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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Mar 07. 2017

고전을 품은 현대 도시, 모스크바(1)

잠재력 뽐내며 아날로그를 사랑하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이고,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

장장 9,288km 길이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시작이자 마지막 지점이기도 한 모스크바. 과연 대국 러시아를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컨트롤 타워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


테트리스의 배경 성바실리 사원이 있는 '붉은 광장', 그 이름만 들어도 공산주의 느낌이 폴폴 난다며 많은 이들이 기피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도시의 매력에 이끌려 너도나도 발걸음 중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1990년 초만 해도 닫혀있던 나라니 이제와 개방된 그곳에 호기심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그냥 무작정 가기에는 여전히 언어 장벽이 조금은 높다.  


모스크바의 랜드마크 붉은 광장, 그리고 성바실리 사원


드디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구나.

이미 인터넷에 수많은 정보를 찾아볼 수 있으니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모스크바에 대한 소회를 풀어보고 싶다.




# 고속 성장의 도시


내가 러시아 땅을 처음 밟던 때는 2004년이었다.

당시 스킨헤드와 인종 차별, 불안한 치안이 유학생들에겐 큰 이슈였다. 다른 선진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친구들은 설렘이 가득했지만 러시아로 가는 마음이 가난한 유학생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적응하기 전까지 겨울에는 동양인이라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 목도리로 눈 아래까지 가렸고, 여름은 날이 밝아도 늦은 시간에는 외출하지 않았다.


2004년 당시 즐겨찾던 공중전화 박스, 투박하다.

그래서 생활이 자유롭지 않았던데다가, 무엇보다 통신 사정도 좋지 않아 매우 답답했다.


가족, 친구들과는 당시 인터넷 카페에서 시간에 쫓겨가며 한글 자판을 찾아 이메일과 싸이월드로 연락하던 기억, 목소리는 꼭 듣겠다며 시내, 국제 전화카드 각각 1개씩 사서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던 기억. 기숙사 방에서 모뎀으로 인터넷 좀 해보겠다고 러시아 친구 목빠지게 기다렸다가 결국 포기한 기억.

내려놓아서 오히려 행복했던 시간이다.


지금의 모스크바를 보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현장. 소련 느낌 물씬, 모스크바 국영백화점(ГУМ)의 광고 퍼포먼스


2005년 초 내가 러시아를 떠나고, 사회인이 되어 출장으로 2007년부터 방문한 모스크바는 예전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조금씩 시스템화 되어갔고 커다란 쇼핑몰이 있는 것은 물론, 공공장소에서는 무선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디가 먼저랄 것 없이 점점 우리나라와 비슷한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제는 대형 쇼핑몰에 가면 종업원이 나에게 먼저 영어로 말을 걸어오기까지 한다. 러시아 자본주의가 사뭇 새롭다.

 

그리고 차로 가면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심하면 5시간까지도 걸리던 공항도 이젠 고속철도로 30분이면 갈 수 있게 되었다.

모스크바 시내와 공항을 잇는 고속철도 내부. 깨끗하다


교환학생 이후 거의 매년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그렇게 하나둘 변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참 재미있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그곳은 발전에 대한 흡수가 굉장히 빨랐다.

특히, 인터넷 환경은 유럽보다 훨씬 뛰어났다. 웬만한 카페나 호텔, 쇼핑몰, 심지어 우리처럼 지하철에서도 무선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정말 놀랍다.

내가 파리에 2012년 여행갔을 때 wi-fi 찾아 삼만리 하다가 루브르 박물관 입구에서 겨우 잡아 한참을 서서 사용하다 온 기억이 있는데, 그 때는 파리가 모스크바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모스크바의 대형 쇼핑몰에서는 어디서나 인터넷이 가능하다


그렇게 모스크바는 참으로 경이롭게 고속 성장을 했다. 회색빛 아파트만 가득한 옛 공산 도시 모스크바를 생각한다면, 몇 년 전 생긴 고층 건물 가득한 모스크바 시티는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동안 제대로 폭발시키지 못했던 잠재력을 용트림하듯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


<모스크바의 또 다른 모습, 모스크바 시티>


예전에 어렵게 교환학생 생활을 하던 시절, 내가 모스크바를 너무 과소평가했던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상트 페테르부르크였으면 느낌이 전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학생으로 지낼 때는 모스크바가 참 불편해서 싫었는데, 지금은 가서 살라고 하면 당장에 달려갈 수 있다.


# 그래도 아날로그, 옛것을 사랑하는 도시


고속 성장 도시라지만, 그래도 역시 모스크바는 아날로그를 사랑한다.


