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저장고
시어머님의 냉장고 안은 항상 자리가 모자란다. 특히 냉동실 문을 열 때는 천천히 열어야 한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시댁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난다.
냉동실 안은 한 뼘의 틈도 없이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음식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많이 적응되었지만, 갓 결혼하고 접하게 된 시댁 문화는 충격이었다. 어머니도 새 며느리의 눈치가
보였는지 '냉장고 정리 좀 해야겠다'하며 말을 흐리셨다. 그 후로도 냉장고 안은 언제나 공간이 없었고, 음식을 할 적마다 봉지 몇 개씩은 떨어져 가며 보물찾기 하듯 꽝꽝 언 음식 재료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어느 날 어머님이 외출하신 틈을 타, 냉동실 탐방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음식이,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냉동실에는 지난 명절에 남은 전과 떡, 삶은 우거지, 말린 새우, 다진 마늘, 다듬고 남은 파뿌리, 반만 먹은 아이스크림도 껍질을 오므려 보관되고 있었고, 친척들이 사 들고 온 삼겹살, 목살, 한우 국거리가 있었다.
식재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류도 셀 수 없는 사탕, 정체를 알 수 없는 먹거리와 손수건에 꽁꽁 쌓인 금반지도 있었다. 순간 누군가의 비밀 창고를 엿본 것 같아 후다닥 문을 닫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어머님의 김치와 김치냉장고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어머님은 여름부터 김장 계획을 세우셨다. 고춧가루와 마늘 값 시세를 이야기하며 김장 걱정을 시작했으며, 너무 몸이 아파 올해까지만 하고 내년부터는 각자 알아서 김치를 담가 먹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 줄 알았으나 해가 지나도 어머니는 언제나 김장 걱정을 하고 좋은 고춧가루를 찾아다녔다.
결혼 초엔 김치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몇 달씩 김치를 쟁여 놓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김치냉장고를 사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볼 적마다 어머님은 김치냉장고의 필요성을 말씀하셨고 급기야 통장으로 돈을 부치시며 결국 강제로 김치냉장고를 들여놓게 만드셨다. 이제 어머님 슬하 삼 남매는 각자의 김치 냉장고가 생겼고, 더 많은 김치를 해야 했다.
자식들마다 어떤 김치 맛을 좋아하는지 신경 쓰며 이것저것 내놓으시는 모습이 입으로는 귀찮다, 힘들다 하면서도 어딘가 즐거워 보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님의 건강은 안 좋아졌다. 무릎이 아파서 관절 수술을 받았고, 허리도 아프고 없었던 당뇨에 고혈압 약도 드시기 시작했다. 매년 돌아오는 김장철에 가족들은, 어머님이 이제는 쉬어야 한다고 합의하지만 막상 11월이 되면 어머니의 김치 행사는 다시 시작되고, 큰 솥에 돼지고기 수육이 끓고 집안이 북적거렸다.
막상 식탁 앞에서 어머님은 많이 드시지 못했다. 몸이 피곤해져 그저 눕고만 싶다고 하셨다.
어느 해인가 막내인 우리가 먼저, 다음 해부터 진짜 김장하러 모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식들이 매번 모여드니 어머니가 힘들어도 움직이고, 형과 누나도 이제는 각자 김치를 만들기로 동의하고 재차 확인했다
다음 해, 나도 어머님이 그랬던 것처럼 좋은 고춧가루는 지인을 통해 구입하고, 김장 계획을 잠시 세워봤으나 결국은 홈쇼핑에서 10kg을 주문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했을까 물어봤더니, 그들도 절인 배추를 주문하고 김치공장에서 체험도 하며 구매를 했다고 했다. 이제 어머님이 좀 편하시겠지 생각하며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어머님은 자신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 서글퍼서 한동안 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양은 적지만 새 김치를 담아 놨으니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결국 삼 남매는 다시 어머님의 김치를 한 통씩 가져와 홈쇼핑 김치를 밀어놓고 먼저 먹어 치웠다. 그 후 누구도 다시는 각자 김장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음식은 기억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가난한 시절 먹었던 음식을 잊지 못한다. 아직도 재래시장에 가면 커다란 솥에 끓고 있는 번데기를 본다.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카메라를 들이댈 때면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난 시절의 향수와 기억이라고 설명한다. 6.25 한국전쟁 후 미국에서 원조 물품으로 보내온 밀가루 덕분에 짜장면이 대중 음식의 대명사가 되었고, 풀빵, 붕어빵, 옥수수 찐빵이 등장했다.
아무리 먹을 것이 없어도 한국인의 식탁에는 김치가 있어야 했고, 엄마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계절마다 밭에서 나오는 채소로 김치를 만들어 식탁에 올렸다. 특히 김치가 맛있게 만들어졌을 때는 엄마의 자존감도 올라갔다.
세상이 바뀌고 사람들의 입맛이 점차 서구식으로 변해 예전만큼 김치를 많이 하지 않고, 식탁에는 김치 말고도 젓가락이 가는 접시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시부모님은 항상 아들 앞으로 정갈한 김치 접시를 밀어 놓으며, 맛있다고 먹는 아들을 정이 한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신다.
어머님의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은 무한한 밀도의 자식 사랑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던 시절의 기억은 냉장고의 등장과 함께 오래 저장되었고,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음식이 있다는 안도감도 함께 쟁여졌다.
언젠가 어머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겠지만, 엄마의 사랑 냉장고는 영원히 기억 속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