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를 만나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너무나 큰 충격에 당분간 모든 주식을 팔고 투자를 접기로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동호회 활동을 하고 훌륭한 멘토들의 조언을 받았음에도 이렇게 어리석고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한 스스로가 용서되지 않는다. 나는 큰돈을 굴릴만한 그릇이 못된다. 그저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고 적금이나 착실히 모으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알량한 욕심에 이렇게 주기적으로 돈을 날릴 바에야 괜한 헛짓거리 말고 안전하게 지키기나 하는 게 상책이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동호회도 나가지 못하겠다. 고 부장님과 전 차장 얼굴 보기도 민망하다. 이리저리 핑계 대며 피해 다니다가 업무 때문에 회의를 하느라 고 부장님을 어쩔 수 없이 만났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운영팀과 외부 디자인 대행사를 포함한 킥오프 미팅이었다. 미팅 후에 고 부장님과 디자인 대행사 대표와 함께 점심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윤 차장, 인사해 박우령 대표님이셔. 디자인 업계에서 워런 버핏으로 유명한 분이야. 업무뿐 아니라 투자 관련해서도 조언을 구해보라고. 나도 도움 많이 받고 있는 분이야."
고 부장님에 따르면 이 업계에서 유명한 슈퍼개미로 통한다고 한다. 100명이 넘는 디자인 대행사를 운영하며 직원들에게도 파격적인 스톡옵션을 주기로 유명하다. 나도 이 회사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데 대표 본인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는 몰랐다.
"고 부장님, 제가 무슨 슈퍼개미예요. 그냥 일개미지. 열심히 일해서 조촐하게 투자하고 있을 뿐이에요."
"아니 대표님, 200억 굴리는 분이 슈퍼개미가 아니면 누가 슈퍼개미예요?"
고 부장님이 웃으며 반문한다. 그런데 무려 200억? 정말 진정한 고수가 이런 곳에 있었구나. 신기한 마음에 이런저런 질문거리도 많았지만 초면에 너무 실례가 될 것 같아 참아본다. 인연이 있다면 다음에 또 만나게 되겠지.
인연이 있는지 일주일 후에 대행업체까지 참석하는 프로젝트 전체 회식에서 박우령 대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마침 고 부장님과 박우령 대표가 함께 앉았다. 술이 좀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넋두리가 나온다. 내 나름의 짧은 투자 역사를 손짓 발짓하며 울며 불며 나름 한풀이하듯 쏟아냈다. 고 부장님도 맞장구를 쳐주시며 응원하니 더 신나서 떠들었다. 블루칩투자클럽에 억울하게 회원비만 뜯기고 손해 본 대목에서는 박우령 대표님도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들 정말 주식 시장의 암세포 같은 존재예요. 남의 돈 끌어다가 주가 조작하며 정말 자기들이 주가를 맞추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거죠. 일단 회원비 충분히 모은 후에는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100%에요."
갑자기 내 치부를 드러낸 듯한 부끄럼이 엄습한다. 급하게 화제를 돌리려고 무리한, 어쩌면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대표님 정도면 굳이 이런 일 안 하셔도 될 거 같은데. 이렇게 까지 힘들게 업체를 운영하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제가 디자이너 출신이잖아요. 이 바닥이 얼마나 힘들고 임금이 박한지 잘 알거든요. 그래서 이쪽 후배들이 돈 걱정 없이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임금도 충분하게, 스톡옵션도 최대한 많이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특히 직원들이 제대로 돈을 불릴 수 있게 사내 투자 교육도 하죠. 한 달에 한 번은 제가 직접 투자 강의를 하고요. 그렇게 디자인하는 후배들이 즐겁게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면서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게 도움을 주려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단하다. 이런 사람과의 인연은 흔한 기회가 아니다.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대표님, 어떻게 해야 대표님 같은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을까요? 두 번이나 실패하고 나니 의지가 완전히 꺾였어요. 좀 도와주십시오!"
꾸벅 일어나 거의 절하듯 몸을 굽혔다.
"아이고 차장님, 왜 이러세요. 당연히 도와드릴 테니 그만 앉으세요."
살짝 취기가 올라와서 너무 오버한 듯하다.
"차장님 투자하신 경력을 쭉 들어보니 제대로 잘하고 계신 거 같아요. 지금까지 공부하고 경험한 대로 자신을 믿고 투자하시면 됩니다. 다만 좀 더 넓은 공부가 필요해 보여요."
"더 넓은 공부라는 게 어떤 건가요?"
"왜 투자하는지 목적이 분명해야죠. 단순히 투자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만으로는 부족해요. 투자해서 불린 돈으로 뭘 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돼요. 돈만 목적이 되면 인생이 피폐해지고, 모은 돈을 지키기도 어려워져요. 투자는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되선 안돼요."
알듯 모를 듯하다.
"차장님은 이미 2년 동안의 공부와 경험을 통해서 필요한 건 거의 다 배우신 거예요. 두 번 실패하신 건 그냥 실패가 아니에요. 나중에 다시 성공하시게 되면 성공을 위한 과정이 되는 거죠. 실패로 정의하지 마시고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다만 한국 주식에만 투자하는 건 분산투자 원칙에 위배돼요. 해외주식도 꼭 투자하셔야 해요. 제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큰 비중은 미국 ETF에요. 한국 주식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죠. 매번 경영권 승계도 문제고, 지배구조도 후진적이죠. 주가가 오를만하면 성장하는 분야를 분할해서 주주들에게 피해를 주기 일쑤죠. 이런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소들 때문에 전 세계 시장이 잘 오를 때도 우리나라는 절반도 못 따라가는 경후가 흔해요. 해외주식은 필수로 하셔야 합니다.
바이오에 관심을 두는 건 전혀 문제가 없어요. 바이오 섹터가 앞으로 크게 성장할 거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죠. 하지만 타이밍이 문제죠. 특히 아직 매출이 없는 바이오 벤처에 대한 투자는 지양해야 합니다. 너무 변수가 많기 때문이죠. 2상, 3상이 잘 진행된다는 소식이 들려도 조심해야 해요. 심지어 3상까지 완료되고 출시까지 해도 시장의 외면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죠. 바이오는 매출이 나오는 걸 확인한 후에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비트코인도 미래 지향적인 투자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저도 실제로 작은 비중이지만 투자 중이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현금비중이에요. 항상 충분한 현금을 들고 계셔야 해요. 아무리 좋은 시장에서도 20% 이상은 현금으로 들고 계세요. 현금 비중을 유지하는 자체가 겸손한 태도거든요. 100% 확실한 건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태도죠. 이 세상은 너무 불확실하잖아요. 불확실한 시기엔 현금만 가치가 있죠.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다. 이런 조언을 주기적으로 들을 순 없을까?
"대표님, 저를 제자로 삼아주세요. 수업비는 톡톡히 치르겠습니다"
"아이고 차장님, 제가 무슨 선생도 아닌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저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뵙고 투자 주제로 수다나 떨면 충분하죠."
이렇게 슈퍼개미 박우령 대표와의 소중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래 이렇게 투자 인생을 끝낼 순 없지. 두 번의 실패가 나에게 좋은 수업이 되었다. 실패를 실패로 규정하지 말고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정의하자. 그동안 배우고 경험한 대로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포기하지 않은 이상 실패는 없다. 다시 도전이다!
1부 끝
※ 이 글은 저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