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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의거북 Oct 24. 2021

[방황하고 있습니다] 산책하는 시간

시간의 터널을 지나는 공상을 합니다 

2021.10.6

오늘 아침에는 추웠다.

드디어 추워졌구나, 생각하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밤이 길어지고 추위가 심해지면 출근하기는 더 힘들어지겠지만 그래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일찌감치 나가서 버스를 기다렸다.

비가 오고 있었고 날은 아직 어둑했다. 아침 6시15분이었다.


요즘은 표정 짓기가 힘들다.

정확히 말하면 좋은 표정을 짓기 힘들다.

무기력이 자주 찾아온다. 

점심을 먹고 긴 산책길에 나섰다. 

우산을 쓰고 부드러운 갈색 가디건을 걸치고 걸었다.

비 오는 날은 산책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다.

혼자 길을 따라 걸었다. 

풀내음이 진한 길을 따라 걷다보면 터널이 나온다. 

나는 이 터널을 좋아한다.  

이 터널로 들어가면

원하는 곳으로,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터널을 들어서서 어딘가에 닿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면

터널에서 빠져나올 때, 그곳에 닿게 된다- 라고 상상해본다.

나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닿고 싶을까.

지나온 길 중,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아프거나 서툰 시간들이었으니까. 


최근에 <완벽한 아이>라는 책을 읽었다. 어려서부터 갖은 학대를 받으며 자라온 작가의 

실제 어린시절 경험을 쓴 책이다. 춥고 시리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다.

미쳐버리거나 삶과 자신을 포기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작은 아이 안에 있는 그 '힘'은 대체 무엇일까. 

인내, 끈기, 복수하겠다는 목표?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건 상상하는 능력이었다. 작가는 갇힌 환경 속에서 다양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동물과 자연에서 유대감을 느꼈다.

상상하는 능력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 


터널을 지나 초등학교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서 카페에 간다.

기계로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커다란 갈색 소파에 앉아 기다린다.

통유리로 밖을 내다본다. 

에스프레소를 반쯤 마시다가 나머지 반에는 설탕을 넣는다. 

설탕이 걸죽하게 녹아 가라앉는다. 

들이킨다. 쓰다. 달다. 진득한 단맛이 입에 녹아든다. 좋다. 

작은 잔 바닥에는 썰물이 빠져나간 모래사장처럼

쓸려나오다만 설탕의 잔해가 깔려 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산책을 나온지 30분이 지나 있었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간다. 

아까 지났던 터널을 다시 한번 지난다. 

터널안에는 마른 낙엽들이 쌓여 있다. 흙이 되어 가고 있다.

정말 이 안에는 시간의 틈이 벌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간의 것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지도 모르겠다.  

풀냄새를 맡으며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럴 때 나는, 어느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시골까지는 아니더라고, 주변에 산과 나무가 많고 교통이 불편한 곳임은 맞다. 


다시 돌아간다. 세상에 발을 붙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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