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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탄 Oct 19. 2023

엄마의 땅, 하노이

'만두'의 출생

국토면적 70% 이상이 산으로 둘러 쌓인 한국을 ‘산의 나라’라고 부른다면, 베트남은 ‘물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은 한국처럼 삼면이 바다로 싸인 반도인 데다가, 동남아시아 내륙에서 가장 큰 강인 메콩강 하류가 바로 베트남 남부에 커다란 삼각지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도인 ‘하노이’를 한자로 풀면 '河內(하내)', 즉 ‘강 안의 도시’라는 뜻이다. 하노이엔 홍강을 포함한 총 9개의 강이 흐르고 있고, 현재 약 100여 개의 호수가 남아있다. 베트남이 ‘물의 나라’라면 하노이는 ‘물의 도시’인 셈이다.


물의 도시 하노이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음기가 강하다고 했다. 강한 음기 때문인지, 전통적인 모계사회의 영향인지, 아니면 길고 긴 전쟁을 겪으며 남편을 전쟁터로 내보내고는 육아와, 살림과, 농사일과 더불어 전쟁까지 참여했던 베트남 여성들의 역사 때문인지 베트남의 여성들에게선 뭔지 모를 생명력이 더 느껴진다. 특히나 목소리가 크고 더 호방한 성향의 북부 여성들을 만날 때면 더 그랬다. 하노이 곳곳에선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여성들이 가득했다. 어느 일터에서든 배가 부른 만삭의 직원이 있었고, 오토바이를 직접 몰고 다니는 임산부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런 기운들 때문일까, 난임으로 힘들어하던 지인들과 출산 계획에 없던 지인들이 하노이에 머무는 동안 연달아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어찌 보면 하노이는 ‘엄마의 땅’이기도 했다.




엄마의 땅에 살던 내 뱃속에도 어느덧 새 생명이 찾아왔다. 하노이에 새로 생긴 현대식 종합병원을 찾아 임신 확진을 받고 집 근처에 정기적으로 다닐 수 있는 산부인과를 찾았다. 그러던 중 남편의 전 직장 동료였던 응옥에게 반가운 연락이 왔다.


“언니, 저도 첫 아이를 가졌어요!! 저랑 검진소에 같이 다녀요.”


