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8박 9일 여행 정리
"기원전 3천년을 더듬다."
아프리카 대륙의 맨 위쪽에 있으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는 이집트는 어떤 나라일까? 4대 문명의 발상지로 너무나 많이 들어 왔던 나라였기에 어느 정도는 친숙한 나라다. 피라미드, 미이라, 사막, 나일강, 수에즈 운하 정도의 단어가 떠오르는 나라다.
인천에서 이집트 카이로까지 직항으로 1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대한민국의 10배쯤 되는 면적이지만 국토의 97%는 사막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 수 없어, 특히 이집트 면적의 5%에 해당하는 나일강 주변에 1.1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인구의 90%는 이슬람교를 믿고 있고, 10% 정도는 기독교인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달러(2019년) 정도로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기원전 약 3천년의 실재했던 기록된 역사를 본 것은 추정에 의해 주장되는 역사와는 느낌이 달랐다. 여행내내 이집트 역사에 압도되면서도 그 화려했던 이집트는 어떻게 가난한 나라가 되었을까 하는 역사도 함께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BC3150년에 메네스 왕이 최초로 상하 이집트를 통일하여 세운 왕국을 세운 후(제 1왕조) 후 제 32왕조 클레오파트라가 패하는 BC30년까지 3,120년 간 지속되었다. 고대 이집트는 고왕국(1중간기), 중왕국(2중간기), 신왕국(3중간기), 후왕국시기로 나눠지는데, 중간기는 왕조의 힘이 약해져 혼란한 시기를 겪게 되는 기간을 말한다.
이집트는 이집트 동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나일강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6671Km에 이르는 나일강은 수단과 나이지리아에서 발원하여 이집트의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생명의 젖줄과 같은 강이다. 상류의 강우량에 의해 매년 3, 4개월 가량은 범람하는데 그때 상류로부터 밀려오는 퇴적물은 이집트 지역 강가를 비옥한 땅으로 만들게 되어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축복이라고 한다. 연 강수량이 10미리 밖에 안되는 메마른 이집트를 풍요롭게 만드는 근원인 셈이다. 이집트의 주요 도시도 이러한 남북을 가로지르는 나일강 주변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나일강의 하류인 이집트의 북쪽 지중해변에서부터 보면 알렉산드리아 – 카이로 – 룩소르 – 콤옴보 – 아스완 – 아부심벨 순으로 큰 도시들이 있고, 고대 이집트 왕국의 수도도 그 주변을 중심으로 오갔다. 카이로는 현재 수도일뿐 아니라 주변의 멤피스는 고왕국 시대의 수도, 푸르스트는 이슬람이 지배할 때 수도였다. 로마 지배시에는 알렉산드리아, 중왕국 이후의 이집트는 테베(룩소르)가 수도였다.
이집트 여행은 근대 이집트 건물인 카이로의 무하마드 알리 모스크를 본 것을 제외하면 고대 이집트 3천년의 유적을 살펴보는 여행이었다. 그래서 여행지는 이집트 하류인 남쪽 카이로(멤피스)와 중부 룩소르, 북쪽인 아스완 지역 세 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집트 최대의 휴양 도시로 알려진 홍해 해변에 위치한 후루가다가 포함되었다.
고대 이집트 여행을 다시 구분해 보면 신전과 무덤(피라미드, 미라) 그리고 그 유적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이집트 여행의 특징이라면, 대부분의 국가 역사는 그 나라를 지배했던 왕 중심으로 되어 있고 그 왕들이 산 궁전이 중심이 되기 마련인데 이집트는 현세보다 내세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왕국을 지배한 왕(파라오)의 죽음과 관련한 유적지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서쪽은 죽은 자의 땅이라고 하여 ‘네크로폴리스’라고 했고 해가 뜨는 동쪽 편은 산자의 땅이라 해 ‘아크로 폴리스’라고 하였다. 그래서 죽음과 관련되는 유적지는 대체로 나일강 서쪽 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일강만큼 그들에게 중요한 대상은 태양이었다. 매일 허허벌판 사막 동쪽에서 장엄하게 뜨는 태양은 그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고 태양이 저무는 서쪽은 죽음을 의미했다. 자연스레 태양은 그들에게 신이 되었다. 태양신을 숭배하는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지만 이집트에서는 더 절대적이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아침(케프리), 점심(라), 저녁(아툼)에 각각 다른 태양신이 있었고 아래에서 나오는 이집트의 신들과 결합하여 다른 태양신의 이름을 갖는다. 예를 들어 라호라크티(태양신 + 호루스), 아문 라(바람과 공기의 신 아문 + 태양신) 같은 식이다. 이처럼 태양신은 다양한 형태로 이집트인들의 숭배 대상이었다. 이들을 지배하는 파라오는 그 태양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 받은 살아있는 신으로 여겨졌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섬긴 태양신의 계보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 계보에는 여러 갈래의 스토리가 존재하지만 대표적인 것 하나를 토대로 말하면 이렇다. 스스로 창조된 ‘아툼’은 누트(하늘의 신), 슈(공기의 신), 테프뉴트(습기의 신), 게브(땅의 신)를 낳는다. 이집트에서는 그리스 신화와 같이 다른 신화에서와는 달리 하늘의 신이 어머니, 땅의 신이 아버지가 된다. 하늘의 신 누트와 땅의 신 게브가 사랑하였으나 공기의 신 ‘슈’가 자신의 아내이며 습기의 신인 ‘테프뉴트’와 함께 이를 사이를 갈라 놓았지만 다른 신의 도움으로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낳으니 그들이 바로 이집트 신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다. 이들에 대한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오시리스는 아버지 게브로부터 왕위를 받아 인간을 다스리며 이집트 문명을 전해준 신이지만, 형제인 세트에 의해 살해 당한 후 아내 이시스에 의해 부활하여, 망자들의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누이면서 아내인데, 주술과 사랑의 여신으로 남편 오시리스가 남동생 세트에 의해 살해되어 뿌려진 시체를 모아 부활시키고 아들 호루스를 낳아 복수하고 아들 호루스를 세상을 다스리는 신으로 만든다. 비와 자연현상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세트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남동생인데, 난폭함과 전쟁의 그리고 혼돈을 불러 일으키는 악신이다. 오시리스를 두 번이나 살해하고 나라를 난폭하게 다스렸으나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에 의해 패배함. 사막의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신으로 땅돼지 얼굴을 하고 있다.
