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천이다. 이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저승이다.
삼도천은 세 개의 여울이 굽이치고 있다. 첫 번째 여울을 지날 때면 사람들은 자신의 전생을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업보를 안고 이승으로 왔는지를 알게 된다. 두 번째 여울을 지나면 이승에서 행한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이승의 덕과 죄가 낱낱이 드러난다. 그리고 세 번째 여울은 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여울이다.
두 번째 여울을 건널 때였다. 젊은 차사는 배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한결같이 이승에서의 자신을 보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내가 왜 죽어야 해!”
어디서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은 처량한 하소연 같기도 하고, 분노의 절규 같기도 하였다. 차사가 깜짝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젊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차사는 그 여인을 진정시키려 사람을 헤치고 여인을 향해 갔다.
순간 여인이 삼도천으로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삼도천의 여울이 여인을 삼켜 버렸다. 차사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 이런. 골치 아프게 됐는데.”
뒤에서 보고 있던 노 차사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하였다.
“차사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어수선한 좌중을 진정시키고 차사가 노 차사에게 물었다.
“잡아 와야지.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나네. 세 번째 여울을 지나기 전에 이 배에서 도망치면 이승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원귀가 되지. 이승에서 풀지 못한 한을 가진 귀(鬼)들이 이런 일을 벌인단 말이야. 차사야! 네가 가서 원귀가 이승 사람들에게 해코지하기 전에 어서 잡아 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차사는 여인의 뒤를 따라 삼도천의 거센 물결 속으로 몸을 날렸다.
*
허승미는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운동시간은 아이가 잠든 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남편도 집에 있어 아이가 깨면 남편이 돌볼 수가 있어 안심하고 운동을 나올 수가 있었다.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다 보니 허승미는 몸이 점점 굳어감을 실감하였다.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녀는 육 개월 전부터는 밤에 한 시간씩 중랑천 변을 뛰기 시작했다. 허승미는 이 시간이 좋았다. 땀 흘려 운동하고 나면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허승미는 휴대폰의 떨림이 누군가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신호임을 알아차리고 뜀박질을 잠시 멈추고 둑방으로 오르는 계단에 앉아 신호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안부 인사가 화면에 문자로 나타났다. 그리고 고등학교 은사의 부고가 뒤를 이었다.
허승미는 잠시 화면을 골똘히 보며 추억을 되새겼다.
많은 영상이 허승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환한 웃음을 띤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옆에서 계집애 서너 명이 남자를 둘러싸고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하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남자가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가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그의 부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봄밤의 한기에 허승미는 옷깃을 곧추세우고 친구에게 함께 조문을 가자고 답장을 보냈다.
두 명의 남자가 허승미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남자들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에게서도 술 냄새가 났다. 한국 남자들은 으레 밤이면 술 냄새가 몸에서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족속들인가 보다 했다.
답장을 마치고 막 출발하려 했을 때다.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뒤에서 날아와 허승미의 입을 막고 굳센 팔뚝으로 목을 감쌌다. 허승미는 억센 힘에 이끌려 뒤로 넘어졌다.
연이어 또 한 사내가 허승미의 몸에 올라타 버둥거리는 팔과 다리를 제압했다. 숨이 막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허승미의 의식은 점점 흐려져 갔다.
허승미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이 죽은 장소에 와 있었다. 아직 동트기 전이다. 허승미는 수풀을 이리저리 헤치며 자기를 찾았다. 자신의 시신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있었다. 자기의 몸뚱이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그대로 썩어 지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허승미는 동트기를 기다렸다.
조금만 있으면 사람들이 운동하러 나올 것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지만 저기 멀리서 한 사내가 달려오고 있다. 허승미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사내를 향해 입김을 불었다.
사내는 바람도 없는 날에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언뜻 비치는 몸뚱이를 보았다. 사내는 이상한 기운을 느끼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악!”
수풀 속에 한 여인이 누워있었다. 사내는 놀란 가슴을 부여안은 채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내어 다이얼을 눌렀다. 신호음에 이어 여성의 음성이 휴대전화에서 나왔다.
“무엇을 도와....”
“여기 시체가 있다구.”
사내는 여성의 말을 끊고 휴대전화에 놀람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냈다.
*
새우는 자고 있었다. 허승미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목을 눌렀다. 그때마다 새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기는 했지만, 목숨에는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못하였다.
허승미는 새우의 꿈으로 들어갔다.
한 여인이 공중에서 새우를 내려다보고 있다. 충혈된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피가 새우의 얼굴을 적셨다. 새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피에 젖은 수의를 입은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새우의 몸과 수평을 이루고 공중에 뜬 채로 새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우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이 굳어 한 마디도 낼 수 없었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허승미가 온 힘을 다해 그를 눌렀다. 그녀는 새우의 몸속으로 조금씩 들어갔다. 새우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늘어져 갔다.
“원귀야, 썩 나와라!”
