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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탄 Oct 20. 2023

아이들이 없는 세상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험난했던 Covid-19 시절을 겪은 뒤 3년 만의 한국행. 한국 휴대폰 번호도, 한국 신용카드도 하나 없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서울에 오면 눈 뜨고도 코가 베일 것’이라며 미리 겁을 주었다. 이전에도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그 사이 바뀐 풍경에 놀라고 속도에 적응하느라 꽤나 애써야만 했는데 이번에는 3년 치가 한꺼번에 몰려올 거라 생각하니 출국일이 하루하루 가까워질수록 뭔지 모를 두려움이 커졌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와보니 키오스크나 현금을 받지 않는 카운터보다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드는 건 넘쳐나는 규범과 차가운 시선들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아이 동반 보호자’였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온 첫날부터 친정과 시댁의 고층 아파트에 머물던 만두는 어른들로부터 뛰지 말라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듣기 시작했다. 집 안은 물론 식당, 카페, 백화점, 동네 슈퍼, 지하철, 버스, 엘리베이터까지 ‘뛰지 마라, 큰 소리 내지 마라, 돌아다니지 마라, 얌전히 있어라’ 등 금지령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아이들은 마치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존재 같았다. 세상 모든 것에 궁금해하며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게 본업인 존재가 가만히만 있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번에도 만두는 한국에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2kg나 살이 올랐고, 나는 어느덧 아이에게 ‘발꿈치를 들고 걸으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해 왔던 행동들에 사사건건 제재를 당한 만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한국에선 그래야 한데.’라는 뭔가 부족한 설명뿐이었다. 문득 하노이가 그리워졌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6년 반의 인생을 베트남에서 보낸 만두 덕에 우리는 자연스레 베트남식 양육문화를 경험했다.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베트남에선 어딜 가든 아이들이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한 해 동안 한국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25만 명이 채 되지 않는데 반해 여전히 베트남에선 매해 100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나고 있다. 만두가 태어났을 때 우리가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는 길이가 800미터쯤 되는 산책로가 있었는데 산책로를 내려가면 무려 100여 명쯤 되는 미취학 아동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 반의 반의 반에게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나면 어느새 만두와 나의 하루가 지났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하고도 하루가 지난날, 저녁을 먹고 아이를 재울 채비를 하는데 ‘띵동’하고 벨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의 외시경으로 밖을 내다보니 어른과 아이들을 포함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머리를 모은 채 들뜬 표정으로 집안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여니 옹기종기 모여 있던 같은 층 이웃들이 거실에서 아빠에게 안겨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일제히 입을 모았다. ‘메리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라고 집집마다 돌면서 인사를 하고 여유가 되는 집들은 모여서 파티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귀여운 사람들 같으니라고. 당시 우리 층에는 총 11 가구가 살았는데 노부부가 사는 한 집과 싱가포르인 남성이 혼자 사는 원룸을 제외한 나머지 9 가구에는 모두 아이가 있었다. 만두와 같은 해에 태어난 갓난쟁이들만 해도 앞집 쌍둥이를 포함해 셋이나 더 있었고, 옆집의 듬직한 중학생 형아 누나까지 합하면 총 열일곱의 아이들이 한 층에 살고 있었다. 문을 열어 놓고 사는 주택 문화가 익숙한 베트남 사람들은 아파트에서도 현관문을 열고 지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그 옛날 주택가 마냥 아이들은 격의 없이 문이 열린 이웃집을 드나들었고 복도는 골목길이 되곤 했다. 저녁시간이 되면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복도에서 탱탱볼 축구를 했고 여자아이들은 삼삼오오 이 집 저 집 몰려다녔다. 만두가 걸음마를 할 무렵부터는 형아들 공놀이하는 틈에 기웃거리며 쫓아다니다가 볼보이를 맡기도 했고 선심 써준 형아 들 덕에 볼을 받아보기도 했다.


