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의 한국대사관에서 만두의 출생신고를 했다. 새로 만든 아이의 여권 번호 뒷자리에는 임시번호 '000000'이 적혀 있었다. 만두가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한국에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만두의 여권도 새로 만들고, 의료보험도 등록해 줘야 했다. 그러나 갑자기 만두에게 원인 모를 염증이 생겼다. 만두를 낳았던 그 병원에서 병원비 걱정을 하며 온갖 검사를 하느니 한국의 큰 병원을 가기로 했다. 계획했던 비행 일정을 조금 앞당겼다. 세상에 태어난 지 63일 차, 만두의 첫 번째 비행이었다.
나는 여권 사증란이 부족할 정도로 공항을 드나들었던 사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공항을 가는 게 너무 무서웠다. 부기가 덜 빠진 내 품에는 자기 목도 아직 잘 못 가누는, 심지어 아프기까지 한 아기가 안겨 있었다. 배웅 나온 남편을 등지고 출국장으로 들어서자니 앞으로 대기 시간을 포함한 약 일곱 시간 동안 이 작은 생명을 홀로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엄습해 왔다. 안고 있는 아기 무게와 빵빵한 배낭 무게가 합쳐져 내 어깨가 짓눌러졌다. 가방 속에는 기저귀, 분유, 젖병, 물 티슈, 가재수건, 속싸개와 겨울 외투 등이 아기 물건들이 꽉 차 있었다. 아이가 아프지 않고 비행을 잘 버텨줄까? 면역력이 약한 상태인데 여러 사람이 있는 공항이나 비행기 안이 아이에게 괜찮을까?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아기를 누구한테 맡겨야 하나? 난 밥이나 먹을 수 있을까? 아이들은 압력 때문에 귀가 아프다던데 계속 울고 보채진 않을까? 탑승 대기시간 동안 아이를 앉은 채 게이트 근처 의자에 앉아 오만 가지 걱정을 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많았던 내 비행 경험 중에 단 한 번도 어린 아기와 그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을 눈여겨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보니 다행히 내 주변엔 모두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한국인 여성들이었다. 항공사의 배려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나는 아이에게 마음 편히 젖을 먹였다. 젖을 주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파왔지만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아이를 안고 있느라 기내식은 입도 못 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본 것인지 통로 건너편의 한국 아주머니가 ‘걱정 말고 먹으라’며 아이를 잠시 받아주셨다. 시끄럽고 정신없는 비행기 안에서 만두는 낯선 아주머니 품에 안겨 눈 맞춤을 했다. 그릇에 코를 박은 채 서둘러 식사를 마치자 미리 신청해 놓은 비행기 설치 형 아기 바구니 ‘베시넷(Bassinet)’이 내 좌석 앞에 설치되었다.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온 만두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바닥에 등만 닿으면 훌러덩 잠에서 깨어 버리는 예민한 만두를 그냥 이렇게 계속 안고 재워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눈앞에 텅 빈 바구니를 보고 용기를 냈다. 들이마신 숨을 참고, 만두를 안은 팔에 힘을 가득 준 채 아주 조심스레 바구니 안에 아이를 눕혔다. 평상시와는 달리 비행기의 흔들림과 규칙적인 소음에 안정을 찾은 듯, 만두는 무려 3시간이 넘도록 계속 잠을 잤다. 이렇게 계속 잠만 자는 아이가 혹시 어디 아픈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연신 들여다보는데, 지나가던 사무장님이 그런 아이를 보며 한마디 건넸다.
”아기가 너무 잘 자네요. 비행을 아주 잘하는데요? 나중에 크면 여행 좀 하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함께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 아이를 잠시만 봐달라고 사무장님에게 부탁을 했다.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나는 나를 보며 건너편의 아주머니도 걱정 말라는 눈짓을 주었다. 곧이어 착륙 준비를 위한 안내 방송이 나오고 승무원이 베시넷을 걷어갔다. 베시넷에서 나온 아이는 내 품에 안겨 평온하게 잠이 깼다. 만두와의 첫 번째 비행이 무사히 끝났다.
