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으로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문득 어떤 사람이 생각이 났다. 지금 내가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서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곳에 계속 있는 사람. 그 사람을 보고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가까이 있어서 그런 생각이 났던 걸까? 오늘 아침부터 확 바뀐 찬 바람때문에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 사람을 찾아가고 싶다고 외친걸까? 잘 모르겠다.
"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시죠?"
" 어 드래곤. 어쩐 일이야?"
" 네 제가 지금 양평에 있어서, 선배님 괜찮으시면 차나 한잔 얻어마실까 하고요"
"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인데, 밥먹자"
그 사람은, 내 첫 직장의 첫 사수였다.
몇달전 이 선배는 내 꿈에 굉장히 안좋은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어디인가 굉장히 우울한 표정으로 어둠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이었고, 그 꿈이 너무도 뒤숭숭하여 전화를 했었다. 마침 선배는 회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수년전 그만두고 왕래가 없었던 나의 전화를 너무도 고맙고 반갑게 받아주었다. 그 뒤로 몇번의 전화통화가 있었고 인사치례로 찾아뵙겠다. 한번 와라 저녁사줄께 라는 말이 오고갔지만, 우리 둘다 정말 언제 찾아갈지 찾아올지를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오래전 바람같이 스쳐지나간 인연의 옅은 흔적같은 인사였다.
그랬었는데, 갑자기 무언가 이끌려 나는 선배를 찾아갔다. 아직 우리가 함께 다녔던 그 회사에 계속 근무하고 계셨다. 공장의 입구에 들어서 신분증을 맡기고, 건물 앞에 몇그루 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정자에 들어가서 선배를 기다렸다. 행여나 아는사람이 지나갈까 괜히 시선을 조심하면서 앉아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혼나거나, 잠시 숨을 고르거나, 공공의 적인 상사를 동료들과 험담하면서 시간을 보냈던 공간이었다. 정자의 벤치에 걸터 앉아보았다. 많은 사람이 앉아서 니스칠 없이도 반질반질해진 벤치의 나무를 한참 쓰다듬으며 선배를 기다렸다. 참 변한게 없는 공간이었다.
잠시후 여유로운 걸음거리로 선배가 나타났다.
" 여~ 드래곤 잘 있었어?"
" 너무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어떻게 지내세요? 여기는 참 변한게 없네요"
" 그렇지? 니가 알던 사람들도 그대로 많이 있어. 우리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
우리는 공장문을 나서서 회사 앞에 있는 중국집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허허벌판에 보신탕집이 덩그러니 있었던 공간에 엄청나게 큰 산업단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길을 향하면서도 보신탕집에 얽힌 옛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다. 자리에 앉은 후에도, 누구는 어느 회사로 가서 그만두고 누구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서 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 이야기 만으로 한시간을 보냈다. 그시절, 그러니까 내가 처음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던 시절에 있던 수많은 선배들이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사원이던 시절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이었던 수많은 선배들이 이곳에서 하던 일을 15년 이상, 최대 30년까지도 반복하고 있었던 거다. 대단하다 라고 말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변하지 않고 그 세월을 이 공간에서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에 답답함을 느꼈다. 대단한 감정이던 답답한 감정이던 간에, 나는 꿈도 못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오랜세월을 노무전문가로 커리어를 이어갔던 이 선배는, 지금은 공장에서 소요되는 기계부품을 관리하는 담당자가 되어 있었다.노무와 관련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인사전문가로 다른 회사로 옮겨서 직장생활을 이어갔을 법 한데, 커리어와 연관이 전혀 없는 일을 수년전 부터 맡게 된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같이 모셨던 고약한 팀장이 그 이유였다. 작은 일에 크게 질책하고, 인격적으로 공격하고, 내로남불이 심했던 그 팀장때문에 이분은 그동안 쌓아왔던 커리어가 같이 신물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다 포기하고, 스스로 한직으로 발령을 요청하셨던 것이었다. 그 세월이, 그 지식과 노하우가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 그래도 너무 아깝잖아요. 그때 다른곳으로 가시지 왜 안가셨어요?"
