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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롬나 Jan 23. 2024

걷기 좋은 날

생각을 덜어내고 싶다면 일단 나가서 걸어보자

오랜만에 R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새로운 맛집을 찾으면 함께 먹으러 가거나, 소소하게 구경하는 취향까지 공통점이 많아서 만나면 편하고 재밌게 보낼 수 있다.     

오늘은 마라샹궈를 먹기로 한 날이다. 

주변에 마라 맛을 즐기는 사람이 별로 없고, 얼얼함을 가장 강하게 먹고 고수를 좋아하는 취향까지 똑같아서 놓칠 수 없는 마라메이트이기도 하다.

오늘도 마라 강도가 어느 정도 채워진 곳에서 흡족하게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우리는 만나면 항상 지하철역 3-4 코스 거의 1시간은 기본 걷기를 하는 것 같다. 

배도 부르고 다음 디저트 가게까지 거리가 있어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가면서 새로 생긴 타코야끼 가게를 구경하며 다음에 와보자고 약속하고, 온천천 앞을 지나갈 때마다 보던 커다랗고 예쁜 나무가 잘려진 모습을 보며 한참을 안타까워하고, 자주 가던 칼국수 집에 임대를 붙여놓고 폐점을 한 모습을 보며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움직이면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와 찬바람이 만나서 두 볼이 발그레해지기도 하고, 

마스크에 맺힌 땀방울을 확인하고 열심히 걸어왔다며 함께 뿌듯해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무작정 계속 걸었다. 

천천히 걸으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다보면 내 안에 가득 찬 생각들이 정리되어서 어느새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되어버린 것 같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끝내 떨어졌던 최종면접 통보 문자에도, 1년에 한 번 있는 자격증 시험을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을 때도, 답답한 마음을 달래러 무작정 몇 시간씩 쉬지 않고 걸었다.

잔뜩 기대하고 있거나 너무 걱정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과분한 마음들에 조금은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걸을 때는 신경 쓸 게 정말 많다. 

제대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장애물은 없는지 목적지를 향해 주위를 끊임없이 살펴보며 긴장하면서 걸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어져 머리가 저절로 비워지게 된다.  

말끔하게 비워진 머리로 주위를 둘러보게 되면 희한하게 더 자세하게 관찰을 하게 된다. 


목적지 없이 계속 걷다보면, 항상 보이는 동네 산책 강아지들, 시간에 맞춰서 켜지는 가로등 불빛, 계절마다 다르게 심어져 있는 온천천 식물들, 해질녘 붉게 물든 노을, 건물들 사이에 예쁘게 걸려있는 초승달이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온전히 보이는 시야의 것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과잉되어 있던 내 감정들이 차분해지면서 내 안의 것들에 집중을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의 잘못된 점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울컥해지는 마음을 성찰하며 다시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기도 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신호등 앞 대기 자리에서 마주치는 웰시코기는 사람들을 경계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관찰을 한다. 매번 인사도 하고 간식도 주려고 하던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이제는 짖지도 않고 활짝 웃으며 사진도 같이 찍어준다. 


매번 같은 시간대에 만나는 대형견은 스탠다드 푸들인데,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입에 보조기를 낀 채 산책을 다닌다. 몸집은 크지만, 아직 어린 강아지라서 호기심이 정말 많다. 

사람들을 좋아해서 가까이 가는 건데 겁에 질려서 무서워하며 도망가면, 혼자 주눅 들어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매번 짠하면서도 너무 귀엽다.     


저 개들이 사람들과 통하는 언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은 더 빨리 친해지고 다가가기 쉬울 텐데, 

평소에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낯을 가리며 친해지는데 시간이 조금은 걸리는 편이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저 개들의 낯가림도 사실은 친해지고 싶은데 낯설어서 그런 거라고 대신 나서서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사는 동네의 온천천은 시설이 많이 낙후 되어 있어서, 어둡기도 하고 사람도 많이 없는 편이라 조심해서 이동해야 하는 구역이 있다.      

한 번은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고 따라서 같이 걸어가는데 뭔가 검은 물체가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서, 놀랐지만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 간발의 순간이었다. 쥐 인가, 고양이인가 용기를 내어서 천천히 따라가서 보니, 수달이었다.

자그마한 손과 날쌘 두발로 재빨리 하천을 지나다녔다, 나중에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건지 반응을 즐기는 건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발 앞에 나타나, 하천을 지나가는 내내 사람들의 소리 지름을 계속 들을 수 있었다.     

커다란 부리와 날개를 펼치면 거의 성인 한 명쯤은 거뜬히 가릴 수 있는 크기의 새를 봤을 때도, 신기해서 주위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 새의 종류는 왜가리였고, 이제는 온천천에서 너무 자주 마주쳐서 놀랍지도 않을 정도이다. 

바닥이 비칠 정도로 얕은 온천천에서 커다란 잉어들이 살려고 헤엄치는 것을 구경하며, 생태계의 신비로움을 볼 때마다 느낀다.


온천천의 여러 동물들도 사람들의 손길이 없어서,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지내며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닌지, 자연스러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언가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걸 보면서 나의 모습들에 투영되기도 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너무 애쓰고, 완벽해지려고 내 감정이나 속도들을 무시한 채 인위적으로 살았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저 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본능에 맡기며 살아가는 동물들, 아름답게 성장하는 식물들, 사람들과 공생하는 반려견까지 수많은 생물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나가는 자연속의 그들처럼 당당하고 본능적으로 하루를 채워나가면 어떤 삶이 펼쳐질지 궁금해졌다.      


걷기 좋은날, 편한 운동화에 따뜻한 방한용품 챙겨 입고 겨울 산책 하러 다시 나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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