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독박 육아
하노이의 새해가 밝았다. 25개월 차, 11월생인 만두는 한국 나이로 네 살이 되었다. 베트남에선 2~3세라고 표현했다. 2세는 지났고, 3세는 아직 안 된 그 중간 어디쯤의 나이. 2세와 3세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하루하루 자라기에 바쁜 아이들에게 아주 알맞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도 이런 표현을 쓰면 어떨까. ‘오늘 내 나이는 서른넷에서 서른다섯 사이예요.’
며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 잠시 하노이로 여행을 온 친구는 참 좋은 날씨라며 저녁 바람을 즐겼지만, 두꺼운 겨울옷을 껴입은 나는 콧물을 훌쩍이는 아들내미의 작은 기침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지난 12월은 한 해 동안 만두가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지나갔던 유일한 달이었다. 나는 계속 뿌듯해하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감에 쉽사리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치 '이 달에는 왜 아프지 않지?'라고 말을 띄우면 '얼씨구나!' 하고 곧 만두가 아플 것만 같았다. 어느새 아이가 아프지 않다는 말은 금기어가 되었다. 남편이 눈치 없이 '어? 녀석 이달에 안 아팠네?'라고 말을 꺼냈을 땐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눈으로 레이저를 쏴댔다.
본격적인 겨울의 한가운데 들어온 하노이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기에 충분했다. 하노이에선 영상 10℃ 아래로 내려오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드물게 영상 7℃ 이하로 기온이 낮은 날이면 중학교까지 휴교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영상의 온도라고 해도 그만큼 정말 추웠다. 먼저 하노이의 높은 습도가 공기를 더 차게 만들었다. 40도가 훌쩍 넘는 긴 여름의 무더위를 버티기 위해 건물의 층고를 높이고 해가 잘 들지 않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도 한몫 더 했다. 단열재가 없는 얇은 시멘트 벽은 하노이의 겨울을 더 춥게 만들었다. 깡통 집이었던 우리 집을 하나하나 만들어 갈 때, '한국 온돌을 가져와서 마루 아래 깔자'던 남편의 말을 무시한 게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바닥 시공을 할 때가 겨울이었다면 당장 했을 것이다. 여름에는 감히 생각지 못했던 한국의 온돌이 겨울만 되면 그리워졌다. 오토바이를 탈 일이라도 생기면 두툼한 패딩에 털모자에, 장갑까지 끼었다. 예보 상의 기온은 영상 15 ℃ 였지만, 체감은 영하 15 ℃ 였다. 창 밖에 해가 뜨기라도 하면 잠시라도 해를 받기 위해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교차도 심했다. 어떤 날은 아침과 저녁엔 두툼한 겨울 외투를 껴입어야 했고, 낮에는 얇은 티 하나만 입고 다녀야 했다. 어제와 오늘의 최고기온이 10℃이상 나기도 했고, 기온이 25℃ 라는데도 막상 나가 보면 해가 없어 습하고 춥기도 했다. 어떤 날은 너무나도 습해서 방마다 제습기를 틀었는데도 눅눅한 옷을 입어야만 했고, 해가 뜨지 않아 빨래를 며칠 동안 걷지 못하는 일도 잦았다. 그런데 또 어떤 날은 너무 건조해서 가습기를 틀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어제는 그 건조함 덕분에 만두의 코가 더 막히고 기침 소리가 세졌다. 정말 '지랄'같은 날씨다.
그 지랄 같은 날씨와 만두의 컨디션 때문에 이틀 동안 집 안에만 있었더니 내가 먼저 지쳐버렸다. 아직 집 안에서도 충분히 하루 종일 떠들며 잘 놀 수 있는 만두에게 필요한 건 단 한 가지, 종일 대화 상대가 되어야 하는 '엄마'였다. 최근 들어 만두는 점점 더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요구를 쉬지 않고 해댔다. 내가 그 요구에 대충 응하거나 자신의 성에 차지 않았을 경우엔 더 집요해졌다. 종일.
만두가 장난감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엄마에게도 쳐보라고 했다. 나는 오랫동안 구석에 박혀있어서 먼지 쌓인 내 기타를 가져왔다.
"엄마는 이거 칠래. (딩가딩가딩-)"
"아니야. 시끄러워. 엄마 이거 하지 마."
"만두가 좋아하는 노래 쳐 줄까? ‘상어 가족’ 할까? ‘루돌프 노래’ 할까? (딩가딩가딩-)"
"아니야. 하지 마! 엄마는 이거 해."
만두는 다른 장난감을 나에게 내밀었다. 순간, 나는 괜한 반항심에 스트로크를 더 크게 쳤다.
"엄마!! 그거 하지 마!! 엄마는 이거 해야 해."
"만두, 왜 엄마 기타 못 치게 해? 엄마는 지금 기타 치고 싶어."
"아니야. 기타 재미없어. 이거 재밌어. 이거 해, 이거."
"아니야. 엄마는 기타 치는 거 재밌어. 사람마다 재밌는 게 달라. 엄마는 지금 이 기타 치고 싶으니까 만두가 잠깐만 기다려 줘."
괜한 오기로 내 할 말을 다 해 버렸지만, 나는 몇 마디 더 치지 못한 채 기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등 돌린 만두 뒤에서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을 했다.
"엄마도 기타 치고 싶은데... 엄마도 엄마 하고 싶은 거 하고 싶다고..."
잠시 후 장난감 자동차에 호랑이 인형을 태워 어딘가로 간다는데 만두 요 녀석이 꼬박꼬박 아빠 호랑이만 운전을 시켰다. 괜한 오기가 난 나는 '엄마 호랑이가 운전할래'라며 앞 좌석에 엄마 호랑이를 태웠다. 그러자 만두는 냉큼 엄마 호랑이를 차에서 빼내 뒤에 태웠다.
