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한 끼 (2)
삶이 만만하지 않다지만, 때때로 이럴 수 있나 싶은 '머피의 법칙'같은 날이 있다.
아침부터 300유로가 넘는 청구서가 날아오고, 잘 타고 있던 자전거 바퀴에 갑자기 바람이 빠지고, 친구와는 별일 아닌 일로 언쟁이 벌어지는 날. 끓어오르는 속을 부여잡고, 간신히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부대찌개'를 꼭 먹어야겠다 생각하면서.
열은 열로 다스려야 하는 날이 있다. 그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로지 얼큰한 '국물'만이 필요한 날. 거기에 가공육 특유의 식감과 향이 어우러진다면 완벽한 '나쁜 한 끼'가 완성된다. 완벽하게 '나쁜 부대찌개'의 완성을 위하여, 나는 아껴두었던 사골육수 스톡을 다시 꺼내든다. (그렇게 현재 시점 사골육수 스톡은 두 봉지만 남았다 한다...)
격하게 집 밖을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므로, 굳이 신선한 재료를 사러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다행히, 집엔 아직 마늘, 양파, 그리고 냉동실에 잠들어 있는 썰어놓은 대파정도가 남아있다. 오늘 중요한 건, 야채가 아니다.
감자나 양배추가 있더라면 좋았겠지만, 굳이 없는 걸 사러 나가고 싶지 않다. 대신 양파를 많이 넣는다. 단 맛과 감칠맛을 더해주는 데 일등공신일 테니.
오늘 요리의 핵심재료는 바로 통조림 햄. 이런 날을 대비해서 보관해 두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 햄의 존재가 감사한 날이 없다.
양념도 만들어야지. 피시소스, 간장, 고추장, 고추기름.. 집에 있는 짜고 매운 양념들을 모두 한데 섞는다. 마무리로 아시아 마켓에서 산 중국산 고춧가루를 밥 숟가락으로 두 스푼 가득 넣는다. 속이 쓰릴 위험이 있지만, 오늘은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잠깐. 생각해 보니 집에 밥이 없다. 라면사리로 대신할 수도 있지만, 오늘 분위기는 면을 '호록 호록'먹는 것보다, 밥을 '퍽퍽'퍼먹어야 하는 날이다. 혹여 냉동해 놓은 밥이 없는지, 냉동실을 샅샅이 뒤져본다.
오오오, 밥을 넉넉히 해야 마음이 편안했던 과거의 나를 찬양한다! 다행히 언젠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던 찬밥이 있었다!
햇반이 없는 나라에서 지내는 자취생에게 언제라도 해동해서 먹을 수 있게 밥을 냉동실에 보관해 두는 것은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거짓말이다. 이게 최소한의 조건이라면 나는 이미 몇 번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밥을 대체할 탄수화물은 많고, 냉동실의 자리는 제한적인 고로, 밥을 자주 해 먹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찌개류가 당기는 오늘 같은 날은 이야기가 다르다. 라면사리를 넣어 먹을 수도 있지만, 라면'사리'는 '사리'일뿐, 밥은 꼭 필요하다.
냉동실에 잠들어 있던 소시지와 통조림햄을 얇게 썰어서 냄비 한쪽에 두고, 나머지 한쪽으로는 양파와 대파, 다진 마늘 그리고 만들어둔 양념을 두둑하게 쌓는다. 토핑은 끝났다. 이제 찬물에 미리 풀어둔 파우치형 사골육수를 '자작'하게 부어준다.
여기서 포인트는 '자작'해야 한다는 것.
보통의 자취생인 나는 미래의 끼니를 위해 국물을 넉넉히 잡아두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자작한 국물을 고집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은 부대'찌개'이지, 부대'국'이 아니므로.
미래의 끼니는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드디어 완성이다.
김치 한점 들어가지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시큼하고 얼큰한 맛이 밥을 끊임없이 부른다.
오늘 있었던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매운맛과 충돌하며 사그라드는 느낌이다.
이미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대감은 대부분의 분노를 사그라뜨려 놓았지만.
부대찌개야, 네가 이겼다.
기분 좋은 패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