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하면 해외여행을 해봐야겠어."
20대의 중반이 되도록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온 적 없던 나는 길고 길었던 군생활의 끝을 앞둔 자신과 약속을 했다.
제대하자마자 시작한 아르바이트를 석 달 동안 했다. 당시 월급이 50만 원이었으니, 모은 돈 전부와 비교했을 때는 꽤 컸던 70만 원을 가지고 열흘 간의 일본 여행을 떠났다.
인생 첫 해외여행이라는 의미가 매우 컸다.
그리고 돈 얼마 안 들이는 진정한 배낭여행을 해 보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처음이 어렵다고, 앞으로의 인생은 지구 이곳저곳에 발도장을 찍으며 살게 될 거야.'
그런 기대도.
진정한 배낭여행에 사치는 금물.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탔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 사이를 오고 가는 부관훼리호. 일본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싼 교통수단이었고, 15년 전인 그때 2등실의 왕복 요금은 14만 원이었다. 가격의 부담이 적은 만큼 승객의 반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장사하는 아주머니들, 반은 알뜰해 보이는 여행자들이었다. 저녁 7시에 승선하여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사람들과의 여행길이 시작되었다.
마루로 되어 있는 2등실은 짐을 내려놓고 앉으면 그곳이 내 자리였다.
주변에도 짐이 몇 개 놓였고, 이내 우리는 하룻밤 여행의 말동무가 되었다. 일본인이 둘, 덴마크인 부부가 한 쌍으로 해외여행이 처음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일본인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이유는 그 사람의 행색 때문이었는데, 양말에는 구멍이 나 있고 스웨터는 목과 소매의 둘레가 원래의 두배는 될 것처럼 늘어난 남루한 모습이었다.
30개국을 여행했다고 했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일한다는 그는 평소에 모은 돈으로 틈틈이 세계 여행을 하고 있었다. 적은 수입으로 여행을 하다 보니 모아둔 돈도 없고 가정도 꾸리지 못했다며, 나이가 열 살은 적은 나를 의식하는 듯 부끄러운 얼굴로 고백을 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기억이 쌓이고 있어서 괜찮아요. 머물렀던 장소와 시간의 기억이."
세계 여행, 나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곳 대학교를 졸업할 것이고, 슈퍼마켓보다는 좋은 곳에서 일하게 될 테니 평범하게 가정도 꾸리면서 여기저기 여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20대 중반이었던 나보다도, 그때의 남루한 여행자보다 나이를 더 먹었다.
월급은 그때의 아르바이트비보다 훨씬 많아졌고, 아이가 셋인 가정도 꾸렸다.
그 사이에 일본에서 몇 년을 살기도 했고, 여행으로 출장으로 다녀온 나라가 몇 군데는 된다.
그런데, 나는 지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 이곳저곳에 발도장을 찍겠다던 그때의 나에게도, 허름한 옷차림으로 세계 여행을 하던 일본인에게도 여태 지고 있다는 생각.
"사람이 다섯이면 비행기 값만 해도 얼마야?"
"그 때 바쁠 것 같은데, 휴가 쓸 수 있을까?"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되지만,
조금 비현실적이어도 된다는 용기마저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 때 그들의 마음에 대한 열세를 만회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