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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Nov 04. 2023

사무실이 아니라 뷰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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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사무실에는 사무실 면적의 반 정도 되는 널따란 테라스가 있다. 테라스에는 빨간색 어닝이 있다. 나는 출근하자마자 어닝의 손잡이를 돌려 테라스 크기만큼 빨간색 어닝을 편다. 그리고 퇴근할 때는 손잡이를 반대로 돌려 어닝을 접는다. 그래서 그런지 퇴근길 지하철을 타면 어깨와 팔이 욱신거린다. 그래도 좋다. 빨간색 어닝 아래 앉아 가을 햇살을 온전히 느끼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기분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다.  


몇 주 전 사무실이 이사를 했다. 7평 남짓한 원룸에 화장실이 딸린 오피스텔이다. 김 과장, 송 주임, 나. 여자만 셋! 그중 둘은 40대 후반의 워킹맘이고 하나는 신입을 갓 벗어난 20대 중반이다. 송 주임 말에 따르면 이 오피스텔의 대부분은 가정집이란다. 우리 사무실도 하루가 다르게 가정집으로 변해간다. 여자 셋이 출근할 때마다 소꿉놀이하듯 집에서 안 쓰는 애착템들은 가져온다. 그저께 김 과장은 키친매트를 가져와 탕비실 바닥에 깔고 어제는 선물 받고 쟁여두었던 접시와 티스푼을 가져왔다. 탕비실이라 쓰지만 실제론 현관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싱크대와 2구짜리 인덕션이 있는 1자형 부엌이다. 원룸이라 어느 자리에 있어도 훤히 보이는 곳이지만 우리는 그 언저리를 탕비실이라 부른다. 송 주임은 잠잘 때 안고 자는 갈색 푸들인형을 가져와 가슴에 안고 일을 한다. 나는 추석선물로 들어온 드립커피세트와 편하게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일명 일복이라 부르는 넉넉한 카디건과 헐렁한 바지를 챙겨 왔다.


그리고 각자의 취향이 묻어나는 슬리퍼를 신는다. 송 주임의 슬리퍼는 까만 크록스에 알록달록 귀염귀염한 디즈니풍 캐릭터들이 잔뜩 붙어있다. 김 과장은 전주인이 남기고 간 화장실 슬리퍼를 신고 나는 자주에서 만구천 원을 주고 산 베이지색 줄무늬 슬리퍼를 신는다. 어떤 공간에서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는다는 건 공적인 공간이 사적공간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더 가까워진 것은 아니지만 각자의 취향을 드러내고 그것을 화제로 한번 더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시간이 생긴다는 건 그대로 의미가 있다.


어제는 육아휴직 중인 권 과장이 4개월 된 아기를 안고 놀러 왔다. 김 과장은 권 과장이 오기 전에 물걸레로 꼼꼼히 탕비실 바닥을 닦은 후 집에서 가져온 한쪽 면이 코튼으로 된 두툼한 블랭킷을 깔았다. 나는 테라스로 나가 빨간색 어닝 아래 자리한 기다란 테이블을 물티슈로 닦았고 송 주임은 미리 시켜놓은 피자와 파스타를 테이블 위에 차렸다. 권 과장이 아기띠를 풀자마자 김 과장과 나는 서로 아기를 안아보겠다고 가위바위보를 했다. 송주임은 그런 우리가 낯선지 아님 아기가 신기한 지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제 뒤집기를 시작한 아기를 블랭킷 위에 누이고 다 같이 테라스에 앉았다. 고맙게도 아가는 금세 잠이 들었다. 권 과장은 테라스 전망이 미쳤다며 요리조리 사진을 찍고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사하는 날 얼마나 기가 찼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이삿날 풍경은 '쓰고 나면 지워질 이야기 둘'에 그려놓았다.) 대표와 보낸 시간이 우리보다 긴 권 과장은 개구진 얼굴표정을 찌푸리며 우리들 한풀이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곧 육아의 힘듦으로 이야기가 옮겨가자 육아의 달인이자 백과사전인 김 과장은 A에서 Z까지 다 알려주겠다는 기세로 권 과장의 한마디에 열 마디를 보태었다.


아기가 울지도 않고 깼다. 점심시간은 끝이 났다. 각자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고 권 과장은 탕비실 바닥에 앉아 아기에게 분유를 먹었다. 권 과장이 돌아가자마자 재택근무 중인 남 과장과 명 과장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사무실이 아니라 뷰맛집이라면서요' 하면서...


작디작은 사무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맘에 들어간다. 휴직을 한 달 더 미룰 만큼. 마치 집이 아닌 곳에 나만의 방주가 생긴 것처럼 나는 주 2회 출근 룰을 깨고 거의 매일 출근한다. 분명 재택근무 날인 내일도 아침이 되면 옷을 챙겨 입고 도망치듯 사무실로 출근하겠지. 그리고 빨간 어닝을 펴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파아란 하늘을 보고 눈 아래 깔린 건물들의 옥상 풍경을 감상할테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옥상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거나 전화를 하거나 담배를 피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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