베트남의 지방에서는 아직도 마을 보건소에서 출산까지 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노이에서 출산을 할 수 있는 곳은 주로 큰 병원이다. 최근엔 비싸지만 좋은 시설을 갖춘 사립 종합병원들도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까진 저렴하고 역사가 있는 공립 병원을 찾는 산모들이 더 많다. 출산을 할 수 있는 공립 병원은 '하노이 중앙 산부인과 병원(Bệnh viện phụ sản Trung Ương)', '하노이 국립 산부인과 병원(Bệnh viên Phụ sản Hà Nội)’, '하동 종합 병원(Bệnh viện đa khoa Hà Đông)', '박마이 병원 산부인과(Khoa phụ sản ở bệnh viện Bạch Mai)', '우체국 병원(Bệnh viện Bưu Điện)', ‘군의 병원(Bệnh viện Quân Y)’ 등이 있는데, 넘쳐나는 산모의 수에 비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곳은 부족해 보인다. 베트남의 산과 의사는 몇 없는 공립 병원에 채용되기 어려울뿐더러 채용이 되더라도 공립병원에서만 일하는 걸로는 큰돈을 벌지 못한다. 때문에 따로 검진소를 개업하기도 하고, 공립병원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사립병원에 페이닥터로 일을 하며 돈을 버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노이의 많은 산모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동네에 있는 검진소를 주기적으로 다니며 태아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출산할 때가 되어서야 큰 병원에 간다. 하노이의 수많은 아이들이 같은 병원 출신이라니, 마치 ‘도시 정책에 의해 아이를 세상에 나오게 하는 공장’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베트남이 이렇게 아이를 숨풍숨풍 잘 낳게 하는 나라’라는 걸 인지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사실 한국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출산을 하겠다는 결정 한편에는 한국에 비해 열악한 베트남 의료 시스템에 대한 주변의 우려와 걱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산하는 산모가 없어 문을 닫는다는 한국의 지방 병원 산부인과 소식에 비하면 산모가 바글바글해서 의사의 경험이 차고 넘치는 베트남의 산과 병원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 나쁜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임신 동기 응옥의 제안 덕분에 나는 ‘베트남 도시형 산모’가 되었다. 응옥이 찾아온 유명한 검진소는 마침 우리 아파트의 바로 코 앞에 있었다. 골목에 들어가서 오토바이가 가득 주차된 작은 마당을 지나 4층짜리 일반 주택의 현관으로 들어갔다. 폭이 좁고 안으로 긴 평범한 베트남 식 건물에는 각 층별로 방이 두 개씩 있었고 접수실, 검진실, 측정실, 채혈실, 초음파실, 화장실 등등이 그 방마다 마련되어 있었다. 각 방문 앞에 놓여있는 파란 접이식 의자에는 순서를 기다리는 산모들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긴장한 남자들이 산모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간호사들의 안내에 따라 산모들은 나온 배를 잡으며 건물 중간에 있는 튼튼한 나무 계단을 통해 이 방, 저 방으로 쉼 없이 오르내렸다. 간호사의 호출을 듣고 초음파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 초음파 검사를 하고 있는 반대편 긴 의자에 다른 산모들이 주르륵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옆에 앉은 응옥에게 이 상황에 대해 물었다. 그런 나를 본 간호사들이 일제히 손가락을 입에 대고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마치 ‘쉬잇!! 감히 우리 선생님이 진찰하시는데!!’하고 나를 혼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잠자코 순서를 기다렸다가 침대에 누워 다른 산모들 보란 듯이 배를 깠다. 느닷없는 외국인 산모의 등장에 의사 선생님은 놀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초음파 검사를 진행했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문답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니 지이잉- 방 반대쪽에 있는 프린트에서 아기 성장 정보가 담긴 종이와 흑백 사진이 출력되었다. 한국은 출산 전까지 한두 번 찍을까 말까 하는 4D 입체 초음파 촬영을 이곳은 매달 갈 때마다 해줬다. 역시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베트남 사람들다웠다. 초음파 검진이 끝나면 간호사들과 아주 기본적인 검사와 상담을 했고, 가끔은 피를 뽑거나 소변 검사를 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만든 얇은 회색 종이의 산모수첩에는 오늘 진료한 내용들이 손글씨로 줄줄이 적혀있었다. 알아보기 힘든 필체나 알아듣기 힘든 어려운 의학 전문용어가 나올 땐 검진소 동기 응옥의 도움을 받았다. 물을 많이 먹기, 가벼운 운동을 하기, 영양제 먹기 등 숙제 가득한 알림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검진소의 유일한 외국인 산모이자 첫 아이를 이제야 가진, 서른두 살 '고령'의 산모였다. 어린 산모들을 따라 나도 열심히 숙제를 하기로 다짐했다. 베트남 시골마을에서 매일같이 ‘노처녀’ 소리를 듣던, 이제 고작 스물일곱이었던 옛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다.


12주 차가 되자 초음파를 봐주던 의사 선생님이 화면을 보며 ‘아기가 아빠를 닮았네요.’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전혀 눈치가 없던 나는 침대에 누워 있는 채로 물었다.


“선생님이 우리 신랑 얼굴을 어떻게 알아요?"


초음파 실에 숨죽이고 있던 모두가 크게 웃었다. 뱃속의 아기는 아들이었다. 몇 명의 베트남 지인들이 아들이라는 소식에 유독 더 기뻐하며 축하해 줬다. 딸만 낳아서 시집살이를 꽤나 했다던 이들이었다.


임신 확정 소식과 함께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지 말 것을 부탁했다. 나의 노랑 오토바이도 주차장에 박혀 먼지를 뒤집어쓴 지 오래였다. 아파트 앞에 늘 서있던 단골 오토바이 택시인 '쎄옴' 아저씨가 택시를 잡으려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입을 빼 죽 내밀며 물었다. 


“요새 왜 쎄옴 안 타고 택시만 타는데?”

“하하하. 저도 요즘 오토바이 못 타서 아쉬운데, 저 임신했다고 신랑이 택시 타고 다니래요.”

“응? 임신했는데 왜 오토바이를 못 타?”

“아…. 음.… 그러네요.”


대화하는 아저씨와 내 옆으로 배불뚝이 임산부가 오토바이를 몰고 쌩 지나갔다. 나는 그 후로 가끔씩 쎄옴을 탔다. 물론 남편에겐 말하지 않았다.


