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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 속도 Dec 30. 2022

화장실 들어올 때의 마음과 나갈 때의 마음

연말을 맞아 지금 조직에 올 때 썼던 글을 다시 폈다

이전 조직의 어려움은 상장에 임박한 회사여서 생긴 어려움이었다.

전전 조직까지의 프로젝트 규모는 유관부서 다 해봤자 20+명 정도? 근데 전 조직에서 맡았던 프로젝트는... 측정 불가. 사내의 모든 팀이 관련이 있었기 때문. 어느 정도 단계가 된 스타트업은 필연적으로 인수를 많이 하게 되거든? 별도로 돌아가게 내버려두면 또 괜찮아. 서비스 통합을 하겠다잖아? 자 그러면 (구) 시스템에서 (뉴) 시스템으로 DB도 합치고 데이터도 이관하고 화면도 합쳐야 되는데... 한방에 짜잔 하고 되면 좋겠지만 legacy가... 기존 걸 쓰고 있던 시스템도 많고 뭘 바꾸려면 전사적으로 협력해야 되는데 이미 덩치가 커져버린 조직의 부서 간 주요 사업이 다 다르고 로드맵은 한없이 미뤄지고 진행 중에 엎어지고. 그래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9차에 끊어서 진행하게 되었다. 원래는 7차였다가, 영업에서 뒤늦게 이 형태로는 진행 못한대서 한 차수를 더 끼워 넣고, 유관부서에서 우리가 필요한 기능이 준비 안된다 그래서 한 차수를 더 넣고 가능한 진행범위로 어떻게든 쪼개고 출시일을 미루고. 프로젝트 자체가 쪼개지는 것도 쪼개지는 거지만 legacy 시스템이 돌아가야 돼서 어떤 차수에서는 백엔드만 배포하고 어떤 차수에서는 갑자기 프런트 작업이 필요해져서 긴급으로 쪼개어 넣고 QA도 급하게 밀어 넣고. 에자일의 마음으로 그중에 한 차수만 어떻게 잘 진행해보고자 해도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잘하는 PO'의 자질 중에 하나는 일정관리인데 도대체 이건 일정관리를 할 수 없는 수준. 그저 맥락을 잘 공유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의 범위가 달라지니 불만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전 직장처럼 덮어놓고 나만 비난받는 상황은 아니라 좋았다. 역시 잘하는 사람 사이에서 일을 해야?

와중에 개인 평가는 좋을 리가.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고 안 그래도 원래 문서 정리가 약점이었는데, 이 상황을 말끔히 정리하는 document? 가능한가요 휴먼? 노력을 과하게 들이면 가끔씩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촉박하게 돌아갔다. 담당한 프로젝트가 얼마나 잘 굴러가는가와 별개로 나는 나 스스로가 실패한 프로젝트가 된 기분이었다.


친구들의 격려를 들었다. 

 '못하겠다 그래도 해야지' 말을 달고 살았다. 업계 친구들은 이런 격려를 해줬었다.

- 근데 애초에 사이즈가 엄청 큰 프로젝트네요 ㅠㅠ 상반기 면담? 이런 거 안 하나요?   

- 레거시가 복잡하면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잘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잘하고 있다!  

- 이건 약간 눈새 작전으로 가야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이걸 그냥 내가 “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자긍심을 가져야 할..  

- 안전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과, ‘잘하고 있어'.라는 멘트보다 조금 은 더 구체적으로 ~ 부분 ~해서 잘하고 있다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퇴사했다.

이런 상황이 퇴사 결정에 영향을 아주 전혀 안 준건 아니지만 헤쳐나가면서 성장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꼈던 부분도 있었다. 이게 포기일까? 당시 사수는 그래 내 열매가 되지 못할 것 같으면 빨리 탈출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지만. 글쎄, 돌이켜보면 경제 상황이 좋아서였겠지만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기회가 몇 개월 동안이나 옆에 생겼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덥석 잡았다. 현금유동성이 좋고, 스타트업이 크게 성장하는 케이스가 왕왕 생겼을 때 early-stage 스타트업을 한번 경험해봐야 그다음이 주어지겠단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지금 조직에 왔다. 그렇지만 현금유동성은 아작 났죠.)


그럼  조직에서는 무엇을 얻었었나?

lesson learn이라고 하지 않나. 단계 단계 너무 괴로웠지만 지금까지 내가 정리하고 해낸걸 다시 되돌아보면 내 자양분이 되었네 싶은 경험들. 가령,

흩어진 오퍼레이션을 하나로 모아보는 경험

기존 오퍼레이션을 원기옥 모으듯이 발품 팔아 하나의 새로운 제품으로 모으는 쾌감

다양한 이슈를 매니지먼트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하는 밀도 높은 경험

다양한 조직, 파트의 PO, 운영자 분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볼륨이 (너무) 큰 프로젝트의 이슈에 대해 협업하는 경험


지금 조직에서 기대했던 것

여전히 복잡한 문제를 푸는 걸 좋아하지만 상황이 너무 복잡하고 거기 얽혀있는 사람도 많고(퇴사로 인한 공석도 많고) 쳐내는데도 에너지가 고갈되었었다. 나는 너무 외로웠고 지쳤다. 다음 조직도 (당연히) 어렵겠지만 덜 지치고 사람들 사이에서 보람도 더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걸 얻었나?

작은 규모의 똑똑한 사람들과 될 것 같은 프로젝트를 얻었다. 그 누구도 '안 되는데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파수가 맞는 팀원도 얻었다. 그렇지만 성장의 욕구가 있는 사람은 매번 '안 해본 걸' 해보려 모험을 떠나기 문에 영원히 괴로워지는 것 아닐지. 얻은 건 얻은 거고 매일 출근하는 마음이 괴롭다. 원인을 짚어보면 훌륭한 '보스'도 같이 기대해봤었는데 글쎄 그건 못 얻어서. 그렇지만 유능하셔. 어떻게 조직의 모든 면모가 나와 맞겠어하는 마음으로 좀 더 버텨보려고. 힘에 부치겠지만 운동도 하고 팀원들끼리 격려도 하면서.


후 정리하고 나니 한고비를 넘겼다 싶다. 버틴다면 얻을 게 많아 보이는 내년도 이렇게 잘 넘길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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