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는 총 2,845개의 학교가 있으며 그중 79%가 공립학교다. 공립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중엔 베트남어만 가르치는 베트남 사립학교, 이중 언어를 배우는 베트남 사립학교, 영어를 중심으로 배우는 베트남 사립학교, 그리고 이중언어를 배우는 국제학교와 영어 중심의 국제학교가 있다. 유치원을 졸업하기 1년 전부터 틈틈이 여러 학교를 둘러본 만두와 우리는 마침내 베트남어 65%, 영어 35% 비중의 교육 프로그램을 가진 베트남 사립 이중언어 학교를 선택했다.
우리 집에서 오토바이로 단 5분 거리에 있는 이 학교는 학구열 높은 다른 베트남 사립학교 분위기에 비해 비교적 학업 부담이 적고 아이들 하나하나의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인 듯했다. 학교의 입학 설명회에서도 학과 과정보다 다양한 활동과 교육 이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영어교육 욕심을 내는 몇 베트남 엄마들이 다른 학교와 비교하며 영어 커리큘럼에 대해 많은 질문을 했지만 학교는 묵묵히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 부모들이 아주 많이 몰린 근처의 아주 유명한 사립학교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학교는 개교한 지 5년이 갓 넘은 학교로 올해 처음으로 중등과정인 6학년이 생겼고, 그 아이들이 커서 9학년이 될 때를 대비한 고등과정이 준비 중에 있었다. 보통 사립학교를 열자마자 초, 중, 고 학생을 한꺼번에 다 받는 경우와 달리 중, 고등학생을 받을 큰 건물과 시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심내지 않고 초등학교부터 아이들을 천천히 키워 올리겠다는 학교의 생각이 맘에 들었다.
입학 몇 개월 전 간단한 입학 테스트를 봤다.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만두의 인생 첫 시험이었다. 만두는 베트남 친구들 가득한 몬테소리 유치원에서 영어로 수업을 했지만 파닉스 발음만 이해했을 뿐, 정작 테스트를 위한 알파벳은 읽고 쓸 줄 몰랐다. 몬테소리 수업의 특성이기도 했고, 나도 일부러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 테스트에서 'APPLE'을 쓸 수 있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만두는 느낌 가는 대로 ‘ABOL’이라 적었다. 학교에서는 그런 아이의 노력을 칭찬해 주었고 심지어 우수한 점수를 줬다. 문제는 베트남어 테스트였다. 유치원에서 베트남 선생님들과 베트남 친구들이 종종 쓰는 생활용어를 들어왔지만, 귀만 약간 틔였지 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문장으로 말하는 건 몰랐다. 만두는 베트남어 테스트에서 대답을 유창하게 하진 못했지만 동물, 색깔, 모양 등의 간단한 단어를 꽤 이해했던 모양이었다. 매일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 쉬운 베트남어 책도 함께 읽어주었는데 대부분 그 책 안에 있던 단어들이었다. 테스트를 보고 나온 선생님이 '생각보다 잘 알아듣네요.' 하면서 놀라움을 비췄다. 고맙게도 선생님들은 만두의 가능성을 봐주었다. 그러나 테스트를 마치고 나니 더 큰 걱정이 생겼다. 학교에 입학하면 당장 베트남어로 말하고 쓰고 읽는 것을 배우게 될 텐데 만두가 이렇게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괜찮을까? 교실 앞에 있던 인자한 인상의 교감 선생님께 걱정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웃으며 내 어깨에 작은 손을 올렸다.
“괜찮아요. 원래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에 오는 게 맞아요. 학교에서 천천히 다 배우게 될 거예요. 걱정 마세요.”
베트남 아이들이 가득한 학교에서도 만두는 드문 케이스의 학생이었다. 학생들 중 외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를 가진 이중국적 아이들이 몇 명 있었지만 모두 베트남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단일 국적의 외국인 학생은 만두가 유일했다. 집에서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는 건 만두뿐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노이에는 한국 국적의 아이들이 갈 수 있는 학교가 여럿 있었다. 먼저 초, 중, 고를 합쳐 2,000명 이상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하노이 한국 학교, 그리고 어디든 학교에서 한국 아이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다양한 국제학교들, 그리고 한국 아이들이 일정 수 다니고 있는 몇 개의 베트남 사립학교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 아이가 아무도 없는 베트남 사립학교에 보낸다니, 주변에선 아이를 베트남 학교에 맘 편히 보내도 될 정도로 부모의 베트남어 능력이 원어민 수준으로 훌륭하거나, 엄청나게 용기 있는 부모로 오해하곤 했다.