다른 엄마들처럼 부지런히 챙겨 먹지도 못했고, 별다른 태교를 하지도 않았지만 고맙게도 뱃속의 아가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아기의 머리 크기가 너무 커서 놀란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를 자꾸만 다시 찍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두상이 작은 베트남 아기들과 아빠를 닮아 머리와 얼굴이 유독 큰 한국 아기는 태아 때부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선생님도 나도 인정하기 시작했다. 출산을 앞두고 아기 옷, 젖병, 가재수건, 천 기저귀 등을 준비하고, 욕조와 젖병 소독기와 유축기 등을 차곡차곡 물려받았다. 요즘에서야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육아 용품들을 베트남에서도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외국 브랜드는커녕 질 좋고 안전한 육아 용품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아기 맞을 준비가 다 되어갈 때쯤, 출산 전에 베트남어 능력 시험을 봐두겠다는 결심을 했다. 시험 예정일의 딱 일주일 전에 등록을 해서 일주일간 바싹 공부를 했다. 간만의 공부보다 더 힘든 건 배가 땅겨서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불편한 책걸상에서 두 시간 반의 시험 시간을 어떻게 견뎌낼지, 새삼 출산 하루 전까지도 사무실에 앉아있는 베트남 임산부들이 엄청 대단해 보였다. 난위도가 제일 높은 베트남어 능력시험 C 등급 시험의 응시자는 나, 그리고 함께 간 지인까지 둘 뿐이었다. 먼지 쌓여있던 책을 모두 꺼내 벼락치기를 했건만 안타깝게도 공부했던 내용들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시험감독관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지인은 왠지 어려운 문제를 내려는 어린 감독관의 두 손을 꼭 잡고 ‘장유유서’의 눈빛을 쏘아댔다. 잘 먹힌 모양이었다. 나도 감독관에게 남산만 한 배를 어필했지만 임산부가 지천에 널린 ‘엄마의 땅’에서 이 정도의 임산부 베네핏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결국 두 명의 응시생 중에 지인은 ‘수석’, 나는 ‘차석’으로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다.


공립 병원에는 환자가 많이 몰리다 보니 경우에 따라 제대로 된 케어를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뒤로 별도의 돈을 더 낸 사람이 먼저 진료를 보거나 원하는 선생님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몇 년 전 공립 병원에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카트 위에 아이를 싣고 가다가 아이가 떨어져 사망한 사건도 알게 되었다. 베트남어로 의료 용어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도 걱정되었다. 나는 조금 더 안정된 시설에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아이를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처음 임신 확진을 받았던 한 국제 병원을 선택했다. 이름은 국제 병원이었지만 베트남 대기업에서 대부분 베트남 의사 선생님들을 고용해 운영하는 대형 병원이었다. 병원비는 비쌌지만 개인 분만실에서 가족 분만을 할 수 있었고, 자연 분만일 경우 바로 다음 날 퇴원해야 했지만 1인실 병실을 쓸 수도 있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베트남 통역 직원들도 낮 시간대에는 상주하고 있었다. 통역 직원은 내가 외국인 산모이니 동구권에서 온, 산부인과에서 유일한 외국인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받기를 원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냥 가장 아이를 많이 받아본 베트남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나의 새로운 여자 의사 선생님에게 검진소에서 받아 차곡차곡 모아 둔 기록들을 보여드렸다. 출산에 대한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웃으며 다 괜찮다고 말했다. 경험과 연륜이 느껴지는 그 말에서 나는 묘한 위안을 얻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온 뒤 의자에 대기하고 있는데, 통역 직원이 나에게 다가와 한국어로 속삭였다.


“운이 정말 좋으세요. 저 선생님은 얼마 전에 베트남에서 ‘최고 산부인과 의사 상’을 받으신 분이에요.”


요일 별로 다른 병원을 가기 때문에 이 병원에서는 만나기 힘든 선생님인데, 오늘 우연히 내가 진료를 보게 된 것이다. 문득 저 선생님이 다른 요일에 가는 공립 병원의 산모는 얼마의 진료비를 낼까 궁금해졌다. 여기보다는 싸겠지? 위안도 잠시 씁쓸함이 몰려왔다.