"아니야! 운전은 아빠가 하는 거야. 엄마는 운전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엄마도 운전할 수 있어. 엄마도 운전했었어!"
이 상황에 가장 놀란 건 나였다. 내 자동차 면허는 물론 장롱에 박힌 지 오래였지만, '엄마는 운전을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나는 괜스레 심통이 났다.
"엄마도 예전에 빠방 운전했었어. 만두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오토바이 운전도 했다고!"
나의 그 말에 만두가 '옳다구나' 하며 다른 장난감을 내밀었다.
"그래. 그럼 엄마는 이거 쎄마이(오토바이) 운전해. 빠방은 아빠가 운전할 거야."
꾀를 부리는 녀석의 반응에 나는 괜히 속이 탔다. 임신과 동시에 오토바이 운전을 못했고, 아이를 낳고 나선 ‘애 엄마인 내가 또 언제 오토바이를 타겠어.’하는 생각에 아끼던 그 오토바이를 팔아버리기까지 했었다. '너 때문에 운전 못하는 거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만두가 '아빠는 일하는 사람', '엄마는 자기와 노는 사람'으로 인지한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외출하는 건 자신에게 빵을 사 주기 위해 돈을 벌러 나가는 것'이고, '엄마가 외출하는 건 시장에 가는 것'이라는 만두의 생각도 알게 되었다. 기가 찼다. 순간 내가 아빠가 아니라 엄마인 게 정말로 억울해졌다.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주 양육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침대 맡에 놓인 <나쁜 페미니스트> 책이 눈에 들어왔다. 베트남에서 이렇게 살면서 만두에게 제대로 된 성인지 교육을 해 준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겠구나 싶었다. 남자, 여자를 구분 않고 '세상에는 성별과 무관한 다양한 역할의 사람들이 있다.'라고 일러주고 싶었지만, 정작 우리의 삶에서 나는 별수 없이 ‘바깥일을 하지 않는 엄마’여야 했고, 만두는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날 저녁, 우울을 넘어선 절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친정 찬스도 시댁 찬스도 없는 외로운 하노이의 독박 육아는 정말이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나 나갔다 올 거야. 만두랑 둘이 알아서 밥 먹어.' 라며 가출 신고를 했다. 싸한 분위기를 눈치챈 남편은 그러라고 했고, '엄마 어디가?' 하는 만두의 물음에 '아빠랑 놀고 있어. 엄마 가출해.'라고 답했다. 만두는 문을 나서는 나에게 천진하게 소리쳤다.
“응, 엄마 가출 다녀와.”
아직 해가 조금 남아있는 이른 저녁 시간, 큰소리치며 나왔건만 갈 데가 없었다. ‘어디 가서 따듯한 퍼(Phở)라도 한 그릇 먹어야지’ 싶어 동네 골목으로 들어섰다. ‘집 코앞에 있는 이 길을 나 혼자 이렇게 걸어 본 적이 언제였지?’, '여기에 이런 것도 생겼네.’, ‘이 집도 바뀌었구나.' 하며 평소에는 쌩쌩 달리는 오토바이와 차에 유모차가 치일까,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 걸릴까 신경 쓰며 바쁘게 스쳐 지났을 것들을 천천히 눈에 넣고 또 넣었다. 그러나 자주 가던 쌀국수 식당은 한창 저녁 장사 준비 중이었고 막상 혼자 식당에 들어가려니 어색함이 몰려왔다. 난 어디서든 혼자서 잘 먹는 사람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 나 혼자 음식을 먹어 본 것이 언제였더라?
오토바이를 타고 차가운 저녁 바람이라도 쐬면 좋겠지만 차마 멀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시간에 갑자기 지인들을 찾아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 시간여 동안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걸으며 방황을 했다. 평소 좋아하지만 못 먹었던 간식인 ‘째(Chè)’ 가게에서는 아직 메뉴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고, 베트남에서 생산된 온갖 수출용 브랜드 옷을 떼와서 파는 'Made in Vietnam' 가게에 들러 괜히 필요도 없는 만두의 옷을 들춰봤다. 맘에 드는 옷을 입어봤지만 내가 이거 입고 나갈 일이 뭐 있나 하는 생각에 제자리에 가져다 뒀다. 그리고 단골 유기농 가게에 가서 계획에 없던 장을 보고, 그 앞 노점 아주머니에게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을 샀다. 만두 말대로 이 엄마는 오늘도 외출해서 두 손 가득 무겁게 장만 보고야 말았다.
어느새 해가 졌고, 길가에 드문드문 노란빛의 가로등이 켜졌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둑어둑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가 아쉬워 가로등 아래 벤치에 앉았다. 마침 신생아 육아에 한창 힘들어하던 한국의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아무 연고 없는 동네에서 아이를 낳았고,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친구였다. 신랑에게 아이를 맡기고 밖에 나왔는데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어 눈물이 났다고 했다. 그 시간을 금방 지나온 나로서는 친구에게 ‘힘내라’는 말 밖에, '버티자'는 말 밖에 해줄 것이 없었다. 그건 친구에게 하는 말이자 여전히 그다음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태어났고 앞으로도 베트남에서 계속 자라날 만두이기에 당연히 베트남 친구들이 있는 유치원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게 조금만 더 내 품에 두면서 충분히 안정감을 느끼다 가게 하고 싶었다. 유독 잔병치례가 잦은 아이였기에 조금 더 큰 다음에 기관에 보내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내 상태를 보니 이제 만두의 첫 사회생활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나에게도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