고백하자면 나보다 베트남 생활을 일찍 시작한 남편은 ‘귀만 트인’ 반 쪽짜리 베트남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2년 전 하노이 외곽 시골마을의 국제개발협력 현장에 뚝 떨어진 후 손짓발짓으로 열심히 축척해 온 나의 베트남어 실력은 물건을 잘못 보낸 판매자와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하며 시시비비를 가리거나, 길거리에서 만난 변태에게 시원하게 한 소리 하거나, 버릇없는 동네 꼬마의 잘못을 조곤조곤 일러주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생활 외국어 능력의 척도는 싸우거나 요구할 때 비로소 판가름된다고 생각하는 바, 나의 베트남어는 베트남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외국인 엄마의 베트남어 실력은 학교 선생님과의 상담에나 도움이 될 뿐, 실제 아이의 학교 생활 적응이나 학습을 도와주는 데 있어서는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먼저 입학서류부터 책임과 권리 등이 세세히 적혀있는 학부모용 안내 책자는 모두 낯선 한자식 용어들이 가득했다. 학교에서 미리 보내준 초등 1학년 베트남어 교과서는 회화 위주로 배워온 외국인이 보기에 매우 낯설었다. 오토바이나 베트남 시골 풍경, 소수민족 등이 나오는 삽화나 내용도 매우 이색적이지만, 무엇보다 1학년 과정 내내 발음을 배워야 한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때문에 매 단원마다 새로 배우는 단어들은 발음에 중점을 두면서 축약되거나, 평생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을 듯한 것들도 많았다. 외국인을 위한 베트남어를 배워온 엄마로서는 베트남 아이들을 위한 베트남어 교과서가 무척 버거워 보였다.
사실 나는 겁 많은 엄마였다. 그저 학교를 믿고 선생님을 믿고 무엇보다 내 아이를 믿고 싶었다. 뭐든 ‘나쁜 과정’이란 건 없다고 자위하며 이 소심함을 아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매일 다짐하고 괜찮은 척 용기를 내는 것뿐이었다. 내 작은 선택이 아이의 인생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른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밀려올 때면 내가 예전에 대안학교에서 잠시 일하며 만났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어떤 과정을 통과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각자 가진 내면의 힘으로 건강하게 자란 아이들. 할 놈은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안 할 놈은 어딜 보내도 그 모양 일거라 생각했다. 하다가 정 안되면 다른 교육 방식을 찾으면 되는데, 아이에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법을 먼저 알려주기는 싫었다.
'한국 아이'를 '베트남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한 데 있어서 부모의 베트남어 능력이나 용기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바로 ‘우리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혹은 혼자가 아니라는 ‘심리적 연결고리’였다. 만두의 입학서류를 써내려 가다가 ‘의료적 비상연락망’ 칸에 남편과 나 단둘만 쓰여있는 것을 보고는 덜컥 겁이 났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아이가 위급한 상황인데 부모가 전화를 못 받게 되는 상황이라면 어쩌나 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고민 끝에 늘 의지하는 베트남 동생 링에게 아이의 세 번째 비상연락망이 되어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다. 링에게 ‘언니, 영광이죠.’라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간단명료한 그 한마디로 추가된 비상연락망 한 줄이 우리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위안이 되었다.
