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새로운 길로 가고 싶다
우연히 회사원의 길로 들어서서, 박사과정을 마무리 하려고 잠깐 쉰 기간을 제외하면 14년을 한 우물을 파고 있다. 셀 수 없는 사이클을 반복하다 보니, 매번 동일하게 발생하는 일은 너무나 쉽고, 가끔은 질리고, 자주 나를 좌절하게 만든다.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도, 예전처럼 닥친 과제들이 나를 해일처럼 덮치지 않는다. 다음날 마음을 먹고 일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그놈의 '일'이라는 녀석은 조용히 구석에 앉아서 해결해 주기를 기다린다.
언젠가 이런 말을 선배에게 했더니, 선배는 이렇게 내게 화두를 던졌다.
"이제 일가를 이룬 거라고 봐야 해"
일가를 이뤘다라. 한우물을 팠던 곳에서 나도 모르게 집을 짓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일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처럼 힘들거나 두렵지 않고, 그저 편안하기만 하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 집안에 들어서 있으면, 비바람을 맞지 않아도 된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이 긴 세월동안 그래도 안전지대를 만든것 같아 잠시 뿌듯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라는 녀석이 들어와서는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내가 판 우물과 지은 집은 과연 인생의 어디쯤에 있는지 궁금해 진다. 아직도 가야 하고 가고 싶은 길이 많은데, 이 길의 초입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집중하고 나서 주저앉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부쩍 늘어간다. 이렇게 편안한데도 말이다.
아직 가고 싶은 길이 많은 것인가? 그래서 그 길로 들어서고 싶은 것인가? 여기에 지어놓은 단단한 집과 끊임없이 샘솟는 맑은 우물을 정말 포기하고? 그 길은 얼마나 길지도 모르고, 중간에 끊긴 길일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길 위에 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정말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바라는 건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두렵다. 내가 지은 집에는 이제 아내와 아이도 살고 있다. 내가 일단 이 길을 나서면, 그들도 함께 나서야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그들을 끌고 함께 들어갈 자신과 용기가 나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앞에 펼쳐진 길이 어떤 곳인지 멀리 내다보고, 지도로 그려보고 있다. 두렵지만 한번 가보고 싶다. 내가 그리고 있는 지도가 조금씩 완성되고 나면, 그 두려움도 옛날의 아득한 감정이 될 것이다. 두려움을 완전히 걷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이겨낼 수 있을 때, 새로운 길로 들어서 보려고 한다. 그리고 한참을 걷고 걸어서, 지금보다 더 큰 집을 짓고, 넓은 우물을 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