네프티스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여동생이면서 세트의 아내이지만 오시리스를 사랑하여 아누비스를 낳게 된다. 이시스는 자신의 남편 오시리스와 생긴 아누비스를 정성껏 기름. 네프티스는 죽음과 비탄의 신이다.
호루스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아들인데, 아버지 오시리스를 죽인 세트에게 복수하고 이집트를 다스림, 창공의 신이며 전쟁의 영웅신이다.
아누비스는 오시리스와 네프티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망자들을 오시리스 왕국으로 인도하는 역할 수행한다. 이집트 늑대 모습을 하고 있다.
하토르는 호루스의 아내인데 스스로 창조되었다. 사랑과 미의 여신이며, 암소머리 모양을 가진 신이다.
표로 정리하면 이렇다.
이처럼 이집트 인들은 기본적으로 태양 신을 모시지만, 지역에 따라 특정 신들을 더 숭상하고 파라오들은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신이 신으로부터 인정받는 모습을 벽화나 부조에 남기고자 했고 그것이 신전이나 무덤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신들이 있지만 이집트 인들에게 특히 인기 있어 숭배된 신들은 태양신 라, 아툼, 아몬을 비롯해, 현세를 다스리는 신인 호루스, 저승을 다스리는 호루스의 아버지 오시리스, 그리고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 호루스의 아내이면서 사랑과 미의 여신인 하토르 신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신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하지만 다양한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매의 모습을 한 호루스, 자칼이나 땅돼지의 세트, 늑대 모습의 아누비스, 암소의 모습을 한 하토르 등이다. 태양신 아몬도 숫양, 거위, 허물 벗은 뱀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신전은 위에서 언급한 신을 모시는 곳이다. 현세의 파라오들은 자신을 신의 대리인으로 여기게 만들고 죽어서는 신이 된다고 생각했으므로 신전을 만들어 숭배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력의 힘을 의미했기 때문에 모든 파라오들은 생전에 거대한 신전을 만들어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활용했다.
이집트에서 신전은 대부분 나일강의 남쪽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가장 남쪽인 수단 국경 근처에 ‘아부심벨’ 신전이 있고, 아스완 댐 주변의 ‘필레’신전, ‘콤 옴보’ 신전, ‘에드푸’ 신전 그리고 룩소르에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이 있다. 신전은 앞에서 말한 신들을 모시는 곳이다. 카르낙 신전과 룩소르 신전은 태양신 아문을 모시는 신전이었고, 아부심벨은 호루스와 하토르 신을, 필레신전은 이시스 신을, 에드푸 신전은 호루스 신, 콤 옴보 신전은 호루스와 악어 신인 소베크를 함께 모시는 신전이다. 이렇게 보면 현세의 왕으로 표현되는 신인 호루스 신을 모시는 곳이 가장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파라오가 현세를 다스리는 신이 되고 싶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전의 일반적인 형태를 보면 먼저 탑문이 나온다. 커다란 탑문이 나오기 전에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신전도 있고, 스핑크스가 열지어 있는 신전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신전 입구에 해당하는 큰 벽문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탑문이라 한다. 탑문의 좌우측에는 파라오가 이집트 신들로부터의 인정을 담은 부조나 자신의 업적을 담은 그림들이 표현되어 있다. 탑문을 지나면 커다란 석상(신이나 파라오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석상) 또는 커다란 기둥들이 나오고 거기에도 파라오들의 업적이나 행적이 그림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는 작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한데, 이런 방이나 기둥 벽에는 태양신 아몬을 비롯해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와 같은 신으로부터 자신의 권력을 받아 이집트를 다스리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해당 신전의 신을 모시는 지성소가 위치하고 있다. 이 지성소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파라오만 접근할 수 있었다 한다.
