, 배구, 농구, 수영을 배우는 체육 수업과 미술, 과학, 영어 수업도 좋아했다. 매일 오후에 있는 로봇 동아리와 배드민턴 동아리에서 3학년 형 누나들과 1학년 동생들을 만나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 학년이 모이는 합창 시간에 영화 ‘코코’의 주제가인 ‘Remember me’와 ‘퀸’의 노래 ‘We will rock you’를 화음 넣어서 부르는 것도, 독서 수업 시간 외에 도서관을 드나드는 일도 만두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2년째 같은 반인, 아니 5학년까지 계속 같은 반일 친구들과 햇볕 받으며 뛰어노는 운동장과 놀이터도, 학교 담벼락에 있는 망고 나무도, 긴 파마머리가 예쁜 여자 친구 마고 말고도 결혼을 하고 싶다는 여자 친구가 둘이나 더 있는 것도 만두에겐 큰 행복이었다. 만두는 가끔씩 교정에서 본인처럼 머리가 긴 형들을 만나면 기뻐했다. 특히 학교에서 자주 마주치는 3학년 '시원이 형'은 만두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고 아빠가 한국 사람인 시원이 형을 만나 한국어로 대화라도 한 날이면 만두는 집에 와서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그 이야기를 전했다. ‘하노이 한국 학교’에서 한 반에 절반 가까이 되는 한-베 가정 아이들은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만두에게 시원이 형은 학교에서 유일하게 한국말로 ‘안녕’하고 인사를 할 수 있는 고맙고 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입학 전 학교에선 모든 신입생에게 학교 상징인 바구니 모양의 도자기 연필꽂이를 선물로 주었다. 바구니는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하루에 하나씩의 행복을 담아가는 ‘마음 바구니(Xô tình cảm)’였다. 만두도 자신의 마음바구니에 매일 무언가를 담아 오는 듯 보였다. 학교는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온갖 축제와 행사에 진심이었고, 다양한 예체능과 사회 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교과목 선생님은 물론 교장 교감 선생님들, 행정 선생님들과 경비 아저씨들까지 늘 웃는 얼굴로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아이가 팔이 다쳐 깁스를 한 주말엔 교감 선생님이 직접 걱정 어린 안부 메시지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창가의 토토(Totto-chan bên cửa sổ)>라는 일본 어린이 소설을 필독서로 함께 읽었는데, 아이의 학교는 마치 그 책에 나오는 이상적인 대안학교 '도모에 학교'를 닮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필통, 연필, 지우개, 자, 만년필, 잉크, 매직, 화이트보드부터 교과서에 붙일 각자의 이름 스티커까지 수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세세하게 다 준비해 주었다. 덕분에 아이들끼리 개인 물건으로 경쟁하거나 눈치 볼 필요도 없었고, 아이 물건을 챙기느라 바쁜 부모가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부모인 나에게도 분명 좋은 학교였다.
2학년 1학기가 지난 뒤, 2학년 베트남 담임 선생님, 그리고 영어 선생님과의 1대 1 학부모 면담 시간이 돌아왔다. 학교의 넓은 강당에 들어서자 옆자리의 다른 상담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책상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었다. 그중 빈 책상 하나에 담임선생님과 내가 마주 앉았다. 만두와 같은 나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고 한여름에도 워커를 신는 멋쟁이 여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읽기, 쓰기, 독해, 작문 등 만두가 제출한 베트남어 중간고사 시험지를 내밀었다. 짧은 시간 훑어보느라 시험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스펠링이나 성조가 틀린 귀여운 실수들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 보시니 어떠세요?”
“이제 저보다는 베트남어를 잘하는 것 같은데, 다른 베트남 친구들에 비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모르겠네요.”
“하하하. 잘하고 있어요. 다 아는 문제인데 다시 확인하지 않아서 틀린 것도 있고, 다른 아이들처럼 스펠링이나 성조가 틀리는 것도 있고요. 아직 모르는 새로운 단어들은 다른 아이들도 어려워하는 거예요.”
“네. 수업은 잘 따라가나요?”
“그럼요. 여전히 질문도 많이 하고 발표도 많이 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 다행이에요. 2학년이 된 후로는 저도 모르는 단어가 많아서 숙제도 도와주기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이 녀석이 엄마 발음과 성조가 틀렸다고 하도 지적을 해서 혼자서 숙제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요? 혼자서 해보려는 건 좋은 일이죠. 할 수 있는 만큼 숙제를 하고 어려운 건 선생님이 학교에서 도울게요.”
“네. 감사합니다. 사실 저희는 아직 집에서는 공부를 하라고 하고 싶지 않은데, 베트남어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아니에요. 아직 2학년인데 집에서까지 더 공부할 필요는 없어요.”
“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 만두는 보통의 베트남 아이들이랑 똑같이 잘 자라고 있어요.”
‘베트남 아이들과 같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주책맞게 눈물이 흐를까 봐 서둘러 눈을 깜빡깜빡거렸는데 강당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내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반사되어 선생님께 들켰을 것만 같다. ‘잘하고 있구나’ 하는 아이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아이를 엄한 곳으로 내 몰고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스스로에 대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남편과 나는 베트남어 수업이 여전히 어렵지만 더 잘하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이 그저 고맙고, '만두가 베트남어 전교 꼴등으로 입학했는데 이 정도 따라가 주는 게 어디냐’며 마냥 뿌듯해하는 부모였다. 학교는 아이의 진학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아이가 순간순간 행복을 느끼며 성장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믿었지만, 작은 바람에도 그 믿음이 흔들거리는 부모이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흔들리든 말든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상담을 마치고 나가니 오후 간식을 먹고 식당에서 우르르 뛰어나오는 아이들이 모습이 보였다. 넓은 교정의 이곳저곳에 아이들이 내지르는 행복한 함성 소리가 퍼져나갔다. 내 마음 바구니에도 행복이 채워진 것만 같았다. 마침 하교시간이 되어 만두를 데리러 가니 오늘도 어김없이 ‘십 분만 더!’를 외친다. 나의 오케이 사인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두 옆에 있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만두랑 10분 더 놀 수 있데!!’ 신이 난 만두가 옆에 있던 친구를 등에 업고는 도서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토록 즐거워하는데 뭘 더 바라야 하나.
오늘 베트남어 시간에 날렸다는 연, 주말 동안 빨아오라는 낮잠 이불 주머니, 어딘가 마음 급하게 마구 벗어 놓은 신발들. 강당 밖에 놓인 아이들 물건을 보면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