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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돌 Jan 13. 2023

종업원의 손톱 쪼가리가
커피잔에 달칵, 떨어지는 순간

일터에서 빠져나와 여행 가고 싶은 날, 커피숍 창가에 혼자 앉았다. 그날 마신 음료는 스트레이트 펀치 같은 쓴맛과 살짝 에두르는 듯한 고소미, 뒤끝에는 미세한 신맛이 어른거리는 드립 커피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감이라더니, 붉은 스포츠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기분이 이럴까 싶다.      


눈살을 찌푸려 창밖의 햇빛을 적절히 차단하고 잔 가장자리를 내 입술 사이에 기울였다가 내려놓고 다시 기울이곤 했다. 일은 그때쯤 발생했다. 커피가 바닥을 보이면서 잔 기울기가 내 인중과 거의 직각이 될 무렵, 윗입술에 뭔가 딱딱한 이물감이 걸렸다.  

    

뭐지? 다소 딱딱하고 날카롭게, 윗입술 안쪽을 쿡 찌르는 듯한 감촉에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혀끝을 놀렸다. 그 판국에도 이물질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던지, 혀 끝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밀어냈다. 말갛게 검은 커피 물색은 곧 바닥을 드러냈다. 그 바닥난 잉크빛 물에는 엉뚱한 곳에 찍힌 쉼표 같은 게 잔 바닥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나는 엄지와 집게를 깊이 넣어 그것을 집어 올렸다. 뭐야, 이거! 치솟아 오르는 불쾌감과 동시에 나의 시선은 카운터 쪽에 꽂혔다.       


카운터와 주방이 함께 있는 그곳에는 머리에 검은 천을 두른 청년과 아르바이트로 보이는 여직원이 주문을 받거나 비아이 잉 소리를 내는 음료기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워낙 실감 나지 않은 일이 발생한 탓인지 나는 망연히 그 정경을 바라보았다. 커피 속에서 손톱이 나올 수 있다니. 내가 이 불결한 음료를 마셨단 말이지. 순간적으로 원효 대사의 해골 물 설화까지 떠올랐다. 아, 이런!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몇 가지 생각이 발동 걸린 터보 엔진처럼 우웅, 일어났다.       

  

이 바보! 이미 벌어지고 만 일이잖아. 이 손톱이 저 직원들 것이라는 증거도 없어. 아마 저 직원들도 너만큼이나 믿기지 않을 걸! 무슨 수로도 저들을 설득시킬 자신도 없잖아. 저들 또한 할 수 없이 인정하면서도, 늙어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못할 거야. 게다가, 아무리 따져 묻고 화를 버럭버럭 내질러도 몸에 들어간 커피는 절대 몸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이미 벌어지고 만 일. 그리고…     

          

조물주도 돌이킬 수 없게 된 일이다. 그동안 나는 오랜만에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정도면 되지 않았나.      


보기에 따라서 바다를 가르는 카누처럼 생긴 그 손톱 쪼가리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놈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요것이 내 인생의 파도라면 얼마만 한 파도일까. 그래, 저 주방에 있는 두 사람 중 어느 누군가가 손님 없는 한가한 시간에 손톱을 깎았다 치자. 어느 순간 손톱깎이에 툭, 잘린 손톱 한 쪼가리가 허공으로 튀어올라 용케도 내가 마실 커피 잔 속에 달칵 떨어질 수도 있겠지.      


종업원의 손톱 쪼가리가 그 커피 잔에 달칵 떨어지는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돌이켜보니 그 시간 즈음, 나는 행정노조 위원장을 만나기 직전이거나 서로 마주 보고 앉아서 임금 피크제 따위의 협약에 관해 신경을 곤두세운 채 온갖 머리를 굴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말 한마디 날리면서도 상대 표정을 맹수처럼 예리하게 감지하고, 다음 말을 되씹으면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 표정을 지어야 하나 저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르고 굴리고 삼키고 뱉고 있었을 터였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그동안에 착착 준비되고 있었다. 초 단위의 계획을 세우고 극강 훈련으로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톱은 그의 몸에서 잘려 나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미구에 내 몸속에 들어올 커피 속 이물질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노조 위원장의 눈빛 따위를 염탐하고 있지 않았던가.          


살면서 불가피한 것이 이런 우연뿐이랴. 내가 여기에서 이런 일을 하는 동안 나의 다음 인연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준비되고 있음을. 이렇게 난해한 관계망을 어떻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탁자에 컵을 내려놓았다. 생각의 일렁임이 날카롭게 솟구쳤다가 철퍼덕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컵 안에 놓인 손톱 한 쪼가리가 일으켜 세운 생각의 파도가 보이는 듯했다. 몸을 안정시키고 호흡을 고요히 하면 어째, 그런 것들이 보인다. 어찌할 것인가. 체념도 보이고, 지나간 혐오도 보이고, 겨울 햇빛을 정겨워하는 마음도 보인다. 일터에서 빠져나와 혼자 커피숍 창가에 앉은 삶의 고단함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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