신전의 건립은 중왕국 시기부터 이루어졌는데 중왕국과 신왕국 시대에 집중적으로 건립되었다. 신전의 건립은 특정 파라오에 의해 시작하지만 건축 기간은 가장 큰 카르낙 신전의 경우 2000년이 걸렸을 정도로 한번 건립된 후 후대의 파라오에 의해 증개축이 이루어져왔다. BC 332년 페르시아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집트는 그리스 문명권으로 들어가게 되고,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를 이은 제 32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인 클레오파트라 파라오를 마지막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는데 이때는 기독교가 융성하게 된다.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다시 이슬람 문화권으로 들어가게 되어, 고대 이집트의 신전은 어떤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어떤 문화권에 있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게 되었다. 남아 있는 신전의 벽화가 기독교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기독교의 성화들로 칠해져 있고 또한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기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 기독교 건물을 쓰여질 때 많이 훼손된 모습이 많이 있다.
이집트 신전에는 당시 파라오의 위상에 따라 그들의 입상이나 부조들이 새겨져 있는데, 가장 유명하고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람세스 2세다. 람세스 2세는 24세에 즉위하여 67년 간 이집트 왕국을 지배한 인물로 자신이 건립한 신전뿐 아니라 이전의 다른 신전에 있는 파라오까지 자신의 모습을 둔갑시켜 자신을 신격화한 파라오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전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신전에서 볼 수 있는 주요 파라오는 신왕국 제18왕조 5대 파라오로 아들 대신 섭정는 22년 동안 이집트 왕국을 이끌면서 고대 이집트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최초의 여성 파라오였던 하트셉수트가 있고, 제 18왕조 6대 파라오로 19년간 19번의 원정으로 이집트의 나폴레옹으로 불렸던 투트모스 3세, 제 18왕조 10대 파라오로 종교개혁을 단행해 유일신앙을 주장하며 이름까지 바꿨던 아크나톤(변경 전, 아멘호테프4세) 파라오, 람세스3세, 투트모스 등이다.
룩소르 지역, 옛 테베 지역에 있는 카르낙 신전은 규모면에서 가장 크다. 약 3500년 전 아몬 신을 모시는 신전으로 건립되어 2천 년간 증축이 이루진 신전으로 탑문이 나오기 전에 스핑크스가 양쪽으로 열지은 모습이 나온다. 이 스핑크스는 사람 얼굴과 사자의 몸을 한 스핑크스와는 달리 숫양 머리를 하고 있다. 숫양은 아몬 신의 다른 모습이라 한다. 탑문을 지나면 커다란 기둥으로 만들어진 홀이 있는 열주식 안뜰과 홀이 나온다. 파피루스 모양의 지름 3미터의 거대한 기둥 134개가 숲을 이루고 있다. 성소에 이르기 전에 오벨리스크가 나오는데 현존하는 가장 큰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높이29.6미터)다. 그 오른 쪽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의 오벨리스크(23미터)가 서 있는데 아버지보다 더 높게 건립한 셈이다. 이곳에 투트모스 3세과 람세스 3세의 신전과 함께 카르낙 신전을 구성하고 있다.
카르낙 신전에서 3킬로 쯤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대규모 신전인 룩소르 신전이 있다. 카르낙 신전에서 룩소르 신전에 이르는 3킬로의 길의 양쪽은 스핑크스로 도열되어 있는데 이 길을 스핑크스의 길이라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에 600여 개의 스핑크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일년에 한번 카르낙 신전의 아몬신을 모시다 룩소르 신전으로 모시는 축제가 있었다 하는데 나일강의 축복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룩소르 신전 탑문 앞에는 높은 약 25미터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300년 경 람세스 2세가 세운 것으로 원래는 2개였는데 하나는 당시 이집트를 지배했던 무하마드 알리가 1829년 프랑스 왕 루이 필립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이동에만 3년이 걸렸다고 함). 룩소르 신전도 당시 이 테베지역이 숭배한 아몬 신과 그의 아내 무트와 두 신의 아들인 콘수를 모신 곳이다. 신전을 구성하고 있는 열주식 안뜰과 파피루스 머리의 열주랑 등은 다른 신전과 비슷하다.