나의 첫 번째 비행은 초등학교 때 아빠 친구네 가족들과 큰 맘먹고 비행기를 타고 갔던 부산 여행이었다. 이렇게 커다랗고 무거운 물체가 이렇게나 높이 날 수 있다니 신기했고, 하늘 위에서 바라본 구름은 너무 예뻤다. 부산 공항 착륙과 동시에 승객들은 박수를 쳤다. 두 번째 비행은 대학교 2학년 때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훌쩍 떠난 인도 여행이었다. 20대가 되어 본격적인 비행을 시작한 나와는 달리, 만두는 영 유아 시절부터 비행기를 제 집 드나들 듯 자주 탔다. 매년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방문했고, 베트남 국내에서도 많이 탔다. 베트남의 땅은 남북한 합친 것의 1.5배쯤 될 정도로 길지만, 반대로 도로 상황은 좋지 않아 비행기가 비교적 대중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큰 뒤로는 환경을 생각해서 다른 대중교통을 타는 것도 고민했지만 여전히 가장 편리하고, 빠르고, 무엇보다 값이 저렴한 비행기를 포기하기란 매번 쉽지 않았다.
만두와 함께하는 비행 경험이 많아지면서 나에겐 아이와 단둘이 비행기를 타는 여유와 노하우들이 생겼다. 어린아이와의 비행에서 정말 중요한 건 미리 너무 긴장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가 이 낯선 환경에서 더 예민해지는 건 당연했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기에 그 많은 감정을 울음이나 짜증으로 쏟아내는 것도 당연했다. 하늘 위 갇힌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아이들의 시야는 그리 넓지 않아서 다른 승객들까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옆에 있는 모든 어른 승객들의 과거이기도 했다. 나는 긴장하며 다른 승객들을 신경 쓸 에너지로 차라리 아이가 무얼 원하는지를 최대한 빨리 알아차리고 도와주려 했다. 물론 나도 엄마가 처음인지라 만두의 요구를 한 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땐 아이를 키워봤거나, 아이와 나를 안쓰럽게 보는 이들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고맙게 기꺼이 받아들였다. 만두와 나와 다른 승객들 모두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했다.
비행 전에도 최대한의 장치를 마련했다. 먼저 만두의 잠시간을 고려해서 비행시간을 정했다. 만두가 쪽쪽이만 물면 낮잠을 잘 자던 시기에는 낮 비행기를, 낮잠을 잘 때 꽤나 예민하던 시기에는 밤 비행기를 탔다. 하노이 공항 데스크에서 티켓팅을 할 때는 직원에게 오늘 좌석이 꽉 탔는지를 꼭 물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한국 아이처럼 생긴 만두의 얼굴을 빼 꼼 내밀게 하고 베트남어로 인사를 시켰다. 그러면 옆에 빈자리가 있는 제법 좋은 자리를 얻을 확률이 더 높아졌다. 높은 출산율의 나라 베트남의 공항에서는 언제나 만두 덕을 많이 봤다. 입국 심사나 출국 심사를 할 때는 만두를 데리고 사람이 적은 베트남 자국민들만 가는 창구나 ASEAN 가입국 창구 근처를 기웃거렸다. 고맙게도 내가 만난 모든 베트남 직원들은 배낭을 멘 채 어린아이와 함께 있는 한국인 엄마를 그 줄의 맨 앞에 세워주었다. 인천공항처럼 노약자에게 발급해 주는 퍼스트트랙 티켓이나 스티커는 없었지만 하노이 공항에서 '노약자를 먼저 줄 세우는 것'은 아직까지너무도당연한 일이었다.
하노이 공항에 수유실이 생기기 전 만두에게 젖 먹일 곳을 찾던 나에게 공항 직원들은 가까운 곳에 있는 아무 빈 의자를 가리켰다. 그곳에 앉을까 말까 고민하는 찰나, 건너편 식당 앞 대기 의자에 앉아 가슴을 드러낸 채 아이에게 편안하게 젖을 먹이고 있는 베트남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그 엄마가 웃었다. 맞다. 배고픈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건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수유실이 생기면서 어느새 수유실 밖에서 가슴을 드러내는 엄마들이 비문명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다정한 마음들이 오고 가는 베트남이지만 한국처럼 신식 시스템이 점점 늘어난다면 이곳에서도 그 마음들이 줄어들까? 당연한 게 당연해지지 않을까, 순간 겁이 났다.
이젠 더 이상 만두 찬스를 쓸 수 없다. 양보를 받기엔 만두가 너무 커진 데다가, 요즘 하노이 공항 수속장엔 외국에 다녀온 베트남 사람들과, 베트남을 여행하려는 외국인들로 인산인해
오랜만에 가는 한국행, 곧 두 번째 생일을 맞는 만두와는 이제 제법 대화가 통했다. 나는 만두와 일주일 내내 비행기와 관련된 그림책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책 속에 그려진 공항의 자세한 모습들을 보며 나는 만두에게 우리의 비행 순서를 여러 번이고 설명해 줬다.
