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류의, 서사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종류의 게임은, 여러번 해봐야 진가를 느낄 수 있는게 아닐까하고 생각함. 한 번의 플레이를 통해 성립된 하나의 이야기로 끝내기엔 아쉬움. 다른 선택지를 택했더라면 어찌될지까지도 알 수 있어야 진짜 즐겼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닐까. 그리고 그러려면 회차플레이가 필요함. 회차마다 이런저런 다른 선택들을 하면서 이전의 결과와 비교해봐야만 차이를 느낄 수 있고 그래야 "다양한 선택에 따른 서로 사뭇 다른 결과들"을 즐길 수 있을테니까.
한편 서사에 빠져들기 위해서는 거기에 몰입해야함. 그리고 깊이 몰입하려면 내 본연의 모습 - 착하고 선량하고 남들을 배려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번영에 이버지하고자하는 다크어지 - 을 따라 선택지를 골라야 함. 캐릭터가 아닌 플레이어인 나의 캐릭터리스틱을 반영하는 선택을 할 때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따라서 부드럽게 게임 속 세계에 몰입이 됨. 적어도 나는 그러함.
그런데 다른 회차에 다른 서사를 보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하려하면 … 앞서와 같은 ‘자연스러운 선택에 의한 자연스러운 몰입’은 불가능함. 왜냐면 그건 1회차 때 이미 해봤고, 다른 선택의 결과를 보기 위해 하는 회차 플레이에서 같은 선택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임. 이건 즉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선택을 하긴 어려움. 인위적인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거임. 그 결정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게임의 다른 면모를 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음.
근데 이 과정이 매번 나의 몰입을 깨버림. 게임에 깊게 몰입하면 지금 내가 하는게 게임인지 세계인지를 잊어야만하는데, 자연스럽지 않은 - 내 본연의 성격과는 상반되는 -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마다 그것이 ‘본래 내가 계획한’ 것임을 계속해서 상기해야만하고, 그 과정에서 ‘지금 내가 게임을 하고 있음. 이 세계는 현실이 결코 아님’이 자꾸만 떠오르기 때문에.
이 게임이 갖는 가장 정순한 진수를 맛보려 노력하면 오히려 자꾸만 몰입이 파괴되어 제대로 서사를 즐길 수 없게 되다니 이거 되게 구조적으로 문제 있는거 아닌가? 이걸 피해서 ‘가장 정순한 진수’를 맛보려면 역시 메소드 연기 뿐인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내가 연기하기로 맘먹은 바로 그 캐릭터에 혼연일체가 되어서 아예 다른 생각을 하면 안되는 그런 … 바로 그 지점이 진정한 이 장르의 정수 또는 에센스. 게임만으로 완성되는 게임이 아닌 플레이어가 메소드 연기를 통해 임할 때에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게임과 플레이어의 상호작용이 그 모든 정점을 완성하는 바로 그 !!!
그게 아마도 진짜 TRPG를 즐기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겠지만, 그래서 거기까지도 재연하고 있는 BG3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로서는 거기까지 하면서 즐기기엔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말이야 … 오래전 TRPG를 시도했으나 금방 포기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가 또 다시 떠오름 … 나는 그런 종류의 연기를 할 수 있는, 또는 그걸 즐길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음. 누가 돈 주고 하라면 시도라도 하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