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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Jan 09. 2024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기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에서 읽어낸 메시지

2018년 여름, 친구가 책을 선물했다. 벽돌 같은 소설이었다.

내가 러시아 콘텐츠를 다루니 나름의 영감을 선물한 친구의 마음은 정말 고마웠는데,

조금 들춰보다가 당장 바쁘다는 이유로, 책이 두껍다는 핑계로 책장에 고이 모셔두었다.


마음 한켠에는 선물 받은 책이 미국 사람이 쓴 러시아(정확히는 소련 전환기) 소설이라

마음이 크게 가지 않았던 것도 있다. 자기 나라도 아닌 이야기를 얼마나 잘 썼을까?

'언젠가 읽어야지' 미루고 미루다 부끄럽게도 작년말에야 책장에서 꺼내 본 이 책, 금세 빠져들고 말았다.

바로,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이다.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 (좌측 번역서, 우측 원서)


『모스크바의 신사』의 주요 줄거리는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으로 전환된 이후, 시기에 반하는 시(詩)를 쓴 이유로 메트로폴 호텔에 가택연금 당하게 된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에게 30여 년 간 일어난 일들이 시간순으로 전개된다. '메트로폴'이라는 자신의 작은 우주에서 로스토프 백작은 호텔 내 보야르스키 식당 웨이터 주임으로 일하며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그곳 사람들 혹은 그곳을 거쳐간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 당시 격변하던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소우주 속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로스토프는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오랜 꼬마 친구의 딸을 맡아 키우다, 자신의 딸로 삼게 되고 진정한 아버지로서 그 아이의 인생을 위해 희생하고 수십년 생각해본 적도 없는 호텔 탈출을 선택한다.

소설 전개의 모든 과정에 이유가 있고 나름의 격식이 있고 인간적 감정이 담겼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물론 러시아와 관련된 포인트들을 보여주는 면도 좋았지만,

본문 중간중간 작가가 툭툭 깔아둔 공감되는 삶의 문구들이 있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p194~195)


분명 여러분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 도약했던 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여러분은 자기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그 순간들을 되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약하는 데 약간이나마 기여했다고 인정할 만한 제삼자가 정말로 없었을까? 시의적절하게 조언해주고 소개해주고 칭찬의 말을 해주었던 멘토나 가족의 친구나 학교 친구가 정말 없었을까? (p318)


러시아 모스크바 배경


또한 역사 속에서 러시아가 보여준 특성들,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까지.

시대와 무관하지 않은 소설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줬다.


"나폴레옹이 새벽 2시에 호출을 받고 크렘린에 새로 마련된 침실 밖으로 나가서, 자신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점령한 도시가 시민들에 의해 불타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상상할 수 있겠어?" 미시카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모스크바를 불태운 것이야말로 지극히 러시아적인 행위였어, 친구.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건 별개의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지. 그건 사건의 한 형식이었어. 수천 개의 역사에서 따온 하나의 사례일 뿐이야.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 러시아인들은 우리가 창조한 것을 파괴하는 데 기가 막히게 뛰어난 재주가 있다는 걸 증명해왔다네." (p456)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데, 그건 우리가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보다 더 냉담하거나 덜 개화되었기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것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어. 우리는 어떤 나라의 국민들보다도 더 그림이나 시, 기도, 사람의 힘을 믿기 때문이지" 미시카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을 꼭 기억해둬, 친구, 우린 아직 모스크바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불태운 건 아니라는 것을."(p458~459)


"전쟁 이후로 우리 두 나라 간의 관계는 그렇게 다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충분히 예견되었던 일이죠. 우리는 마셜 플랜을 추진했고, 당신네는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지요. 우리는 나토를 조직했고, 당신네는 코민포름을 구축했습니다. 우리는 원자탄을 개발했고, 당신네도 원자탄을 개발했어요. 마치 테니스 경기 같았습니다. 테니스는 좋은 운동일 뿐만 아니라 지켜보는 것도 무척 즐겁잖아요. 보드카 드실래요?" (p546~547)


추운 인생의 길을 환히 밝혀주는 문구들


무엇보다 로스토프 백작을 통해

인생에서 지녀야 할 자세들을 짚어준 덕분에 나도 소설을 통해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p609)


백작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부모로서의 충고를 두 가지 간단명료한 요소로 제한하였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p654)


...아버지는 그녀에게 한 가지 생각을 얘기해줌으로써 그녀를 위로하고자 했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 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p687)




탈출!


무엇보다 딸을 탈출시키고 자신도 호텔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던 아버지 로스토프 백작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간 메트로폴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이다.


딸 소피아가 큰 계기가 되어 인생을 바꾸고자 행동에 옮긴 백작의 결심에 나도 용기를 얻는다.

물론 아직 나에게는 소피아만큼 동기를 줄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마음에 선물을 선사한 감사한 소설이었고, 문득 모스크바 중심가를 산책하고 싶게 만들게 했다.

이런 책을 늦게 읽다니... 선물해준 친구에겐 참 미안하다.


올들어 뚜렷한 돌파구가 없어 갑갑했는데, 환경에 눌려있으면 안 되겠다. 그의 소설에서 말한 것처럼 관대한 마음만 잃지 않으면 언젠가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을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


좋은 날을 기대하며, 2024년도 잘 살아보자!



* 표지 사진 출처 : tsvt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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