11월 말 태생이라 고작 다섯 번의 생일을 치른 만두는 하노이의 한여름 무더위가 물러갈 즈음인 9월 초, 초등학생이 되었다. 물론 다시 시작된 Covid-19 봉쇄로 인해 입학식부터 기약 없는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비록 화면을 통해서였지만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과 부담임 선생님을 제외하고도 모든 과목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온라인 수업 첫 주는 저녁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 맞벌이를 하는 베트남 부모들을 고려한 조치인 듯했다. 이미 봉쇄로 인해 지난 8개월 중 유치원에 간 날을 다 합쳐도 두 달이 안되었다. 가정 보육에 익숙해진 나로서도 아이를 아침부터 깨우고 먹이고 컴퓨터 앞에 앉히는 일을 당장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됨과 동시에 베트남에서의 나의 삶은 확실히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이 컴퓨터로 마이크를 켜고 끄는 게 익숙해질 일주일 후부터 오전 수업이 시작되었고, 여전히 시간표는 뒤죽박죽이었지만 하루에 참여해야 하는 수업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감사하게도 학교에선 수업 차수가 가장 많은 베트남어 수업을 3개 모둠으로, 그다음 많은 영어 수업을 2개 모둠으로 나누어 온라인 수업을 진행했다. 덕분에 만두는 총 7명의 아이들이 있는 모둠 안에서 베트남어 수업을 듣게 되었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해도 환한 미소로 답해주시는 담임 선생님은 부끄럼도 많고 베트남어 말하기가 부족한 만두의 반응을 충분히 기다려 주시고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수업 인원이 적어진 온라인 수업의 덕을 본 것이다. 나는 이 참에 다시 베트남어를 공부하자는 생각으로 교과서를 하나 더 구입하여 만두의 책상 옆에 앉았다. 곁눈질로 보는 베트남 교육부의 베트남어 1학년 1학기 정규과정은 재밌기도 했지만 어려웠다. 지우개, 자, 분필, 보드마카, 직선, 곡선, 대각선, 귀뚜라미, 자고새, 이구아나, 뗏목, 둑길… 등 생전 써본 적 없는 베트남어 단어들이 가득했다. 나는 노트에 모르는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정리를 하고 아이가 물어보는 단어를 설명해 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트에 찾아야 할 단어들이 많아졌다. 아이도 모르는데 나까지 모른다는 생각에 벅차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제 배운 것조차 기억나지 않은 엄마와는 달리 여섯 살의 머리는 무엇이든 바로바로 흡수했다. 뭘 해도 칭찬을 해주시는 선생님 덕분인지 뭔지 모를 자신감만 늘어난 만두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늘 손을 들었다. 발표를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너무도 기특했으나 문제는 만두가 질문을 이해했든 아니든, 할 말이 생각났든 아니든 손을 먼저 들고 본다는 것이었다. 막상 선생님께 간택되었으나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만 한 적도 수 차례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어느 날은 번쩍 손을 들려는 아이의 손을 나도 모르게 잡아 내렸다. 화면에 내 얼굴이 비치치 않은지 확인을 한 후 만두에게 물었다.
“만두야, 선생님 말씀 이해했어? 뭐라고 대답할 거야?”
그러나 만두는 엄마의 중간 점검 따위는 쿨하게 거른 채 다시 손을 높이 들었다. 칭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발표 내용보다 손드는 거 자체에만 집중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선생님들은 답을 알던 모르던 뭔가 해보려고 손부터 들고 보는 만두의 모습을 예뻐해 주셨고, 앞뒤 안 맞는 말도 끝까지 경청해 주셨다. 수업시간에 친구들은 만두에게 한국어 인사를 묻기도 했고, 선생님은 한국의 예시를 물어봐 주시기도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거부감 없이 대해주는 것, 교사가 보통과 조금 다른 아이들을 더 신경 써 준다는 것, 학교가 차별 없이 아이를 흠뻑 받아준다는 것만으로도 만두는 충분히 훌륭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온라인 수업을 시작한 후 2개월 정도가 지나자 아이는 엄마 없이 혼자서 해보겠다고 선언을 했다. 나는 아이의 요구대로 방에서 나왔다. 나는 거실에 앉아 보이는 큰 창문으로 아이를 지켜봤다. 당장이라도 가서 지적을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학교에서 만두가 제일 처음으로 배운 베트남어 동요는 <우리들은 1학년(Chúng Em Là Học Sinh Lớp 1>이었다. 노래에는 ‘잉크가 묻지 않은 손(Tay không dây mực)’이 될 때까지 열심히 하자'라는 가사가 있었다. 