하트셉수트 장제전도 룩소르에 있다. 장제전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란 의미다. 그래서 장례 신전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역시 가장 안쪽 지성소에는 아문 신을 모신 곳이지만 입구에는 하토르 신전과 죽음의 신 아누비스를 모신 신전도 갖추고 있다. 3층 테라스에는 오시리스 석상 들이 세워져 있는데 본래 26개였으나 지금은 8개만 남아 있다. 3단 테라스로 되어 있어 세계 최초의 테라스를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하트셉수트는 여성 파라오로 영토를 가장 넓히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이곳 벽화 부조에 아프리카 대륙 국가와 무역을 통해 나라를 발전시킨 모습이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하트셉수트를 잇는 투트모스 3세는 장시간 동안 대리청정을 하면서 왕위에 오른 자신의 이복어머니에 대한 복수로 그녀의 업적 지우기에 나서 이 장제전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하트셉수트가 파라오가 된 과정을 보니 이해가 된다.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스1세의 딸이었는데 당시 근친혼 풍습에 따라 이복 동생인 투트모스 2세와 결혼하게 된다. 투트모스 2세가 파라오가 되었으나 이른 사망으로 투트모스 2세의 다른 아내로부터 난 투트모스 3세가 왕위에 오르지만 당시 나이가 9세밖에 되지 않아 하트셉수트가 섭정을 하면서 공동 파라오가 되고 22년간 정계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하트셉수트가 죽은 후 권좌에 오른 투트모스 3세가 하트셉수트의 업적을 지우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트셉수트는 집권 동안 여성 파라오라는 햅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남장을 하였으나 석조에도 수염을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나 칭호에도 이집트의 여성형 어미를 붙이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남쪽으로 이동하면 에드푸 신전이 나온다. 에드푸 신전은 현세의 지배하는 신 호루스에게 받쳐진 신전으로 카르낙 신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신전이다. 기원전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시작되어 200년 간 건립된 후 나중에 1000년 이상 모래 속에 잠겨져 있었기 때문에 앞의 두 신전에 비해 늦게 건립되고 명성도 낮지만 보존상태가 아주 우수한 신전으로 알려졌다. 입구에는 호루스를 표현하는 매의 형태를 가진 호루스 석상이 놓여 있고 파라오들이 적과 싸우는 모습을 새겨놓은 탑문을 지나면 거대한 공간의 다열주홀이 나온다. 안쪽 홀 벽에는 1년에 한번씩 덴데라란 곳에 있는 그의 아내인 하토르 신을 데려과 이곳에서 합방을 하는 모습을 그려놓은 부조와 자신의 삼촌인 악의 신 세트와 갈등을 담은 모습도 나온다. 안쪽 성소 앞에는 태양선이 조각되어 있다.
다음은 콤 옴보 신전이다. 콤 옴보 지방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 콤은 동, 옴보는 금이라는 뜻이란다. 콤 옴보 신전은 다른 신전과 다른 점이 모든 것이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곳은 악어 신앙의 중심지였는데 악어 신인 소벡신과 현세의 신으로 인기있는 호루스 신을 같이 모셨다. 그래서 탑문에 이어 성소도 두 개이고 성소에 이르는 다열주 홀로 들어가는 곳도 두 개로 되어 있다. 성소를 지나 신전을 둘러싼 벽에는 당시 이집트의 의술을 수준을 말해주고 있는 제왕절개로 출산 중인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콤 옴보 신전 주변의 박물관에서는 여럿의 악어의 미라와 악어를 숭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 남쪽으로 가면 아스완댐 공사로 수몰되어 옮겨진 신전 두 곳이 있다. 필레 신전과 아부심벨 신전이다. 필레 신전은 본래 필레섬에 있던 신전으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 등의 도움으로 옆의 아길리카 섬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필레 신전은 오시리스의 아내이며 호루스의 어머니인 이시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이시스는 남편 오시리스가 남동생 세트와의 싸움으로 갈갈이 찢겨져 죽게 되자 고생 끝에 유해를 찾아내 부활시키고, 아들 호루스를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여동생이며 세트의 아내인 네프티스가 자신의 남편인 오시리스와 불륜으로 낳은 아누비스도 정성으로 키운 아내와 어머니의 본보기가 되는 여신이다. 필레신전은 이시스를 위한 신전이기는 하지만 이시스의 남편 오시리스, 아들 호루스가 당시 파라오의 모습과 함께 석벽에 부조되어 나온다. 특히 오시리스가 세트에 의해 조각 난 채로 뿌려질 때 한 조각이 이 섬에 뿌려졌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신성시 되어 왔다고 한다.
