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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eul Jan 15. 2024

독립은 쉽지 않았다.

1년 만에 다시 합가.

시작은 좋았다. 작지만 우리만의 보금자리가 생겼으니.

낡은 빌라여도 우린 안정감을 느끼며 시모와는 연을 완전히 끊었다.

아직도 그때 들었던 모욕적인 말들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고, 우리는 결국 인연을 정리하기로 했다.


빌라를 얻자마자 분가 준비는 빠르게 이어져 갔다. 발품을 팔아 저렴한 가전가구를 알아보고, 나는 그동안 아이와 친정에서 지냈다. 친정 부모님은 씁쓸해하면서도 우리의 분가를 막지 못했다. 특히 월세인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전세를 알아보라고 했지만 우리가 알아본 바로 단 천만 원으로 얻을 수 있는 전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기가 생겨서일까/? 친정의 도움은 절대로 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어려운 독립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우린 분명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설레는 마음을 가진 채 우리의 분가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셀렘은 잠시 독립 후 형편은 더 안 좋아졌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시댁에서 나가는 돈은 우리의 생활비가 전부였는데 지금은 집세, 관리비 등등 나가는 지출이 늘어났다. 거기다 아이는 한 명 키우는데 왜 이리 돈이 많이 드는지, 독립 전에는 식비도 많이 절감했었는데 독립하니 그것도 어려워졌다.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월급은 그대로였다. 설상가상 내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생리통도 심하고, 자궁이 약해서 조산기로도 고생은 했지만 생리통에, 배란통을 넘어서 이젠 안 아픈 날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아랫배와 골반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뜩이나 고달픈 인생에 또다시 악재가 끼었다. 설상가상 통증이 심해지면서 출산 후 겪었던 우울증이 다시 재발했다. 유명한 산부인과를 다 다녔지만 효과는 없었고, 결국은 대학병원을 세 곳을 전전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독립은 실패했다.  살아가면서 부족한 생활비를 결국 친정 부모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첫 번째 독립은 독립이 아닌 그냥 객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린 부모님의 도움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내 몸이 심각하게 나빠졌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을 한다고 크게 변하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나는 매일 이 고통 속에서 살 순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너무 아파서 센 진통제를 하루에 몇 번이나 삼켰지만, 효과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게 두 곳의 대학병원에서 두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몸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우리의 생활은 하루가 다르게 부족해졌다. 아직 출산 때의 빚이 있는데 이번 수술로 또다시 병원비를 지게 되었다. 아무리 실비를 받는다고 해도, 100% 환급은 아니기에 병원비에 대한 부담이 컸다. 그 와중에 신랑은 퇴근 후 아이를 픽업하고, 저녁을 차리고 내 병간호까지 하게 되었고, 나는 여전히 고통 속에서 낮과 밤을 지새웠다. 그나마 수술 후 약간의 거동이 가능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속으로 곪고 있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특히 정신과 치료는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복병을 가져다주었다. 단순 우울증으로만 알고 있던 나는 대학병원의 검사 끝에 우울증이 아닌 조울증으로 판명이 났고, 그 병은 생각보다 꽤 오래됐으며, 완치율이 낮다고 그랬다. 정신과는 실비 적용이 안되기에 나는 매번 3~5만 원의 진료비를 내고 진료를 받아야 했다. 거기에 교통비에 약 값까지… 그러다가 큰 검사를 받기라도 하면 또다시 몇십에서 몇 백이 나왔다. 그렇게 우리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거기에 경조사는 왜 이렇게 많은지, 현금이 없는 우리는 처음으로 마통(마이너스 통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빚은 늘어만 갔다.


삶은 고단했고 희망이 없어 보였다.

커가는 아이의 추억을 담아두지 못할 만큼 우린 벼랑 끝에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의 월세살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친정 부모님께서 합가를 제안했다.

처음엔 어렵게 독립한 생활을 접기엔 아쉬움이 많았지만 아이의 돌봄과 내 병의 심해짐에 결국 우린 친정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방 세 개짜리 30평대 아파트의 방 하나를 우리에게 내어준 부모님과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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