예술작품 같은 러시아어 필기체(모스크바 박물관 소장품)


그들의 아름다운 필기체, 책을 사랑하는 문화, 꼼꼼하게 살피는 행정,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은 할 수 없는 구조. 그래서 긴 줄을 서야 하는 문화. 많은 것들이 현대화되었지만 아직 많은 것들이 아날로그식이다.


러시아에서는 줄서는 것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돈이 흘러들어가 투자되는 것이라면 뭐든 편의가 좋아지기도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 만큼은 러시아가 아날로그로 남기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이런 풍경은 몇십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모스크바의 깔로멘스꼬예(Коломенское) 공원


어문학도인 나같은 경우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 어학인증시험(TORFL)을 볼 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토익(TOEIC)이나 오픽(OPIC) 등 타언어의 기계화된 시험과는 달리 러시아어는 옛날 방식을 고수한다. 필기시험은 답안지에 동그라미를 치고, 쓰기는 수기로 작성한다. 특히 말하기는 원어민 선생님과 대화하며 1:1 방식으로 평가된다. 이어폰으로 듣고 답을 녹음하는 것이 아닌 그냥 라이브다.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러시아어 인증시험(TORFL)도 마찬가지로 진행된다. 물론 응시인원이 영어만큼 많지 않아서, 예산이 부족해 그런 것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인간미가 느껴지는 시스템이다. 아날로그가 살아있는 국가답다.

  

<항상 아날로그로 첨삭해 주고 수업자료까지 수기로 써주던 모스크바에서의 러시아어 교육>


또 모스크바는 현대적인 모습 속에 옛 모습도 공존한다.


아름다운 노보데비치 수도원. 성벽 옆으로 묘역이 있다. 기억을 중시하는 나라


노보데비치 수도원 내부에도 무덤이 있다

옛것을 부수고 새것으로 가득 채워나가는 서울과는 달리, 모스크바는 도시 곳곳과 근교에서 옛 건물과 구역들이 보존되어 있다. 모스크바 도시 한가운데 묘지가 있다면 믿어지는가? 그것도 수도원인데다 관광 명소이기까지 하다니. 그곳, 바로 노보데비치 수도원(Новодевичий монастырь)에 잠들어 있는 체홉이나 고골 등 유명 문학가나 쇼스타코비치, 유리 니꿀린 등 예술인, 옐친과 같은 정치가 등을 찾는 것은 나름의 의미도, 재미도 있다.


모스크바가 옛것을 보존하고 있음을 곳곳에서 알아볼 수 있는데, 나는 특히 12년만에 모스크바 국립대학교(МГУ 엠게우)를 방문하고 이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위엄한 자태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본관 건물


스탈린 양식을 하고 꼭대기에 별을 달고 있는 모스크바 대학 본관 건물은 겉은 굉장히 멋져보이지만, 내부는 오래된 목조 구조라 화재가 발생하면 삽시간 타버릴 것이라고 옛날에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저 멀리 엠게우 본관 'В'동 기숙사 입구(좌) 본관 엘리베이터 버튼. 12년 전과 똑같음(우)>

엠게우 본관 출입증. 수기로 적어준다

기숙사는 하루라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생쥐가 튀어나왔었고, 엘리베이터는 늘 불안했다. 기숙사 입구 관리아저씨는 인상을 찌뿌리며 "쁘라뿌스끄(пропуск: 출입증)!!"를 입에 장착하고 험악하게 나를 쳐다봤었다. 참 무서웠다.


다시 가보니 본관 내부(일반인이면 출입증을 발급받아야 출입이 가능)는 놀라울 정도로 12년 전 그대로였다. 이건 보존이라기보다는 시간이 멈추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조금씩 개선된 것은 있어 보였지만, 카페, 문구점, 기숙사 입구 등 모두 그대로였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엠게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마치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과거가 잠든 장소. 엠게우 본관 2층은 이렇게 불 꺼진 날이 켜있는 날보다 많다


나는 아날로그, 옛것을 사랑한다. 그래서 모스크바가 좋다.


소련시절 혁명적 고려인 록가수 '빅토르 최'를 기억하는 추모의 벽.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 있다.




옛날에 모스크바를 다녀온 사람이면 누구나 모험담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

말도 안되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지는가 하면 답답해서 미칠 정도까지 갔다 오는 건 다반사다. 나는 여권을 도난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확인증을 받아내려 몇주내내 경찰서만 매일 들락거린 적도 있다. 뒷돈을 주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지만 나는 누가 이기나 해보자 겨루고 싶었나보다.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미운정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지낼 때는 실컷 욕하지만, 돌아오면 사무치게 생각나고 그리운 곳이 모스크바였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간다.


눈이 비처럼 내리는 곳, 모스크바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조상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금은 편안히 지내면서 더 좋은 기억들만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곳의 매력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는 지금이 최적의 시기이고,

그렇게 내가 쓰임받고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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