나는 2학기가 돼서야 그 가사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 바른 글씨를 엄청 중요시하는 베트남어 교육 과정에서는 보통 초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 만년필을 사용해서 필기체를 쓰는 연습을 하는데, 평소에는 글자를 휘갈기던 만두도 이 시간만큼은 획 하나에 정말 온 힘을 다했다. 부드럽게 힘을 주었다 빼었다 할 정도의 운필력이 생기기까지 근 1년 동안 정말 노래가사처럼 만두의 손과 소매에는 잉크가 마를 날이 없었다. 베트남 공립학교처럼 흰 셔츠를 교복으로 입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다 쓰지 못한 걸 마저 다 쓰는 게 숙제였다. 수업시간에 후루룩 다 휘갈겨 버려서 금방 노트를 채워버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만두는 한 획 한 획에 아주 신중했다. 수업이 끝나고 남은 숙제를 시작하면 획 하나를 긋고는 바르지 않다며 속상해했다. 괜찮다고 달래서 다음 칸으로 넘어가면, 다시 동그라미를 그리다 말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똥... 똥그라미가 찌그러졌어!!!! 아아아아앙-"
만두의 손에서 만년필을 빼고 품에 안았다. 토닥토닥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내 마음도 두드렸다. 잠시 후 진정된 아이와 마주 보고 서로의 손뼉을 치며 우리만의 구호를 외쳤다. '틀려도 괜찮아- 다시 하면 돼! 못해도 괜찮아- 계속하면 돼!'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손뼉을 치다 보면 아이도 나도 웃음이 났다. 고작 열 개가 되지 않는 칸을 채우기 위해 아이는 매일 30분 이상씩 애를 썼다. 한 획을 그리고, 맘에 안 든다고 울고, 달래주고, 다시 한 획 쓰고, 다시 울고, 손뼉 치며 구호를 외치고를 반복에 반복.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였다면 이렇게 엄마에게 감정을 다 쏟아내지는 않았을 텐데... 몸에 사리가 쌓이는 것 같았다. 1학기 때 연필을 쓸 때는 반복된 지우개질로 종이 때가 벗겨졌었는데, 만년필을 쓰니 눈물에 번진 보라색 잉크자국이 곳곳에 남았다. '잘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위로나 '충분히 잘 쓴 거 같아'라는 칭찬이 먹히지 않는 만두에게 왜 이렇게 다시 쓰려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선생님한테 예쁘게 써서 보여주고 싶어..."
정말 잘 해내고 싶은 그 마음 때문에 이렇게나 온 힘을 다하고 있다니, 만두에게 안 예쁘게 써도 상관없다고 짜증을 냈던 게 미안해졌다. 아이를 믿고 응원해 주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노이의 봉쇄가 풀리며 곧 학교에 정상 등교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방금 온라인으로 베트남어 수업을 마친 아이가 마치 대단한 걸 생각해 냈다는 듯이 소리쳤다.
"엄마 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
"뭔데?"
"내가 크면 한국에 가서 아이들한테 베트남어를 가르쳐 줄 거야."
"와, 좋은 생각인데?"
"그지?"
"응, 한국에는 한국 아빠랑 베트남 엄마 사이에 태어났지만 베트남어를 잘 모르는 친구들도 많데. 만두가 그런 친구들한테도 베트남어를 가르쳐주면 참 좋겠다."
"그래? 나는 그럼 학교랑 유치원을 만들 거야. 형아들은 학교에 있고, 아가들은 공부 안 하고 돌봐주는 곳도 만들고. 우리 학교처럼 유치원이랑 학교랑 같이 있는 큰 걸로."
"정말 멋진 생각이다. 만두는 한국어도 하고 베트남어도 하고 영어도 하니까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럼 그 학교랑 유치원에는 한국말 아이, 베트남말 아이, 영어 아이 모두 다 올 수 있게 할 거야."
"와. 정말 멋지다. 만두 꿈이 하나 더 생겼네. 엄마가 응원할게..!"
한국인 부모 밑에서 자란 한국 아이를 베트남 학교에 보내기로 한 것은 단순히 베트남어를 학습하고 베트남 문화를 배우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이가 학교 생활을 통해 다양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랐다. 언어가 다른 친구와 소통하는 것, 글이 아닌 다른 도구로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새로 접하는 언어와 문화를 기존에 알던 것과 비교하는 것, ‘여자 같아’라고 말하는 보수적인 시선들 사이에서 홀로 당당히 머리를 기를 수 있는 사내아이가 되는 것, 축구를 잘하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장애가 있는 친구와 자연스레 어울리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마이너리티를 인정하고 소수자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 등 만두가 이런 것들을 접하고 익히게 된다면 우린 그게 이 세상 어느 학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베트남 학교의 학부모가 된 덕분에 베트남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며 헤매는 중인 지금, 내 아이를 처음 내려놓은 곳이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작점’ 이길 바라고 또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