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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탄 Apr 07. 2023

☮평화의 마음으로, 엄마 독립

만두의 첫 번째 사회생활

“아니, 아직도 유치원 안 보냈어?”


산책길에 마주친 이웃집 베트남 할머니가 또 잔소리를 했다. ‘아이 낳기 전에 무슨 일을 했냐’, ‘그때 월급을 얼마 받았냐’ 등등을 꼬치꼬치 캐묻던 그 할머니였다. 대충 얼버무려 답을 했더니, ‘20만 원이며 괜찮은 보모 한 명을 구할 수 있으니, 얼른 아이를 맡기고 나가서 그 돈을 벌어오라’며 남의 집 경제 사정까지 헤아려주던, 하노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오지라퍼 할머니였다. 할머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답을 했지만, 흡사 ‘베이비 페어’를 방불케 할 정도로 영유아가 많은 우리 아파트 1층 산책길에서 무려 두 돌이 넘은 아이를 혼자서 돌보고 있는 엄마는 정말 나 하나뿐이었다. 할리우드 스타처럼 옆구리 골반 뼈에 아이를 걸치게 안고 있거나, 한 손에 밥그릇을 한 손에 숟가락을 들고는 도망가는 아이 뒤를 쫓아다니고 있거나, 유모차를 탈출하려는 아이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보호자들은 대부분은 조부모이거나 고용된 보모 아주머니, 할머니들이었다. 오지라퍼 할머니의 말이 너무도 현실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이를 새로운 환경으로 내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아이와 단 둘만의 시간에 제법 익숙해진 탓에 나 자신에 대한 용기가 나지 않는 걸지도.


베트남 엄마들은 보통 출산 직전까지 일을 하다가 출산과 동시에 6개월간의 출산 휴가를 쓴 뒤, 아이가 생후 6개월이 넘으면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출산 휴가를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쓰다 돌아올 수 있으니, 사무실마다 임산부나 수유부가 있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다. 때문에 베트남엔 어디든 아기들이 넘쳐난다. 베트남의 출산율은 1989년 3.8명에서 2019년 2.1명으로 30년 새 30% 가까이 떨어졌고, 2022년 호찌민시는 1.39명으로 낮아지는 출산율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베트남에선 한 집에 두 자녀를 갖는 것이 보편적일 정도로 비교적 안정적인 출산율을 보이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 분유의 주요 수입국이 되었다.


외동아들 만두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타면 또 다른 오지라퍼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 다 키워놨으니 이제 편하겠네’, ‘빨리 하나 더 낳아’, ‘둘은 있어야 즐겁지'라는 할머니들의 공격에 나는 ‘지금도 충분해요’, ‘나이가 많아서 힘들어요’ 등의 나름의 방어를 펼쳐 보였다. 그러나 ‘나는 전쟁 통에도 애를 낳았네’, ‘나는 오십이 다되어 막내를 낳았네’ 하는 할머니들의 반복된 레퍼토리 앞에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빨리 문이 열리기만을 바랬다. 언제는 빨리 일하러 나가라더니, 이젠 아이를 더 낳으란다. 참 어렵다.


베트남은 주 노동인구인 15~65세가 전체의 69.3%이며, 14세 이하가 25.2%이다. 65세 이상의 고령은 고작 인구의 5.5%를 차지한다. 베트남이 이렇게 젊은 나라가 된 데는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지만 그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베트남 여성들은 경제 활동과 더불어 육아에, 가사 일에, 집집마다 여전히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제사와 가족 모임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슈퍼 맘들은 이런 수많은 역할을 하면서도 어떻게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을까? 베트남에선 아이를 일찍부터 다른 사람 손에 맡겨도 괜찮다는 사회 분위기가 한몫하는 것 같다. 조부모나 다른 가족들이 함께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가족 안에서 함께 돌볼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경우 아이가 조금 더 자랄 때까지 보모를 구하거나 법적으로 생후 3개월부터 보낼 수 있는 어린이 집 시스템을 이용할 수도 있다. 또한 정시에 퇴근하고 장을 보는 아빠들, 학교나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오는 아빠들을 흔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저녁 있는 삶’을 기반으로 한 노동 문화 역시 엄마들의 짐을 조금은 덜어준다.