만두가 첫 돌을 맞은 날, 우리는 같은 층 이웃들에게 한국식으로 돌떡을 나누며 그 의미를 전했다. 그러자 이웃들이 먹을 것, 양말, 장난감 등 소소한 축하선물과 축하편지 등을 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저녁 늦도록 초인종이 울렸다. 이렇게 다정한 이웃들 덕분일까, 다행히도 우리는 이웃 간의 불편함이라든가 소음 문제로 인한 갈등 같은 건 겪지 않은 채 아파트 생활을 해왔다. 간혹 아이들의 복도 축구 시간이 만두의 밤잠 시간까지 이어질 때는 복도에 나가 아기가 잘 시간이라고 외치면 되었고, 이웃집 누군가 시끄러우면 누구네 아이가 또 우는구나, 누구네가 또 한바탕 혼나는구나, 누구네 손님들이 와서 잔치를 벌이는구나.. 하고 넘기면 될 일이었다.


같은 층에 돌린 돌떡. 저녁 늦도록 선물과 축하인사가 돌아왔다


아이의 첫 번째 아파트부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까지 다행히 우리는 아직까지 층간 소음 갈등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일주일에 2~3회 주어지는 외출증 없이는 아파트 밖을 나갈 수도 없었던, 그 험악했던 베트남의 Covid-19 봉쇄 시기엔 유치원이 문 닫아 갈 곳 없는 동네 꼬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우리 집에 모였다. 많게는  6명의 꼬마가 집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만 고맙게도 아랫집에서는 연락한 번 온 적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뛰어도 되는 걸까’ 싶어 아이들을 자제시키던 어느 날 밤, 아래층 아저씨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 긴장했지만 정작 아저씨의 방문 목적은 아래층 베란다에서 키워서 우리 집 베란다까지 올라온 덩굴을 빼달라는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직접 우리 집 베란다 난간에 걸려있던 덩굴을 빼고 돌아가려는 아저씨에게 ‘요즘 우리 집에 동네 꼬마들이 많이 와서 뛰어 논다고 시끄럽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내 등 뒤에 숨은 만두를 보더니 웃으며 답했다. 


"애들은 맨날 뛰어놀죠. 우리 애들도 요만할 때 엄청 뛰었어요. 괜찮아요."


베트남 사람들은 분명 목소리 데시벨이 한국 사람보다는 높다. 그리고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가끔씩 집안에서 가라오케를 부르기까지 하고, 주말이나 특별한 날에 단체 손님을 집에 초대해서 왁자지껄 먹고 마시는 걸 즐기고, 현관문이나 창문을 열고 생활하니 야외 소음에도 늘 노출이 되어 있다. 그러니 웬만한 소음에는 타격을 덜 받는 것 같다. 여전히 대가족이 모여 살고, 대부분의 집에 아이들이 있는 데다가, 이웃들이 교류할 일이 많은 공동체 문화가 남아있는 것 또한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데 도움을 줬을 것이다. 실제로 건물을 지을 때 한국처럼 중간재를 넣거나 단열을 위해 띄워놓은 공간 없이 벽돌에 시멘트 마감 하나로 이루어진 벽을 가진 대부분 베트남 아파트들이 오히려 울림통이 없어 층간소음에는 더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베트남엔 아이와 보호자를 배려한 식당 문화가 있다. 전통적인 퍼(Phở) 식당에서는 메뉴에는 없지만 ‘국수 많이 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건 ‘파 많이 주세요’, ‘양파 빼주세요’처럼 기호에 맞춰 요청하는 것이다. 이건 아이와 보호자뿐 아니라 누구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서 온 장치이지만 아이와 함께 식당을 찾은 보호자들에게는 자연스레 적용된다. 때문에 일요일 아침 어떤 식당에서든 부모의 양 많은 그릇에서 면과 국물을 덜어서 아이가 먹고 있는 장면을 테이블마다 쉽게 볼 수 있다. 그때 아이가 덜어먹는 작은 사발을 ‘밧꼰(bát con)’이라고 부르는데 ‘밧’은 그릇, ‘꼰’은 작다는 뜻이다. 아이와 함께 어느 식당에 가서 ‘밧꼰’을 요청해도 매번 비슷한 세트 구성이 나오는데, 아이가 덜어먹을 작은 사기그릇과 젓가락이나 포크, 그리고 음식을 자를 용도의 가위가 제공된다. 물론 한국의 식당들처럼 아이용 식기도 아니고 단순한 밥그릇과 가위이지만, 나는 이 명확한 세트 구성을 제공받을 때마다 내 음식을 아이에게 나눠 먹이는 거에 대한 정당성과 동시에 음식을 잘라줘야 하는 아이에 대한 배려를 느끼곤 했다. 하지만 요즘 하노이에 늘어나고 있는 프랜차이즈 쌀국수 식당에서는 양이 적고 고명이 적게 든 일명 ‘어린이 메뉴’도 생기기 시작했다.