가장 남쪽, 수단에 가장 가까운 누비안 지역에는 필레와 마찬가지로 수몰 위기에 빠져 옮겨진 아부심벨 신전이 있다. 이부심벨 신전은 이집트 고대 왕국 최고의 스타 파라오라 불리는 람세스 2세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해 지은 신전이다. 아부심벨 신전은 대신전인 호루스를 모신 신전과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호루스의 아내인 하토루를 모신 소신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루스를 위한 신전에는 람세스2세 자신을 중심으로 꾸몄고, 하토르를 모신 신전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해 만들었다. 대신전 입구에 자신이 보좌에 앉아있는 22미터 조각상을 4개나 만들어 세상을 굽어살피고 있다. 소신전 입구에도 6개의 조각상이 있는데 넷은 람세스 2세 자신을 나타내고 있고 둘은 네페르타리를 표현하고 있다. 람세스 2세는 모든 조작물에서 나타나는 사람은 자신의 높이보다 낮게 만들었으나 유일하게 자신의 아내인 네페르타리만 같은 높이로 만들어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를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대신전 안으로 들어가면 8개의 거대한 오시리스 기둥이 마주 보고 있으며 벽에는 그가 재위시 18년 간 싸웠던 힛타이트와의 싸움인 카데시 전투에서의 용맹함을 과장하여 그려놓고 있다. 지성소에는 4개의 입상(대신전은 라 호라크티, 아문 라, 프타하 및 신격화된 람세스 2세 자신을 기린 상)이 있는데 입구로부터 22미터 깊숙한 곳에 1년에 두 번(일설에 자신의 생일과 즉위일이라 한다) 햇빛이 20분간 비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이날에도 어둠의 신인 프타하에는 빛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대부분의 신전은 그 지역 이름을 따고 있으나 아부심벨은 그 신전을 발견한 아이의 이름을 따 지었다고 한다.
이집트 인들은 현세의 삶보다 죽고 난 뒤 내세의 삶이 더 중요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저승의 염라대왕 격인 오시리스 신 앞으로 가서 죄의 무게를 달아 통과하면 부활한다고 믿었다. 이때 왼쪽에는 마아트(지혜의 신 토트의 아내)에 꽂은 깃털을 놓고, 오른 쪽에는 죽은자의 심장의 무게를 달아 죽은 자의 죄를 판정하고 심장 보다 무거우면 괴물 암무트에게 잡아 먹히고, 가벼우면 부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파라오의 미라에서 모든 내장을 꺼내 별도의 항아리에 보관하는데 심장 만은 함께 미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죽은 몸을 잘 보관하는 해야만 하는 전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 파라오들은 재임 시절부터 막대한 공사를 통해 사후를 위한 무덤을 만들고, 죽은 후에는 부패하지 않는 미라를 만들고 각종 초호화 부장품을 넣어 미래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집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피라미드가 아닐까? 그것은 압도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더불어 현대 기술력으로도 이해가 쉽지 않는 상징물이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직접 목도가 그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라미드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끝의 피라미드이고, 처음에는 사각형태의 거대한 무덤인 마스터바 형식으로 구축하고 그 아래 시신을 묻는 형태였다가, 건축 기술의 발달과 함께 태양신과의 접점을 상징하는 사각뿔 형태로 발전하였다 한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 구축에는 임호탭이라는 유명한 재상의 작품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그는 건축가, 행정가, 의사 등 다방면에 유능한 인물로 파라오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신격화 된 인물이다.
조세르 왕을 이은 스네프루 왕은 세 개의 피라미드를 구축하는데 점점 더 우리들이 흔히 보는 정방형의 피라미드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스네프루 왕이 만든 최초 피라미드는 무너진 피라미드로 구축에 실패하고 두 번째로 구축한 피라미드가 굴절형 피라미드인데 기술상으로 무너내리지 않기 위해 중간 부분에서 각도를 낮춰 구축했다. 그리고 이어서 구축한 피라미드가 붉은색 피라미드로 기자 피라미드의 원형이 되는 피라미드가 된다. 스네프루 왕이 왜 세 개의 피라미드를 구축했고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에 구축한 붉은 피라미드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상징인 기자 지구 피라미드가 구축되는데, 나란히 놓여있는 세 피라미드의 주인은 쿠푸왕, 카프레왕, 맨카우레왕으로 그들은 3代의 피라미드로 알려져 있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의 규모가 가장 크고 다음 아들 카프레왕, 손자 맨카우레 왕의 피라미드 순의 규모를 갖고 있다. 전국적으로는 84개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고 한다.
가장 규모가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 147미터에 밑변 230미터의 정방형 사각뿔 형태로 되어 있는데 무려 4500 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높이가 10미터 정도 낮아졌을뿐 지진을 비롯한 여러 악조건의 자연환경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쓰여진 돌은 평균 2.5톤의 바위를 230만 개라고 한다. 10년간 터를 닦고, 또 20년 간 구축하여 30년 걸렸고, 나일강의 범람이 있는 3개월 동안 매년 10만 명 이상이 동원되어 구축되었다고 한다.
가장 규모가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 내부를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도굴꾼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아래 쪽 동굴로 들어 갔는데 원래의 정문은 그보다 윗 부분에 있었다. 여럿이 줄지어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비켜가기 힘든 정도의 통로가 쿠푸왕의 석관이 놓여있는 곳까지 만들어져 있었고 그 통로도 외부의 피라미드처럼 점점 좁혀지는 계단 형태의 천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10여 분 오르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는데 그곳이 이 피라미드의 무게 중심에 해당한다고 했다. 거대한 석관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 놓여 있었을 미라와 각종 부장품들은 도굴꾼에 의해서 모두 도난되었다고 한다. 직사각형의 큰 공간에는 화강암으로 빈틈이 없이 벽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돌은 무려 100톤에 이른다고 한다. 100톤의 큰 바위를 피라미드 무덤 안에 이렇게 반듯하게 어떻게 위치하게 했을까? 그 무덤 속 공간 벽 양편에는 팔뚝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는데 당시 설치된 환기구라고 했다. 모든게 믿어지지 않는다.
