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고 투박해서 정겨운
잘해오던 일을 쉬고 안식년을 갖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겠다는 딸의 마음을 보듬어 주며 같이 떠나자 딸을 조르고, 시한부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치료를 거부하겠다는 딸의 의사를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 딸을 웃게 해 준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서른, 아홉’의 두 인물 차미조와 정찬영의 아버지 모습이다. 서른아홉, 삼십 대의 끝자락에 놓인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 속 등장하는 두 아버지의 모습은 따스하고 정겨운 데다 딸을 대하는 태도와 말까지 완벽해서 어딘가 모르게 간지러웠다. 비슷한 연배의 두 아버지와는 좀 다른, 서툴고 평범한 우리 아빠가 자연스레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너희들 어릴 때 밤새 우는 거 보면서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라고 하더라.”
우리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기 우는 소리에 예민해진 아빠가 엄마에게 농담처럼 자주 건넨 말이었을 텐데 엄마는 아직까지도 그 말이 마음에 남는지 꽤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자라 세상 밖에 나와서도 엄마 손을 타며 자라는 게 보통이니 본능과도 같이 작용하는 모성애와는 분명 다르겠지만, 당신 딸을 운다고 갖다 버리라니. 농담이라 해도 좀 지나쳤단 생각에 아빠에게 웃으며 서운함을 내비치곤 하는데 아빠는 그저 멋쩍게 웃으신다.
아빠는 표현이 직설적이고 강한 사람이라 우린 아빠에게 상처받는 일이 잦았다. 생각만큼 수능 성적이 좋지 않아 가고 싶던 대학에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속상함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할 때, 아빠는 내가 갈 수 있는 대학과 학과 리스트를 뽑아 놓은 봉투를 건네며 한마디 말을 얹었다. “독서실에서 자다 집에 못 올 정도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지.” 새벽 두 시가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나를 데리러 왔다가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어버린 내 등을 토닥인 그 손은 분명 조심스럽고 따뜻했는데, 아빠의 말은 차가워서 아팠다. 속상한 마음은 백번 이해하지만 하필 그때 굳이 그날 일을 꺼내 생채기를 내는 아빠가 야속해서 한동안 아빠가 준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미운 말과는 다르게 상세해서 친절하기까지 한 아빠의 마음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펑펑 울었다.
서른셋, 당시 결혼하기로 한 상대의 무례한 태도에 며칠을 끙끙 앓다가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그날, 그래도 결혼하면 다 살아진다고 설득하는 엄마 앞에서 실어증 걸린 사람마냥 가슴을 치는 나를 보고 아빠는 버럭 엄마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는 엄마 아빠가 결혼을 종용해서 이 사달이 난 것 같아 미안하다며 펑펑 목 놓아 우시는 아빠의 모습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서른아홉, 또 한 번 부모님 억장을 무너뜨릴 만한 결단을 내린 그날도 아빠는 되려 담대하게 말없이 다독다독 내 선택을 존중해 주셨다. 투박하고 서툴지만 그래서 더 따뜻한 게 부정(父情)이란 걸 아빠와 함께 나이 먹으며 체감한다. 열아홉, 서른셋, 그리고 서른아홉 매 순간 큰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빠는 한결같이 내 편이었다. 당신 딸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 내가 내린 부정의 정의였다.
요즘 들어 부쩍 아빠 품에 안겨 사랑스러운 미소로 아빠를 바라보는 딸을 설레는 얼굴로 바라보는 남편에게 아빠가 되어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우리 둘이 여유를 즐길 수 없다는 거 하나 빼곤 다 좋아.”
나에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그이기 때문에 기대감이 컸던 걸까. 그의 답은 평소와 다르게 군더더기 없이 투박했다. 아이를 낳아 일 년 가까이 키우면서 느껴온 수많은 감정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주체하기 어려운 나와 달리 이성적이고 편안한 남편을 보며 이래서 아빠는 엄마와 다른 건가 잠시 서운하기까지 했으나 중요하지 않았다. 핵심은 ‘다 좋다’는 마지막 말에 모두 담겨 있고 아빠 품에 안긴 아이의 편안한 미소만으로도 그의 부성애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남편이 어떤 아빠로 성장해 나갈지 기대되는 걸 보면 그는 이미 참 좋은 아빠임이 분명하다.
임신을 하고 열 달 동안 품고 출산해 일 년 가까이 아이를 키우며 엄마의 마음을 알아가는 요즘, 엄마와의 통화가 더 잦아졌다. 아빠의 소식은 엄마를 통해 전해 듣는 게 더 자연스러울 만큼 아빠와의 통화는 연례행사가 되어 가지만 연락할 핑계로 충분한 어버이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