“아빠 차를 타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표를 받고, 아빠랑 빠이빠이를 할 거야. 그리고 엑스레이 문을 지나가고 나면 ‘이제 비행기 타러 들어가도 돼요’ 라며 여권 종이에 도장을 쿵 찍어줄 거야. 공항 안에서 창밖에 주차되어 있는 비행기들을 구경하다가 시간이 되면 차례차례 줄을 서서 비행기를 탈 거야. 비행기 안에서는 안전벨트를 하고, 자리에 앉아 맛있는 밥이랑 간식도 먹을 거고. 그 의자에 누워 한숨 코 자고 나면 짜잔! 서울에 도착할 거야.”
다행히 만두는 놀이를 하듯 탑승 순서를 잘 따라왔다. 수속을 마친 뒤 나는 사람들이 적고 안전한 공간을 찾아 만두가 답답한 비행시간 이전까지 공항에서 자유롭게 헤집고 다닐 수 있도록 풀어줬다. 역시 아이를 쫓아다니는 데는 기동력 있는 배낭을 메고 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문제는 비행기 탑승 이후였다. 어른 기내식도 먹을 만큼 먹성 좋은 아이인데 퓌레(Puree)가 나와버린 것이다. 아마도 내가 키즈 메뉴 대신 영아식(Baby Meal)으로 잘못 신청한 모양이었다. 아파도 죽보다 밥을 찾아먹는 아이이니 역시나 씹히는 게 없는 퓌레에는 흥미가 없었다. 함께 나온 주스만 단 숨에 마셔버리고 실망한 만두에게 내 음식을 나눠줬다. 만두는 내 식판의 모닝 빵과 과일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는 간이 덜 된 내 밥 메뉴도 먹기 시작했다.
“만두야. 만두 음식이 잘못 나온 거 같아. 이따가 저기 지나다니는 이모들한테 남는 빵이 있는지 한번 물어볼까?”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다시 내 식판에 집중했다. 마침 승무원 한 명이 카트를 끌고 지나갔다. 그때 갑자기 만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를 보더니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빠앙~!! 빠앙~!!"
순간 민망함이 밀려왔지만, 다행히 이모는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장 카트로 뛰어갈 것 같은 만두의 흥분을 먼저 가라앉혀야겠다 싶은 생각에 반대편 통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두야, 저쪽에서 다른 ‘꼬(Cô, 이모)’가 오면 달라고 해야 할거 같아. 일단 이거 먼저 먹고 있어."
그때 반대 통로에서 지나가게 된 스튜어디스를 발견하게 된 만두가 눈을 반짝였다. 이번에는 일어나서 반대쪽으로 몸을 튼 후 짧은 팔을 높이 들었다.
"꼬~!! 반미!! 꼬~!! 반미!!"
의자 위로 빼꼼 나온 만두의 얼굴이 어찌나 진지한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 만두는 마치 의자를 넘어갈 기세로 카트의 빵을 향해 손을 쭈욱 뻗었다. 짧은 팔이 닿을 리가 만무했다. 고맙게도 꼬는 웃으면서 만두에게 빵을 하나 더 챙겨주었다. 만두는 입안 가득 빵을 물고는 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큰 비행기의 좌석이 거의 꽉 찬 듯 보였지만 감사하게도 내 좌, 우, 뒷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내 옆에 비어있는 두 개의 좌석에 얇은 담요를 하나를 깔고 한바탕 배부르게 먹은 만두를 눕혔다. 입에 쪽쪽이를 물리고, 허리를 숙여 만두가 잠잘 때 필요한 내 귀를 잡게 해 줬다. 챙이 넓은 모자를 씌우고 그 위에 얇은 스카프를 덮어 한낮 하늘의 조도를 낮춘 채로 토닥토닥 자장가를 속삭여줬다. 자지 않으려 눈꺼풀에 힘을 주고 애쓰던 아이가 어느새 스르르 눈을 감았다. 숙인 허리가 뻐근해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만두가 잠이 든 덕분에 자유를 누리며 편안하게 영화를 봤다. 집 밖에서 영화를 본 게 근 2년 만이었다. 두 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자 만두가 잠에서 깼다. 푹 잤고, 기저귀도 갈아서 기분이 좋아진 만두를 옆 좌석에 앉혔다.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오자 나는 손가락으로 비행기 모양을 만들어 팔걸이에 올려놓고 곧 있을 착륙 시뮬레이션을 보여줬다. 만두는 어수선한 기내의 소음 속에서 엄마의 작은 목소리에 더 집중을 했다.