세 개의 피라미드를 함께 보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스팟으로 이동했다. 여기서 낙타까지 포함하면 최고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낙타를 끌고 사진 찍고 돈을 받는 상인이 대기하며 호객을 하고 있었다.
피라미드와 함께 이곳 최고의 건축물은 스핑크스다.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스핑크스가 이곳카프레 왕 스핑크스 앞에 놓여 있다. 길이 62미터(자료마다 조금씩 다름), 높이 22미터, 얼굴 크기만 4미터에 이르는데 하나의 자연 암석을 조각했다고 한다. 스핑크스의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사자로 인간의 지혜와 사자의 용맹함을 나타낸다. 이곳의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얼굴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이집트 여행을 하다보면 거대한 바위에 여러 번 놀란다. 저렇게 큰 돌은 어디서 났으며 어떻게 잘랐으며 또 어떻게 옮기고, 다듬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래서 세계 7대 불가사의에는 빠지지 않고 거명되기도 한다. 이번 여행으로 여기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지만 아스완 지역에서 본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있는 지역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처음에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관광 코스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의문이 일었다. 완성된 것도 많은데 왜 하필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볼까? 하는 의문이다. 이집트에서 대규모 건축물이나 석상, 석주에 쓰여진 돌은 험한 자연환경에도 버텨낼 수 있는 돌인 붉은 빛이 도는 화강암이다. 이 화강암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 아스완지역이었고 대표적인 화강암 생산 채석지역이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있는 지역이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누워있는 지역은 넓은 채석장이었는데 주변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진 언덕이었다. 이동 중에 가이드는 일정한 간격으로 움푹 패인 곳을 가리키며 바위를 자른 흔적이라고 했다. 일정 간격으로 홈을 만든 후에 나무를 박아 넣고 그 나무에 물을 부어 팽창시켜 바위를 자르는 식이라는 것이다(대충 그럴듯했지만 그렇게 해서 어찌 칼로 자른 듯이 날카롭게 잘랐다는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다음에는 아이스크림 스쿠퍼로 떠내듯 움푹 움푹 패인 곳을 가리키며 저곳이 바위를 떠낸 흔적이라 했는데, 그것 역시 어떻게 해서 바위를 떼 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42미터의 미완성 오벨리스크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작업 중 중간에 금이 가서 공사를 중단한 것이라 했는데 무게가 무려 1200톤에 이른다고 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최초의 여성 파라오였던 하트셉수트 여왕을 위해 만들던 것이었다는데 카르낙 신전의 하트셉수트 오벨리스크보다도 10여미터 더 긴 셈이다. 만들어졌다면 세계 최고의 오벨리스크가 될 뻔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자른 화강암 덩이는 화강암보다 높은 경도의 현무암으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거나 조각했다고 한다. 여기서 떼 낸 바위는 나일강의 배를 통해 목표지역으로 나일강으로 옮기고 다시 해당 지역까지 옮겨 임시 흙을 쌓아 석조물을 옮긴 후 흙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장소에 위치시켰다고 한다. 본 사람이 없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이집트 인들은 내세에서 부활한다고 믿었기에 사후 시신을 잘 보관해야하는데, 미라 형태로 보관되어 몇천 년이 흐른 후에도 지금에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전에 대영박물관에서도 여러 미라를 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파라오 미라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었다. 피라미드이든 왕가의 계곡에 설치된 묘든 거의 모든 묘는 도굴꾼에 의해 도굴되면서 미라까지 사라지거나 훼손되었는데 지금까지 보존된 파라오 미라 20여 구로 일정 중에 있었던 이집트 박물관 지하에서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총 21구의 파라오 미라를 볼 수 있었는데, 한 구는 왕가의 계곡이란 곳에서 본 투탕카멘의 미라였고 나머지 20구는 이집트 박물관 지하에서 관람했다. 3,4천 년 전에 이집트를 좌지우지한 권력자의 시체 여러 구를 보고 온 것이다. 시커멓게 탄화된 시체는 섬뜩하게 느껴지기보다는 몇천 년 뒤에서 편히 잠들지 못하고 후손들의 관광꺼리가 되는 사실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오랫동안 썩지 않고 보관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어떤 미라는 얼굴 형태도 어그러져 있는 반면, 또 어떤 미라는 머리카락까지 생생하게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미라를 만드는 방법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의 미라는 장기까지도 꺼내 방부처리하여 별도의 항아리에 보관해 두었다. 한 사람의 미라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기간은 70일 정도였다고 한다.