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벼락같은 그 소리에 허승미는 놀라 새우의 몸 밖으로 튕겨 나왔다.
차사였다. 차사는 허승미를 잡기 전에 새우부터 살폈다. 원귀에 의해 아직 명이 다하지 않은 사람이 죽으면 그 역시 명부의 세계에 혼란을 가져온다. 겨우 눈을 뜬 새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이다. 새우가 살았음을 확인한 차사는 허승미를 찾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틈에 달아난 것이었다.
며칠을 방 안에서 두려움에 떨던 새우가 집을 나섰다. 허승미는 새우의 뒤를 밟았다.
새우가 가물치를 찾아갔다. 새우는 가물치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가물치가 거부했다. 허승미는 둘의 대화를 듣고 가물치가 자신을 죽인 놈임을 알았다.
허승미가 가물치를 내려다보았다. 새우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덩치가 큰 놈이었다. 그의 굵은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그 팔뚝으로 목이 졸리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는 순간을 생각하니 또 가슴이 찢어지듯 숨이 막혔다.
이놈이 나를 죽인 놈이구나, 하는 생각에 당장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허승미는 가물치가 뒤에서 입을 막고 목을 조르는 바람에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죽어가면서 눈에 담은 얼굴은 새우였다. 그래서 이승에 다시 오자마자 새우를 찾았다.
허승미는 새우를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를 공포의 극한으로 몰아넣어 겁에 질린 새우가 공범자를 찾아가기를 바랐다. 새우는 허승미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허승미는 드디어 자신을 죽인 놈을 찾았다. 이제 새우는 이용 가치가 없다. 새우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허승미는 가물치의 옆에서 그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그를 죽여라, 죽여라.”
자수하기로 결심을 굳힌 새우가 가물치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향해 걸었다. 새우가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가물치가 재떨이로 새우의 뒷머리를 내리쳤다.
새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그의 뒷머리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허승미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저 녀석만 처리하면 된다.’
허승미는 가물치의 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차사가 가까이 있는 듯하였다. 잡히면 복수는 끝이다. 허승미는 가물치의 처리는 잠시 미루기로 하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
“아차, 내가 조금 늦었구나.”
차사였다.
피로 뒤범벅이 된 현장은 끔찍했다. 원귀가 직접 사람을 죽인 것 같지는 않았다. 원귀는 완력을 쓸 수 없다. 원한이 있는 사람을 조정하여 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하는 것이 원귀들이 행하는 흔한 복수의 방법이다. 그런데 이자는 머리에 타격을 입어 죽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에 의한 죽음이다.
차사는 살인의 현장을 정리하는 가물치를 주시했다. 그는 허둥대고 있었다. 왜 자기가 이런 일이 벌였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차사는 허승미가 가물치를 조정하여 살인을 유도했으리라 짐작했다.
그렇다면 복수의 다음 차례는 가물치가 될 것임은 명약관화했다. 차사는 가물치의 주변에서 허승미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살인 현장의 정리를 대충 끝낸 가물치가 방을 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복도를 걸어오는 두 남자를 발견하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가물치가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걸었다.
차사는 이 광경을 지켜보다가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또 다른 원귀가 보였다. 한지은이었다. 원귀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지은은 가물치의 팔을 잡아채려는 조 형사를 온 힘을 다해 밀쳐냈다. 조 형사가 튕겨 나갔다. 그 틈을 타 가물치는 계단을 뛰어 달아났다. 휘청이던 조 형사는 다시 중심을 잡고 가물치의 뒤를 쫓았다. 한지은도 그들을 뒤따랐다. 다시 조 형사가 가물치의 뒷덜미를 잡았을 때 한지은이 조 형사를 밀쳐냈다. 조 형사는 몸은 사정없이 휘청이다가 중심을 잃고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차사가 주위를 둘러봐도 한지은을 제어하는 다른 차사가 없었다. 차사의 인도를 받지 못하는 원혼들은 저승의 명부에 없는, 비명횡사한 원혼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도는 원귀가 되어 차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어떤 원귀는 이승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하여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원귀를 발견하여도 담당이 아닌 다른 차사가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 또한 저승의 법계를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차사가 한지은의 앞을 가로막고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아섰다. 이승 세계에 해코지를 하는 원귀는 차사를 두려워했다. 한지은은 차사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차사는 한지은을 뒤쫓지는 않았다.
한지은은 처음에는 이것이 나의 운명이려니 하며 조용히 자신을 저승으로 인도할 차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승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한지은을 괴롭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승에서 최후의 순간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조 형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조 형사가 아직 이승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조 형사를 저승으로 데려가는 것이 이승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
가물치를 찾았다. 그는 인천의 여관방에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누워있는 가물치는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가물치의 몸을 덮친 허승미는 힘을 주어 그의 목을 눌렀다. 이제는 끝이다.
“멈춰라, 원귀야!”