베트남 사람들은 엄마가 된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서슴없이 물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 말고 내 직업이나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이건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도 당연하게 일을 지속하는 베트남 엄마들이 많아서 가능한 질문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싫은 상황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고급 오씽(Oshin Cao Cấp)’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그러면 베트남 사람들이 한바탕 크게 웃느라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싱(Oshin)’은 가난 때문에 다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게 된 7살 여자아이 ‘오싱’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오래된 일본 영화인데, 1994년에 베트남에도 소개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나는 만두와 함께한 지난 30개월을 돌아보며, 이제 그만 ‘고급 오씽’ 일을 접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만두를 맡아 줄 기관을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우리도 한국에 살았다면 부족한 돌봄 기관으로부터 선택을 받는 입장이 되었겠지만, 아이와 유치원이 차고 넘치는 나라 베트남에서 우리는 아이에게 맞는 기관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동네마다 있는 큼직한 시설의 베트남 공립 유치원, 길거리에서 고개를 들기만 하면 여럿 보이는 베트남 사립 유치원부터 베트남 식 몬테소리 유치원과 베트남 식 발도로프 유치원, 그리고 대부분 한국 아이들의 선택지인 한인타운에 위치한 한국 유치원들, 한국식 영어 유치원들, 그 외의 영어 유치원들, 국제학교 부설 유치원에다 새로 생기고 있는 온갖 다양한 유아 교육 프로그램들까지. 하노이에 엄청나게 다양한 영유아 교육시설이 늘어날 무렵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무한한 재능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몬테소리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쉽게도 베트남의 많은 몬테소리 유치원은 그 교육이념이 완전하게 자리 잡은 곳이 많지 않아 보였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인 어린이로 교육하는 건 맞으나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인지, 통일 국가의 영향인지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사상이 유아교육에도 조금은 스며들어 있었다. 결국 우리는 집에서 차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의 몬테소리 유치원을 선택했다. 미국 유학에서 몬테소리를 처음 만났고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몬테소리 유치원을 만들게 되었다는 베트남인 남자 원장은 우리 아파트에 사는 이웃이었다. 반별로 몬테소리 전문교사인 외국인 담임 선생님이 있고, 영어를 하는 베트남 부담임 선생님, 그리고 베트남어로 소통하는 베트남인 생활 보조 선생님들까지 한 반에는 4~5명의 교사가 있었다. 굳이 베트남에 살면서 한국식 교육과정을 따를 생각은 없었으나 영어교육을 하려는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단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외국인 몬테소리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칫하면 획일화될 수 있는 베트남 식 유아 교육의 한계를 보완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곳은 아이가 뛰놀 수 있는 공간도 넓었고, 한국 아이들이 다니는 그 어떤 유치원보다도 경제적인 부담도 적었다.


나는 만두와 함께 몇 달 전부터 날짜를 세가며 등원 준비를 했고, 틈틈이 여러 유치원을 다니며 체험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다시 만나>라는 그림책을 수없이 읽으며 엄마와 떨어졌다 다시 만나는 상상을 나눴다. 만두의 마지막 자유를 빙자해 둘이 오붓하게 여행도 다녀왔고, 등원 선물로 예쁜 배낭을 사줄까 고민하다가 결국 내 운동화와 배낭 하나를 샀다. 꽤 오랜만에 나를 위해 쓴 소비였다. 만두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이 가방을 메고 이 운동화를 신고 다시 씩씩하게 내 길을 걷기로 다짐을 했다. 그리고 늘 엄마 귀를 잡고 잠이 드는 만두를 위해 엄마 귀와 똑같은 크기의 ‘귀 인형’을 만들어 아이의 이불 가방 손잡이에 걸어주었다. 자, 이제 내게 남은 일은 불안과 의심을 숨긴 채 아이에게 무한한 응원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엄마 귀를 잡고 잠이 드는 아이를 위해 만들어 준 '엄마 귀 인형'




함께 유치원에 가서 몇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한 첫날, 잔뜩 긴장한 채로 교실에 들어간 만두는 남아공에서 온 노랑머리의 인상 좋은 제닌 선생님을 보곤 까무러칠 듯 울었다. 키가 큰 베트남인 ‘상 선생님’이 만두를 안았다. 베트남 얼굴과 베트남어 억양에 익숙한 건지, 상 선생님 품에 안긴 만두는 금세 진정되었다. 나는 만두에게 이야기를 하곤 교실 밖에서 기다렸고, 불안한 만두는 ‘교실에 있다가 엄마를 보러 나왔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첫날의 워밍업이 끝났다.


선생님과의 상담 후 다음날부터 만두를 바로 차에 태워 보내기로 결정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한 번쯤은 거쳐가야 할 과정이었고, ‘한국 유치원에서는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은 여기선 의미가 없었다. 내 아이를 맡아줄 선생님의 제안을 믿어보는 게 중요했다. 나는 아이를 처음 원에 보내는 초보 엄마였고, 선생님은 새로운 아이를 수없이 맞아본 전문가였다. 유독 말이 빨랐던 만두는 한국어로 자기표현을 아주 잘하는 아이였지만 유치원에서는 소용없었다. 엄마, 이모, 레미콘, 숟가락, 요구르트, 주세요, 감사합니다 등 아주 간단한 베트남어만 알 뿐 영어는 단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제닌 선생님의 몬테소리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지만, 나는 만두가 조금이나마 편하게 느끼는 언어로 먼저 베트남 선생님들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만두에게 베트남어로 유치원 생활에 필요한 말을 더 가르쳐줬다. 선생님, 물, 쉬, 응가.