왕가의 계곡은 고왕국의 왕들이 피라미드 무덤을 사용하면서 생기는 폐단을 막기 위해 생긴 왕가의 공동 묘지라고 했다. 피라미드는 웅장하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에는 좋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들의 눈에 잘 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피라미드 안에는 왕의 시신뿐 아니라 어마 어마한 금은 보석류가 함께 부장되어 있기 때문에 도굴꾼의 타겟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모든 피라미드는 이들에 의해 도굴되었다고 한다. 자신 이전 파라오의 무덤이 훼손되는 것을 목격한 후대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 대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왕가의 계곡을 생각해낸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 계곡 깊은 곳에 무덤을 사용하게 되면 도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후대의 왕들이 이 왕가의 계곡을 이용하게 되면서 파라오들의 공동묘지가 되고 무료 65기가 함께 묻히게 되었다.
왕가의 계곡에 도착하니 회색 산이 큰 계곡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산의 형태가 거대한 피라미드를 연상케 했다. 이번 여행에는 여러 가지 옵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비용이 많이 든 옵션 프로그램이 이곳 무덤을 보는 것이었다. 왕가의 계곡에 묻힌 무덤 중 가장 거대한 무덤은 137미터에 11개의 방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 아름다운 벽화를 가지고 있는 세티1세의 무덤이었다. 무려 185유로 거의 30만 원을 주고 20분 정도 관람했는데 이어 관람한 투탕카멘 무덤 70유로 그리고 입장료까지 합쳐 무덤 구경하는 데에만 45만 원이 들었다. 이전에는 왕비의 계곡에 있는 람세스2세의 아내 네페르타리 무덤을 185유로에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복원을 위해 폐쇄되는 바람에 이곳 세티1세 무덤관광으로 대체 되었다고 한다.
세티 1세는 19왕조 2대 왕으로 신왕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시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회복하는 등 훌륭한 파라오였으나 그의 아들 람세스 2세의 유명세에 가려진 파라오였다고 한다. 세티 1세는 이집트 박물관의 미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얼굴형이 워낙 보존이 잘되어 있어 관광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에도 분명이 기억날 정도다. 그는 40세 정도에 죽었다고 하는데 사인은 알 수 없고 키가 170 이상으로 큰 키였다고 한다. 미라의 길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세티1세의 무덤은 이탈리아 고고학자이자 탐험가인 벨조니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발굴 당시에 이미 도굴된 무덤이었지만 벽화의 채색 상태는 아주 선명했다고 한다. 발굴 이후에도 연구 명목 등으로 뜯어가 루브르박물관, 대영박물관, 이탈리아 박물관에 가 있다는데 그럼에도 이곳 무덤 중에는 가장 보존 상태가 우수한 무덤이라 했다. 무덤에 그려진 그림의 설명은 들어도 금세 잊혀진다. 이곳의 신들에게 인정받는 그림,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하토르, 아누비스 등의 신 앞에서 신성을 인정 받는 그림들이 생각난다.
이곳에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을 보고나니 네 칸 밖에 되지 않은 투탕카멘의 무덤을 초라하게 느껴졌다. 금세 관이 놓여 있는 곳으로 다가갈 수 있었고 그 옆에 세마포로 둘러 싸인 미라도 볼 수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3500여 부장품은 이집트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은 신왕국 파라오 무덤 중 가장 초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무덤이 유명해진 것은 1922년에 발굴될 당시 거의 도굴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투탕카멘은 이집트 왕국에 유일 신앙을 주장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아크나톤의 아들이자 사위다. 사위인 이유는 그가 이복 누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당시 풍습인 근친혼의 결과였는데 그는 10세 때 즉위하여 누이와 결혼하고 18세에 목숨을 잃은 불운의 파라오다. 죽음의 원인은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는데 둔기에 의한 암살, 근친혼의 결과로 생긴 유전병에 의한 죽음, 말라리아 감염 등이 추정되고 있다. 아무튼 존재감 없는 파라오였기에 역설적으로 도굴되지 않은 채 잘 보존된 무덤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투탕카멘을 미라를 덮은 관은 세겹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바깥에서 첫째, 둘째 관은 금을 입힌 관이었지만 마지막 관은 통째로 순금 110키로 만들어진 관이었다고 한다. 존재감 없는 파라오의 관이 이 정도였으니 나머지 파라오들의 무덤이 도굴꾼의 타겟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어서 왕가의 계곡 입장료로 3곳으로 추가로 볼 수 있어, 람세스 3세, 람세스 4세, 람세스 11세 무덤을 봤다. 파라오의 생전 업적이나 위세에 따라 규모에 따른 차이점은 있었으나 전체적인 느낌은 비슷 비슷하였다. 워낙 잘 보존된 유명한 무덤을 본 뒤라 지나치듯 관람하였다. 람세스3세는 유능한 람세스였으나 바다민족의 침략을 받아 국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기의 파라오이고, 람세스11세는 신왕국 시대 마지막 파라오였다.