어디서 나타났는지 차사가 여인의 손을 낚아챘다.
“헉!”
목을 감쌌던 여인의 손이 풀리자 가물치가 숨을 토해냈다.
“안 돼!”
여인이 발버둥을 쳤으나 차사의 손은 여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만 됐다. 이승의 일은 이승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안 돼, 안 돼. 억울해서 안 돼.”
차사는 울부짖는 허승미의 몸에 올가미를 채우고 함께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조 형사와 박 형사가 여관방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넋이 나가 있는 가물치를 덮쳤다. 가물치는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어서 이 지옥 같은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는 듯했다.
조 형사와 박 형사가 가물치를 태우고 떠났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한 원귀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지은이었다.
한지은은 조 형사의 차를 뒤따랐다. 차가 속도를 높이자 한지은은 몸을 솟구쳐 차 앞으로 날아갔다. 한지은의 몸은 차 주위를 거세게 맴돌았다. 마치 쥐불놀이를 하듯 불꽃이 조 형사의 차를 휘감았다.
조 형사의 차는 심하게 흔들렸다. 흔들림을 주체하지 못한 차는 급기야는 바퀴가 공중으로 치솟더니 공중제비를 하듯 허공에서 두세 바퀴를 돌았다. 굉음과 함께 지상으로 떨어진 차는 폭발음과 함께 불길에 휩싸였다.
한지은이 불타는 차를 노려보며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왜 저 원귀의 행동은 말리지 않았나요?”
허승미가 물었다.
“그들의 업보다.”
차사가 말했다.
“내가 한을 푸는 것은 못하게 하면서 저 귀(鬼)가 하는 것은 왜 그대로 보고 있나요?”
“네가 죽은 것은 너의 업보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허승미는 말문이 막혔다.
나의 업보라니. 무슨 죽을 업을 저질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승의 업은 이승에서 풀어야 하는 법이다. 저승까지 가지고 가면 후생이 괴로워서 안 된다.”
조 형사와 가물치가 저승차사를 따라 길을 떠나는 것이 보였다.
“이제 우리도 가자. 많이 늦었다.”
차사가 허승미의 몸을 옥죄었던 오랏줄을 풀었다. 허승미는 힘없이 차사의 뒤를 따르면서 이승의 삶을 떠올렸다. 어떤 업으로 이런 죽음을 당했는지 진정으로 궁금했다.
*
문정도는 김희연을 버리고 허승미와 결혼을 했다. 김희연은 자신을 버린 문정도보다 그를 가로챈 허승미가 더 미웠다. 결혼식장에서 행복해하는 허승미를 보고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문정도와 김희연은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만난 그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한 연인이었다. 문정도가 직장 생활에 회의를 느껴 공무원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김희연은 직장을 다니며 문정도의 공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김희연이 아이를 가졌을 때 문정도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문정도 몰래 낙태 수술을 하고 혼자서 눈물을 삼켰다. 3년의 수험 생활 끝에 문정도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을 때에는 그보다 김희연이 더 기뻐했다.
김희연은 문정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사랑이 깊을수록 문정도와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이것이 집착이라는 것을 김희연은 알지 못했다.
문정도는 김희연의 사랑이, 아니 집착이 조금씩 부담이 되었다. 감시받는 기분이 들어 김희연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할 지경이 되었다. 이것이 김희연을 불안하게 하여 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이 무렵 문정도는 허승미를 만났다. 동창회에서였다. 허승미는 학창 시절에 비해 몰라보게 예뻤다. 동창들이 흩어지고 둘만 남아 술을 마셨다. 문정도가 무슨 말만 하면 술에 볼이 빨개진 허승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날 이후 문정도와 허승미의 만남은 잦아졌다. 문정도가 김희연에게 그만 만나자고 하였다. 김희연은 잘할 테니 제발 헤어지자는 말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문정도는 매몰차게 김희연의 말을 거절하고 뒤돌아섰다. 김희연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문정도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김희연은 식장의 한구석에서 문정도와 허승미를 지켜보았다. 김희연은 허승미의 자리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문정도는 김희연의 전부였다. 문정도는 김희연이 살아가야 할 이유였다. 의미를 잃은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었다. 그저 목숨을 유지해 가는 수족관의 생선처럼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쓸쓸한 자취방에서 김희연은 목숨을 끊었다.
*
가물치와 새우 앞을 김희연이 가로막았다.
“너희들의 이야기를 저 여자가 모두 들었어. 저 여자를 살려두면 너희들은 잡혀갈 거야. 살고 싶으면 저 여자를 죽여.”
김희연은 가물치와 새우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가물치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허승미가 앉아 있었다. 저 여자가 자신의 인생을 허물어뜨릴 것만 같았다. 가물치는 생각했다. 못해 본 일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살다가 인생을 끝낸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했다.
가물치는 아직도 휴대폰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허승미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뒤를 새우가 따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