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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녕 Mar 02. 2023

3. 임경선 - 가만히 부르는 이름

수진님, 왜 그런 선택을 했어요?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작가의 말까지 읽은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씩씩 대며 화가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고요한 얼굴을 가진 막장 드라마인가. 주인공 수진의 선택이 이해하기 어려워 그녀가 당장 내 눈앞에 있다면 '정신 차리라'며 붙들고 비난하고 싶다. 욕 하면서 보는 소설이란 이런 것일까.


주인공 수진은 서른여섯 살의 건축가이다. 근무하는 건축사무소의 대표 혁범과 2년째 열애 중이다. 속은 홍수가 넘쳤지만 겉은 건조한 도시의 흔한 직장인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녀의 곁에 '한솔'이라는 말간 얼굴을 한 정원사가 나타난다. 한솔은 수진에게 완벽한 사랑의 모양이란 무엇인지 보여준다. 항상 생각하고 배려하고 확신에 가득 찬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남자이다.



이메일 수신확인에서 빨갛게 ‘읽음’ 표시가 뜨면 심장이 빨리 뛰어요. 수신 확인 기능을 처음 만든 사람이 야속해지기도 했어요. 훗날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키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이렇게 괴로워하라고. 몇 번이고 괴로워하면서 자기 마음속을 깨달으라고 만든 것 같아요. - 101쪽, 수진에게 보내는 한솔의 메일



종종 사사로운 것들로부터 생긴 감정의 오해가 계속 발전해 나갈 때가 있다. 사사로운 엇갈림과 불안,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고집이 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주어, 치명적인 파국의 가능성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이 쌓아온 위화감이 선명해진다. 단순히 한 건만을 보면 갈등의 원인이 되지 않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가 되어 예전부터 납득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서로의 가슴속에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준다. 사소해서 서로 참고 마음속으로 억눌러오다가 어느 날 마침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남들에게 갈등의 이유를 설명하기 쉬운 것은 차라리 편하다. 누가 바람을 피웠다거나 폭력을 휘둘렀다거나. 하지만 사사로운 위화감을 남들은 이해해주지 못한다. 그만큼 혼자 더 괴롭고 외롭다. 그렇게 계속 안쪽 서랍에 깊숙이 밀어 넣어두게 된다. 더 이상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아 결국 터져 나올 때까지. - 132쪽, 수진이 혁범과의 만남에서 쌓인 위화감을 설명한다


한솔은 수진에게 문자와 메일로 꾸준히 사랑을 표현한다. 사실 수진은 이혼남이자 전 부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혁범과 만남을 이어가며 사사로운 불편함이 쌓여오고 있었다. 바람을 피우거나 때린 것도 아니지만 이 비정형의 위화감은 수진을 자주 괴롭혔다. 그러던 와중 수진만을 바라보는, 그녀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한솔의 어찌할 수 없는 밝음에 서서히 동화된다.


시간이 지나며 수진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먼저 한솔의 집에 가거나 크리스마스에 한솔이 있는 영국으로 덜컥 날아왔다. 이렇게 수진과 한솔의 낭만적인 러브스토리로 끝날 줄 알았다.


(책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지만 수진은 결국 혁범을 선택했고, 혁범과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았다. 왜?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수진의 어머니는 어릴 적 수진과 수진의 아버지를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수진이 혁범에게 이별을 고한 순간, 혁범의 얼굴에서 어릴 적 엄마를 잃어버린 수진의 얼굴이 있었다. 그 동정심과 안타까움 때문에 수진은 한솔을 매정하게 떠났다.


수진의 행동을 '양다리'나 '바람을 피웠다'라고 매도하고 싶지 않다. 차라리 한솔과 만나는 편이 수진의 정신건강에 좋았을 텐데 그녀는 복을 발로 차버렸다.


여자가 동정심으로 남자를 만나면 인생이 망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쉽게 풀리지 않는 연애나 결혼으로 마음이 답답할 때면 유튜브에서 연애 관련 영상을 찾아보았다. '이런 남자랑 연애하면 인생 망한다'라는 자극적인 썸네일에 꽂혔는데 다들 어쩌면 편견에 잔뜩 절여진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런 류의 영상에 나오는 사람은 평범한 일반인이다. 면허증이나 어떤 스펙도 없고 그저 맛깔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이상하게도 그 말을 믿게 된다. 내가 '비정상'인가, 내 인생이 망했나 싶은 불안한 마음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하고 아무 말이나 흡수해 버린다.


수진의 결정을 보면서 그 영상에서 비난하던 여자들이 생각났다. 그저 불쌍해서 나쁜 남자를 놓지 못하고 끝끝내 결혼하고 결국은 이혼할 수밖에 없던 그녀들, 그녀들의 안타까운 삶이 마치 수진의 미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도 수진이 혁범과 좋은 가정을 꾸리며 잘 살기 바라겠지만, 과연 그 선택이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생긋한 수진의 아들에게서, 한솔의 얼굴이 겹쳐 보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 차마 한솔에게 다 내어주지 못한 마음을 쏟아부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이 그녀에게 축복일까 벌일까.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그런가? 어쩌면 그 호의들조차도 참고 견뎌내야만 했던 것들에 불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수진은 불현듯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무슨 가치가 있었을까. 결국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자신이 스스로를 몰아세워 본래의 나를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은 것이 아닌가. 타인에게나 ‘좋은’ 사람이었지, 스스로에겐 조금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나에게 잘해주는 어른들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했다. 알고 보면 그건 전부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니까 내가 공손하게 굴었다. 내가 칭찬받고 싶으니까 애써 씩씩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 어떤 모난 모습도 보이지 않고,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참은 것도, 실은 모두 무언가를 대가로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했을 뿐이다. - 123페이지,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수진의 어린 시절 모습


왜 그녀는 '늘 좋은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했다'는 자기반성을 한솔과의 이별에서 실현해 버린 걸까. 버려진 한솔이 안타깝고 수진이 밉다.




*이 책은 성동구립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9회말 책아웃은 2023년에 꾸준히 연재하는 저만의 책 읽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은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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