다음 날 아침, 만두는 역시나 차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며 울어댔다. 내 품에 꼭 안겨 엄마랑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그나마 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은 게 너무 고마웠다. 다른 아이들이 차에 타는 사이, 나는 다시 마음을 굳게 다잡고 오늘 유치원에서 벌어질 하루 일과를 만두에게 말해줬다.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이랑 재미있는 놀이도 하고, 형아 누나들이랑 책도 보고, 맛있는 점심도 먹고, 낮잠도 자고, 일어나서 다시 간식 먹고 있으면 3시가 될 거야. 그때 엄마가 초콜릿 케이크 사가지고 짠 나타날게. 우리 오늘 축하파티 하자!’ 떨어지지 않으려 내 옷을 꽉 쥐고 있는 만두를 차량 선생님에게 넘겼다. 두 손을 엄마에게 뻗은 채로, 원망 섞인 눈빛으로, 엄마를 울부짖던 아이의 모습에 다잡고 있던 마음이 요동쳤다. 닫히는 차 문 사이로 ‘이따 3시에 데리러 갈게!’하고 여러 번 소리쳤다. 버스가 떠나자 가슴이 허해졌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방금 이별 통보를 받은 사람 마냥.


오후 3시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도 느리게 흘렀다. 선생님이 아이의 상태를 알려주신 메시지, 사진을 보고, 보고, 또 봤다. 울음을 그치고 잘 있다는 말에 마음이 편안해졌다가, 눈이 팅팅 불어 있는 사진에 다시 아려왔다. 잠자는데 엄마를 찾았다는 말에 철렁 내려앉았다가, 선생님 품에 안겨 사탕과 바나나를 양손에 쥐고 있는 모습에 다시 또 웃음이 났다. 그렇게 선생님 메시지를 붙잡으며 요동치는 반나절을 보냈다. 아이와 약속한 시간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왔다. 빵집에 들러 만두가 좋아할 초콜릿 케이크를 하나 사고 유치원 건물 1층에서 서성였다. 아이와 마주칠까 유치원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무더위에 초콜릿 케이크가 녹아버릴까 전전긍긍했다. 시간은 왜 이리 더디게만 가는지 속이 탔다. 결국 약속 시간 10분 전에 유치원 물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 교실 안을 들여다봤다. 상 선생님 옆에 딱 붙어있는 만두는 멍한 상태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얼마나 오랫동안 저러고 있었을까? 수업이 끝나자 나는 유리 창문으로 얼굴을 빼 꼼 내밀었다. 창 밖의 엄마를 발견한 만두가 울음을 터뜨린 채 전속력으로 뛰어와 내 품에 안겼다. 안도감, 미안함, 고마움, 뿌듯함, 걱정, 위로, 기쁨, 심지어 환희와 영광까지 하루 종일 오만 가지 감정을 느꼈을 아이와 내 가슴이 서로 맞닿았다.


따라 나온 상 선생님이 오늘 만두의 생활을 말해주었다. 차에서 조금 울다 그쳤고, 밥을 다 먹었고, 간식도 잘 먹었고, 잠들 때 엄마를 찾아 선생님이 곁에서 재워줬고, 자고 일어나 잠시 울었고, 쉬야 실수를 한번 했다고. 그러고 보니 등원할 때와 다른 바지를 입고 있었다. 실수한 바지는 봉지에 싸인 채로 아이의 가방에 대롱대롱 묶여 있었다. 만두는 베트남어로 ‘쉬’라고 말했다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선생님이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게다가 선생님은 한국 아이가 베트남어로 ‘쉬’라는 단어를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단다. 나는 만두가 필요한 말을 크게 표현할 수 있도록 베트남어 말하기를 조금 더 연습시켰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파요. 먹어요. 싫어요.… 등 만두가 할 줄 아는 말이 늘어날수록 내 위안도 커졌다.


오늘은 엄마랑 유치원 차를 타고 집에 가자고 하니 만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원차량을 타기 위해 아이들 사이에서 함께 줄을 서는데 가방이 엉덩이에 걸쳐있을 정도로 더 작은 베트남 동생이 아장아장 옆에 나타났다. 등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내가 아이에게 '집에 가자. 이제 엄마 만나러 가자.'라고 말해주자, 아이는 당장 울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내 말을 따라 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만두에게 '동생도 유치원이 처음이라 무서워하는 것 같아'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갑자기 만두가 옆으로 다가가 동생의 손을 잡았다.


"엄마, 내가 동생 손 꼭 잡아줄게. 동생은 엄마가 없으니까 무섭겠다."


그렇게 만두는 엄마가 아닌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차에 올랐다. 그리고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 집으로 가는 내내 그 동생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말없이 작게 포개진 두 손을 보면서 ‘아픔을 겪어본 사람이 더 잘 공감해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들이 새로운 곳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더 단단해지길, 아이가 온 우주였던 엄마들도 이제 그 아이를 믿고 기다리며 홀로서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더라도 공감과 위로를 나눌 줄 아는 아이들


첫 등원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자 만두는 울지 않고 유치원 차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엄마로서의 독립을 기념하며 잘 보이는 손가락에 조그맣게 ‘피스 마크☮’ 타투를 했다. 매일 오후 내 집에 돌아오는 이 귀한 존재를 ‘평화로운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며.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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