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싫음, 괜찮고 안 괜찮음과 같은 내 마음을 상대방이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할 때가 있다.
왜 남의 마음을 뺏고 그러는 걸까?
일본 유학 시절의 어느 겨울날, 한국인 학생들끼리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갔다. 입구에서 가까운 홀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점원이 안쪽 방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이 자리 춥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시면 좋겠어요."
"괜찮아요. 안 추워요."
"아니요. 문 열면 추워요. 방으로 들어가세요."
"진짜 안 추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방으로 들어가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춥고 안 춥고는 우리 피부가 느끼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점원, 한국 사람 싫어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대형 마트의 해산물 코너에서 미역을 사려고 했다. 맛만 보게 조금만 달라고 했더니 아주머니가 몇 움큼을 담는다.
"너무 많아요. 조금만 주시면 돼요."
"안 많아요. 자, 이 만큼이면 됐죠?"
"아니요. 너무 많아요. 반 만 주셔도 돼요."
"그냥 가져가요. 안 많다니까."
"그만큼 먹을 사람이 없어요. 확 덜어주세요."
"이걸 많다고 하면 어떡해?"
식재료의 많고 적음은 요리할 사람이 가늠하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 다음 손님한테도 일단 넘치도록 담고 흥정을 시작한다.
의견을 주고 받던 회의 중에, 상대방이 지나가면서 한 말에 기분이 매우 상해서 이야기를 했다.
"방금 그 말씀은 좀 지나친 것 같아요."
"에이. 왜 그러세요.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그런 것 같은데, 제가 기분이 별로 안 좋네요."
"왜 기분이 안 좋아요? 그냥 한 말에 기분 나빠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냥 한 말에 일단 제 기분이 상했다고요."
"제가 언제 기분 나쁜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기분의 좋고 나쁨은 내 머리와 가슴이 느끼는 것이다. 이 사람, 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서 몇 번을 참고 이야기를 한 것인데도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후에도 마음 상하게 하는 말은 계속되었다.
나의 감정과 판단의 기준은 남이 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정하려고 할 때는 분명 의도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본 식당의 점원은 한국 사람이 꼴도 보기 싫으니 자신의 시야가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보내 버리고 싶어서 그 자리는 무조건 춥다고 말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었다면 이렇게 이야기했겠지.
“문이 열리면 추울 수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마트의 아주머니는 일단 미역을 넘치도록 담고 시작하면 몇 번을 덜어도 웬만한 양을 팔 수 있으니 두 번 정도는 절대 많지 않다고 우겨볼 것이다. 두 번, 세 번 말하기 싫어서 그냥 사는 손님이 있을 테니.
의도치 않은 말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에 상대방이 화를 내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과할 마음이 선뜻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타이밍을 놓치고 나니 나중에는 사과하기도 어색하지 않았을까? 결국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부터 말을 뱉은 것까지 다 잘못한 것임에도, 이미 상해버린 상대방의 마음보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운 자신의 마음이 앞선 까닭에 상대방은 기분이 상했을 리가 없다고 정하기를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내 마음을 남이 정하려고 할 때의 이 미묘한 불편함이란...... 그런데 혹시나,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마음대로 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걷다 넘어진 아이에게 “이 정도는 아픈 것도 아니야.”하는 나,
실패를 경험한 친구에게 “우리 친구는 이런 거 금방 털고 일어나잖아?”라고 말하는 나,
남의 갈등과 고민을 앞에 두고 “네 마음 내가 다 알아.”라고 하는 나처럼.
마음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공감은 할 수 있어도 남이 함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