" 그 얘기 시작하면 세시간은 걸린다. 그 이유 듣고 싶으면 다음에는 저녁에 와"
이제 50이 되는 선배님은, 회사에서의 본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분의 계획은 일단 1년동안 쉬면서 캠핑카를 끌고 스위스를 한바퀴 돌고 오시겠단다. 그 뒤로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버스 운전기사를 하면서 10년정도를 살다가, 60이 되면 한적한 바닷가에 집을 구해서 낚시나 하며 살고 싶다고 하셨다. 미래에 어떤 일을 하겠다 가 계획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쉬어 나갈까를 계획하고 계시는 느낌이었다. 문득 선배 얼굴을 처다보는데,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행복해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선배의 사무실로 올라가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사무실로 올라가던 그 길은, 내가 신입사원때 매번 헐레벌떡 뛰어 올라가던 그곳이었다. 어두침침하고 음침한 공장의 4층사무실. 쫒기는 마음으로 뛰어다니던 그 복도를 이제는 두리번 거리면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하얀 위생복을 입고 지나가는 이름모를 사람과 눈인사를 했다. 15년 전, 하얀 위생복이 시커메진 상태에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던 나의 모습이 그 사람의 뒷모습에서 스크린처럼 비추어 졌다. 그 공간은 15년동안 변한게 정말 없었다.
선배와 남은 환담과, 옛날사람들에 대한 시원한 험담을 하고는 두시간 만에 헤어졌다. 예전에는 한번도 써보지 않은 방문객 리스트에 사인을 하고, 시동을 걸었다. 오랜만에 왔지만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는 익숙한 길을 운전하면서, 선배를 다시 떠올렸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살고 싶다. 를 매일매일 상상하던 나였다. 그 계획이라는게, 70세까지도 지금보다 훨씬 왕성한 활동을 하는 나를 상상하며 만든 것이었다. 한번뿐인 삶이고, 나에게는 최선을 다해서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서 하루하루 나를 스스로 다그쳐 가며 살아가고 있는데, 조금씩 내려놓고, 천천히 정리하는 삶을 계획하는 선배의 모습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오랜시간동안 변하지 않고 한 자리를 지켜온 선배의 삶과 태풍처럼 휘몰아쳤던 나의 삶이 예전의 이 공간에서 극명하게 비교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부러워서, 갑자기 나도 저 선배처럼 정리하는 삶을 꿈꾸고 싶은가? 에 대해서 스스로 물음을 던져보았다. 그런데 문득, 나도 그런 삶을 꿈꾸어 왔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극심하게 번아웃이 왔었던, 2년전에 내가 매일같이 그런 삶을 갈구하고 요리조리 계획을 세워봤었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 있는 집을 팔고, 시골에 내려가서 소일거리로 알바를 하면서, 넓고 공기좋은 집을 지어서 아내와 조용히 하루하루 보내고 싶었다. 그때, 내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서 한참을 생각에 잠겨서 운전을 했다. 듣던 음악도 꺼버리고, 천천히 강변북로를 달리면서,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깊게 고민해 보았다. 왜 나는 그 시기를 지나서 다시 수많은 위시리스트를 가지고, 열정을 쏟아붇는 일들을 다시 시작했을까? 왜 그랬을까? 그때 무엇이 주저앉은 나를 일으켰을까?
진부한 결과일 수 있지만, 그때의 나를 일으켰던 건 결국 내 가족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나의 아들. 매일 집에 축 처진 상태로 들어오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고, 고생많았다고 토닥여주고 안아주었던 나의 가족. 이 사람들 때문에 내 삶을 정리하지 못했다. 아니, 정리할 수 없었다. 내가 조금 더 성장하고 큰 사람이 되어야, 내 가족이 그 그늘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그들의 또다른 꿈을 지지할 수 있었다. 그게 다시 나의 행복으로 돌아오는 선순환의 구조.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렇게 생각이 마무리 될때쯤 집에 도착했다. 집 앞에 다다를때, 아내와 아이가 일찍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게 보인다. 두사람 다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반겨주었다. 15년 전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그때와 달라진 제일 큰 것이 바로 이 두 사람이다. 변한것과 변치 않는 것들. 그 두가지의 범주에서 수많은 생각을 했던 오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