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관계]
별일 없던 하루였는데도, 괜히 마음이 무거운 날이 있다.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고,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문득,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순간. 퇴근길 차 안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괜히 울컥하기도 하고, 아이를 재우고 난 고요한 밤에 갑자기 마음 한편이 시려오기도 한다.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유가 없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우리 안에 오래도록 쌓여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그런 감정이 불편했다. 내가 약해진 것 같고, 어딘가 고장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 감정이 올라오면 애써 무시했다. 라디오를 끄고, 텔레비전을 켜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억지로 눌러두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눌러놓은 감정은 어느 날 더 큰 무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슬픔에도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슬픔도 그저 내 안에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도록, 그냥 그렇게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무거운 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는데, 자꾸만 생각이 많아지고, 지난 일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어릴 적 기억, 잊은 줄 알았던 감정, 그때 하지 못했던 말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마치 오늘의 일처럼 다시 마음속에 내려앉는다. 그건 어쩌면, 내가 미처 마주하지 못한 나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괜찮은 척 살아오느라 밀어두었던 감정들.
얼마 전, 별일 없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이와 짧게 놀고, 저녁을 먹고, 아이를 재운 뒤 소파에 앉았다. TV에서는 별 의미 없는 예능 프로그램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 그때 갑자기 이유 없이 울고 싶어졌다. 피곤한 탓일까, 아니면 그냥 오늘이 그런 날이었을까. 스스로 몇 가지 이유를 끄집어내 보았지만, 어느 것도 딱 들어맞지 않았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슬펐던 거다.
이전 같았으면 그런 감정을 털어내려 애썼을 것이다. “왜 이러지?”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고, 억지로 기분을 끌어올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슬퍼하는 나 자신을 그대로 두었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않고, 조용히 감정이 흘러가게 놔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감정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마음속에 잠시 파문을 일으켰던 감정이, 어느덧 조용히 가라앉은 호수처럼 다시 평온해졌다.
우리는 기쁨이나 행복에는 관대하면서도, 슬픔이나 외로움에는 지나치게 까다롭다. 기쁘면 기쁜 대로 표현하면서, 슬프면 그 감정을 숨기려 한다. 마치 슬픔은 잘못된 감정인 양 다룬다. 하지만 슬픔도 내 일부다. 때로는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를 끌어안고 싶은 날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속에 내려앉고, 누군가가 등을 토닥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올 때, 나는 이제는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오래된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저녁. 그런 순간이 점점 더 소중해진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잠깐이라도 내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꼭 무언가를 해내야만 의미 있는 하루가 아니라, 그렇게 감정을 잠시 머물게 하는 시간도 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오늘은 그냥 좀 그래.”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별일 없지만, 그냥 마음이 무거운 날이라고. 그리고 그 말에 “그래, 그럴 때도 있지.”라고 대답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꼭 해결책이 아니어도 된다. 어깨를 토닥여주고, 조용히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전에는 이유 없는 슬픔을 잘 견디지 못했다. 나약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스스로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날이 오면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구나.” 그리고 그 감정에 자리를 내어준다. 억지로 몰아내지 않고, 그저 함께 머물다 가도록 둔다. 그렇게 하루를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어떤 감정이든 지나간다. 기쁨도, 분노도, 슬픔도. 감정은 마치 계절처럼 지나가고, 그 흔적은 삶 속 어딘가에 조용히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감정들을 하나씩 품에 안고 살아간다. 슬픔을 피하려 애쓰는 대신, 그 감정과 함께 걸어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조금은 단단해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가끔은 이유 없이 슬퍼도 괜찮다.
그 감정도 지나고 나면, 그냥 내 삶의 일부가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