출산일을 일주일 정도 앞둔 11월의 어느 날, 새벽에 배가 사르르르 아파왔다. 설마 이게 출산 전의 신호인 가진통인가 싶었지만, 인터넷에서 본 무시무시한 후기에 비하면 너무도 참을 만했다. 근데 내가 원래 고통에 무딘 편이기도 하고, 잘 참는 편이기도 해서 이게 정말 가진통인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이 와버렸고, 나는 출산 전 마지막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아침 러시아워 시간의 고가도로는 차로 꽉 막혀 있었다. 휴대폰에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택시 안에 있는 한 시간 동안 드문드문 오는 진통 주기를 확인했다. 꽤나 규칙적이었다.


"4cm가 열렸네요. 바로 입원합시다!"


제 발로 씩씩하게 병원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고 진료를 봤는데, 선생님이 웃으며 바로 출산 준비를 시켰다. 오늘은 다른 의사 선생님이셨다. 그렇게 홀로 입원을 해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수속을 하고, 무통 주사를 맞았다. 무통 주사의 효과가 없는 산모들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큰 효과를 본 모양이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챙겨 올 물건을 차근차근 알려줬다. 남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금방 갈게. 긴장하지 말고 있어! 긴장하지 말고!"


웃는 얼굴로 남편을 맞이했다. 태연하게 한국의 가족들에게 연락도 하고, 사진도 남기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인 걸까, 남편은 애를 낳으러 누워 있는 산모에게 ‘시원한 커피를 한잔 마시겠냐’는 어이없는 질문을 했다. 남편의 긴장을 좀 풀 겸 혼자 마시고 오라고 했다. 잠시 후 의료진이 들어와 내진을 하더니 이제 자궁 문이 거의 다 열렸다고 했다. '이상하다. 나는 전혀 아프지 않은데, 갑자기 이 상태로 애를 낳아도 되는 건가?' 깊은 의문이 들었다. 간호사가 ‘남편이 어디 갔냐’고 물었지만 차마 ‘혼자 커피를 사 마시러 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요 앞에 나갔는데 금방 들어올 거’라 대답했다. 간호사는 '빨리 전화해서 보호자를 부르라'며 나를 재촉했다.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입원실은 순식간에 분만실이 되었다. 갑자기 옆방에서 다른 산모들의 괴성이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뛰어 들어온 남편의 손에는 자기가 먹던 아이스커피 한잔과 눈치 없이 얼음을 가득 채워 차갑게 가져온 내 음료 한잔이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남편에게 서 있을 위치를 지정해 주던 간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호흡법 아시죠?' 티브이에서나 보던 그 후후 하하 하는 그 호흡법? '아뇨. 모르는데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따라 해 봐요.' 나와 남편에게 한번 설명을 해주더니 바로 연습을 시켰다. 의료진의 준비가 거의 다 되자 슬슬 약한 진통이 올라왔다. 얼마간 몇 번에 걸쳐 힘을 주었을까,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내 몸속에 있던 것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핏기가 별로 묻지 않은 깨끗한 살덩어리가 내 가슴 위에 얹혔다. 하얗고 똥그란 얼굴에 가는 팔다리를 가진 존재가 미약하게 꿈틀댔다. 말랑한 마디마디가 유연하게 접혀 있는 것이 흐물흐물한 무척추동물 같았다. 존재와 나는 여전히 탯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놀란 남편이 멍하니 있다가 간호사가 주는 가위를 받아 들고는 탯줄을 잘랐다. 방금 전까지 내 뱃속에 있던 실체가 배 위에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새 생명을 만난 기쁨이나 안도보다는 순식간에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에 가까운 것이었다.


간호사들은 나에게서 조금 떨어진 침대로 아기를 데려가 이런저런 검사를 했다. 평균 남자 아기들보다 적은 2.8kg의 몸무게였고, 머리둘레도 생각보다 안 컸다. 남아있는 의료진이 내 뱃속에 남은 태반을 내보내게 하고 찢어진 자궁을 꿰매고 소독을 하는 등 사후 처치를 했다. 분명 아팠지만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간호사의 이런저런 베트남어 안내를 집중해서 듣고는 남편에게 한 마디씩 전달을 했다. '오늘 제일 늦게 입원했는데, 제일 먼저 아이를 낳았다'며 간호사에게 큰 칭찬도 들었다. 의료진의 일감을 덜어준 것 같아서 다행이었고, 한국인 산모의 힘을 보여준 것 같아서 왠지 뿌듯했다. 


엄마의 땅 하노이에서 그렇게 만두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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