“이건 비행기 날개고, 만두랑 엄마는 여기 안에 앉아 있지?”
”만두랑 엄마랑 여기 이떠.”
“응, 방금 기장아저씨가 ‘이제 비행기 내려갑니다~’하고 말했지? 이제 거의 다 온 거야.”
“뱅기 내려감다~ 했어?”
“응, 조금 있다가 비행기가 공항에 가까워지면 여기 아래에서 바퀴가 슈웅 나오지.”
“응, 바키가 튜웅 나와. 여기?”
“맞아. 그리고 길 위에서 바퀴가 덜컹덜컹 굴러가면 비행기가 천천히 멈출 거야.”
“응, 뱅기가 멈튜꺼야?”
“응, 그럼 만두랑 엄마랑 한국에 도착!”
“또! 또 해! 엄마, 또!”
앵무새 같은 만두와 소곤소곤 둘만의 이야기가 데 여섯 번 반복되었다. 목은 아팠지만 아이가 조용히 집중할 거리를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의 고도가 낮아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압력에 약한 아이의 귀가 뚫릴 수 있게 수시로 물을 먹였다. 곧이어 정말 슈웅 나온 바퀴로 덜컹덜컹 굴러가던 비행기가 인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우아, 비행기가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네.”
“한국에 도딱해따!”
“만두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잘 왔네. 만두야 고마워!”
“엄마, 고마워!!”
만두와 착륙 축하 인사를 나눈 뒤 ‘사람들이 다 나가고 제일 마지막에 천천히 내리는 거'라고 말해주고 있는데, 갑자기 건너편 앞자리에 있던 아저씨 한 명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아이고, 아가야. 너 몇 살이니? 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하니?”
그러자 사방에서 다른 얼굴들이 나와 한 마디씩 보탰다.
“그러게 몇 살이에요? 우리 손주도 요만한데 말을 엄청 잘하네!”
“아기가 울지도 않고 얌전히 비행기를 잘 타네요.”
만두도 나도 속닥속닥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방에 있던 모두가 귀를 쫑긋 하며 우리의 착륙 시뮬레이션을 들은 모양이었다. 올 초에 한국에 갈 때, 잠 시간을 놓쳐버린 만두가 밤 비행기에서 잠이 들지 못해 내내 칭얼거려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났다. 13킬로의 만두를 아기띠 안에 앉고 서서 잠을 재우는 데, 내가 팔걸이에 살짝 걸터앉기만 해도 기똥차게 잠에서 깨어버렸다. 결국 나는 만두가 깊은 잠에 들기까지 두 시간 동안 어두운 통로에 서서 쉬지 않고 몸을 흔들어야만 했었다. 그랬던 아기가 이제는 얌전히 비행을 한다며 칭찬을 받고 있었다. 아직 자기 나이도 숫자도 모르는 만두는 사람들의 관심에 그저 빵끗빵끗 웃었다.
언젠가부터 하노이 공항에 다양한 저가항공사들이 취항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좌석 간격이 좁지만 저렴한 저가 항공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비행기에서 베트남 엄마와 함께 아빠 나라에 가는 아이들을 종종 만났다. 어떤 아이는 내 뒤 자석을 발로 차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소리를 너무 크게 한 채 영상을 보기도 했다. 형제자매가 치고받고 싸우는 경우도 있었고, 뭐가 불편한지 내내 우는 아이도 있었다. 그런 아이를 마냥 내버려 두는 부모도 있었고, 그런 주변의 눈치를 보며 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부모도, 아니면 엄하게 혼내느라 아이에게 윽박을 지르는 부모들도 있었다. 어김없이 뒤 자리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어느 날, 역시나 그 상황에 난감해하고 있던 만두와 눈이 마주쳤다. '이번 비행에서는 요 뒷자리 동생들이 힘든가 보구나.’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비행 때마다 들고 다니는 사탕을 한 줌 꺼냈다. 만두가 좌석 틈 사이로 사탕을 내밀었고, 뒷자리에서 울고불고 싸우고 있던 동생들은 넙죽 사탕을 받았다. 앞자리에서 불편했던 우리 마음도, 뒷자리 아이와 엄마가 투닥거리던 소리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공항은 우리에게 놀이터였다. 비행이 없는 날에도 비행기를 보고 공항 구경을 하러 놀러 간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