이렇게 찬란한 고대문명을 개척했던 이집트는 현재 가난한 이슬람 국가가 되어 있다. 고대왕국 이후에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도가 증가하게 되고, 이후 7세기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슬람국가가 된다. 16세기 초에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고 나폴레옹 시대 잠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812년에서야 이집트의 아버지라 일컫는 무하마드 알리의 의해 이집트 근대화를 꾀하지만 다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다가 1922년에야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알렉산더의 침략으로 인해 그리스 영향을 받은 이래 약 2천 년 내내 어느 나라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의미다. 즉, 과거 기원전 3천 년의 역사를 이룬 민족은 2천 년간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완전히 다른 민족이 되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 문제나 수에즈운하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과의 싸움을 통해 중동지역 이슬람 권의 대표 국가 역할을 해왔으나 무라바크와 같은 독재자의 출현으로 올바른 민주국가로 자리잡지 못하고 2001년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무르시가 1년 만에 축출되고 엘시시 대통령이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이집트 근대화의 상징과 같은 곳이 아스완하이댐이라 볼 수 있다. 나일강이 이집트의 축복임에는 분명하지만 국토의 97%인 사막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홍수조절과 관개용수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1960년 러시아의 도움으로 착공하여 1971년에 완공된 아스완하이댐은 세계 최대의 락필(바위로 채운)댐이라고 한다. 아스완 지역 500킬로미터에 걸쳐있는 댐인데 댐 위에 올라서서 보니 수평선이 보일 정도다. 마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개발 프로젝트는 잇점을 위해 시작하지만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댐의 건설로 인해 앞서 말한 유적지 이동뿐 아니라 이주해야 하는 주민들에게 준 피해는 기본이고, 나일강변에 자라던 파피루스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등 각종 환경 문제를 유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곳곳의 유적지에는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1달러를 외치며 호객을 하는 상인들의 천지다. 보통은 10배 정도의 가격을 부르다가 떠날 때 즈음이면 1/5, 1/10 가격으로 흥정해 온다. 그리고 모든 관광순서에는 팁이 붙어있다. 화장실도 3,4명에 1달러 정도의 비용이 있어야 이용할 수 있었고, 무언가 가까이 와서 베푸는 선행(?)을 받아들이면 어김없이 팁 요구가 있었다. 무덤 속을 지키는 관리자들도 팁으로 사는 듯 보일 정도였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라도 팁을 주면 가능하다고 한다. 가이드들도 그들에게 웃돈을 통해 많은 것을 해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아스완에서 룩소르까지 즉 아스완 – 콤옴보 – 에드프 – 룩소르까지는 나일강 유람선에서 3박을 하며 강을 따라 이동했는데 나일강변에 줄지어 있는 크루즈가 그 역할을 했다. 대형 크루즈는 아니었지만 나일강변의 크루즈들은 제법 호텔 모습(3성급 수준)을 갖추고 있었고 정박할 때는 여러 크루즈들이 연결되어 흔들림을 막았고 크루즈 간 로비를 통해 이동하였다. 크루즈숙소 창가는 바로 나일강변이었고 강변의 멋진 풍경과 일출과 장엄한 석양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크루즈에서는 매일 저녁 전통 공연이 있었지만 매일 파김치가 될 정도의 빡빡한 일정이라 저녁 먹고 바로 자버리는 바람에 볼 수 없었고, 선박 맨 위층에는 수영장과 선베드도 갖추고 있었지만, 우리가 머물 때는 날씨가 쌀쌀하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그곳을 이용하기는 어려웠다.
후루가다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휴양지다. 이집트 관광은 나일강을 따라 있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신전, 무덤, 피라미드, 스핑크스, 그리고 석상을 관광하는 것이라면 후루가다는 나일강이 아니라 홍해 해변에 있는 휴양도시다. 수도 카이로에서 그리고 룩소르에서도 5시간 정도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데 우리 나라로 보면 서울(카이로)과 대전(룩소르)에서 동해로 떨어져 있는 휴양도시 강릉(후루가다) 쯤으로 보면 되겠다.
이곳은 겨울에도 해수욕이 가능할 정도로 따뜻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북반구의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휴양지라 한다. 특히 러시아인들에게 인기가 있어 1만 명 정도가 살고 러시아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도 여러 개 있다고 한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본래는 세계화를 외쳤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이 이곳을 개발하려고 했는데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바람에 러시아에 개발권이 넘어가 버렸다며 만약, 김우중 회장이 이곳을 개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곳은 겨울에도 따뜻해서 인기가 있기도 하지만 물가가 워낙 싼 곳이라 그렇기도 하다. 오성급 호텔 숙박비기 10만원 정도인데 우리들이 그 호텔에 묵는다는 표시인 팔찌만 보여주면 2박 동안 식사, 술과 음료를 모두 무료로 무한대로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홍해 바다가 수정처럼 맑아 잠수선을 이용한 열대어 관광과 스노쿨링을 즐길 수 있었다.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릴정도의 에머럴드 홍해였지만 우리가 묵을 때는 이상 기온으로 인한 10도 내외의 기온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춥다고 느껴져 몸을 담그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주로 호텔에서 시간을 보냈다. 때마침 맞은 결혼 38주년을 기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