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소 꼰대 부장의 스타트업 도전기 (12)

나를 새로 설명하기

by 호접지몽

명함을 내밀 때면 나는 부가적인 설명이 별로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 아 네 여기 다니시는구나. 반갑습니다 "


항상 이렇게 모든 비즈니스 미팅이 시작되었다. 식품박람회에 내 이름과 회사가 적혀있는 목걸이를 걸고 들어가면, 두 집이나 셋집 건너 부스에서 아는 분들이 나와서 인사를 했었다. 그분들과 인사하고, 그 부스에 들어가서 제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샘플을 잔뜩 챙겨 들고 나오곤 했다. 하도 많은 분들이 샘플이나 브로슈어를 주셔서 늘 큰 가방을 챙겨서 다니고는 했다.


내가 나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잘하고, 그래서 어떤 분야의 전문가인가를 스스로 살펴보는 시도를 잘해보지 않았다. 15년 차의 구매팀 직원으로만 스스로를 여겼다. 무엇이 전문분야인가 누군가 물어보면, 글쎄, 그냥 구매일을 15년 동안 했어라고 대답했다. 그 일을 15년이나 했다고 해서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일까?


그동안 무엇을 잘해왔고, 어떤 분야에서 강한 성취감을 느꼈고, 어떤 일이 가장 재미있었는지를 스스로 하나하나 살펴본다. 15년 동안 나는 어떤 일을 해 왔는가? 그래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어떤 사람으로 소개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링크드인을 통해서 만나자고 연락이 온 분을 기다리다가, 이런 고민이 머리를 스쳐서 노트북을 펼쳐보았다.


" 안녕하세요. 저는 B 기업과 J 회사를 다니면서 식품구매를 해왔던 사람입니다. 식품 원자재, 부자재 구매를 했고, OEM 제품에 대한 기획업무를 주로 했습니다. 제가 출시를 기획한 제품은 XXX 가 있습니다. J 기업에서는 구매팀장과 SCM 팀을 겸직으로 역임했습니다 "


그냥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했다는 설명이다. 임팩트가 약하다. 다시 한번 고쳐본다


" 안녕하세요. 저는 식품구매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식품의 원자재 및 부자재, 외주제품 기획업무까지 수행해 본 경험이 있어서 제품개발의 처음부터 출고가 되는 끝까지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기획했던 제품은 xxx, xxx, xxx, xxx 같은 제품이 있습니다. 제품의 벨류체인 전체를 설계하고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SCM 팀을 운영하였고, 제가 맡은 기간 동안 미납률이 x% 낮아졌고, 재고 회전율은 X % 증가하였습니다. 제가 재직했던 회사는 B사 J 사이고, J사에서 퇴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조금 낫지만 이게 나를 온전히 설명하는 것일까 고민이 된다. 내가 과거에 걸어왔던 것이 내가 되는 세상이 더 이상은 아닌데 과거형의 나에 대한 내용만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어떤 역량이 있고,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고 싶은가? 이게 핵심 아닐까? 이렇게 나를 설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 다시 고쳐보자


" 안녕하세요. 저는 국내외 식품업계 구매와 개발분야에서 불편했던 점들을 혁신을 통해서 개선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구매일을 하면서 불합리하거나 불편했던 여러 포인트 들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분석해서 새로운 플랫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특히 식품구매의 전분야를 다 경험해 보았고, 벨류체인을 설계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식품산업 구매나 연구분야에서 상당히 넓은 부분의 아픈 부분들을 알고 있고 이를 프로세스 개선, 간편화, AI를 통해서 혁신하고자 합니다."


이제 좀 마음에 든다. 과거의 명함이나 경력이 지금의 내 일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나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고 그래서 과거의 모든 나의 경력은 이제 짐이다. 꺼내서 쓸 수 없는 짐. 이제 벗어던져버려야 한다.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버선발로 나와 맞아주는 사장님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내가 허리를 굽히고 먼저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설명해야 한다.


아 근데, 오시기로 한 분이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나는 약속시가 나 1시간 전에 와서 기다렸으니까 총 1시간 30분을 기다린 샘이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분께 새로운 나를 설명하는 첫 번째 날이니까. 그 시간 동안 새로운 나를 설명할 준비를 끝냈으니까. 저분인가 보다. 이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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