만두가 더 어릴 적에는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이유식을 데워 달라고 부탁하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식사 예절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의 작은 소란 정도에는 모두가 너그러웠다. 덕분에 나는 밖에서 눈치 보거나 긴장하지 않은 채 만두에게 집에서와 같은 식사 습관을 일러줄 수 있었다. 가끔은 내가 만두를 보느라 밥을 못 먹으면 바쁘지 않은 식당 직원이 아이를 데려가 봐주기도 했고, 걸음마를 연습시켜 주기도 했다. 걷기 시작한 만두가 동네 단골 식당의 카운터나 주방 근처라도 기웃거리면 주방 직원들은 너도 나도 웃는 얼굴로 아이를 반겨줬다. 그 환대에 익숙해진 만두는 주방 앞을 수 없이 왔다 갔다 하며 고사리 손 가득 먹을 것을 얻어오곤 했다. 가게의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며 제단에 올렸던 과일이나 과자는 모두 아이들의 몫이었다. 그들의 친절과 배려가 결코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든 여자든 미혼의 청년이든 할머니, 할아버지든 베트남에선 모두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봐줬고 말을 걸어주고 예뻐해 주었다. 미숙한 아이와 그 보호자를 배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곳은 아직까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만두가 유독 일찍 일어났던 날은 유모차에 태워 이른 동네 마실을 나갔다. 아파트 근처의 아침 시장에 늦지 않게 가면 대나무 바구니 가득 따끈따끈한 찹쌀밥 ‘쏘이(Xôi)’를 담아 파는 노점 아주머니를 운 좋게 만날 수 있었다. 내 아침 식사로 만동(약 500원) 짜리 찹쌀밥 한 덩이를 주문하면 아주머니는 유모차에 앉아있는 아이를 지나치지 않고 챙겨 주셨다. 출근길 여성이 조금만 먹겠다며 오천동(약 250원) 짜리를 요청하면 눈치를 주던 아주머니였지만, 그만큼의 한주먹을 떼어 아이에게 주는 건 늘 아까워하시지 않았다. 잡기 쉽게 길게 꾹꾹 눌러주신 따듯한 찹쌀밥을 꼭 쥔 아이는 그 고소한 맛에 발을 연신 동동 굴러댔다.




어느덧 초등학생이 된 만두와 내가 자주 들르는 우리 집 근처의 커피숍은 동네 아이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만두의 하굣길 더위를 피해 잠시 들르면 사장님은 어른 손님에게 대하듯 만두에게도 반갑게 하루 일과를 물어주셨다. 바로 즙을 짜서 내어주는 새콤한 오렌지 주스 한잔과 달콤하고 시원한 코코넛 주스 한잔을 주문했다. 오렌지 주스를 원샷하고는 혼자 숙제를 해 나가던 아이가 멈칫했다. 바로, 베트남어로 '일력日曆'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태어나 일력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텅 빈 커피숍 한가운데 앉아 있는 카페 사장님이 눈에 들어왔다. 사장님은 Covid-19 때문에 1년 늦게 베트남에서 열리고 있는 2021 아세안 게임의 베트남 풋살 경기를 열심히 시청 중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제안대로 종이를 들고 일어서서는 당당하게 '추 어이(Chú ơi, 아저씨)'를 불렀고, 아이의 질문에 사장님은 벌떡 일어나 일력 비슷하게 생긴 메모지를 어디선가 찾아와서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성심성의껏 설명을 해 주셨다. 더위로 띵했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지는 장면이었다. 타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친정 찬스나 시댁 찬스 한번 쓸 수 없는 독박 육아였지만 돌이켜보면 나와 아이는 하노이에서 오다가다 만난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돌봄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에서 아이는 통제와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당연히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방문해서 말로만 듣던 ‘노키즈존’이라는 문구를 처음 보았다. 노키즈라니... 아이가 없이 어떻게 세상이 돌아갈까. 새로운 생명이 없이 어떻게 인류가 진화할까.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통해 어른들이 배울 기회를 빼앗는 무서운 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서울 지하철 역사 벽 한편에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만두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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